최근에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에서 주인공 계나는 사회의 암묵적인 질서를 성실히 따른다. 집안의 지원 없이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좋은 직장에 취업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출근길에 2시간을 보내고, 추위를 많이 타지만 냉방인 집을 견뎌낸다.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작은 부품으로써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낸다. 남자친구의 가족은 계나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하는 티를 낸다. 계나는 애를 쓸수록 마른 멸치처럼 바짝 말라 비틀어가며 피해의식이 커져간다. 끝내 결단을 내린다. 자신은 한국 사회와 맞지 않으니 뉴질랜드로 떠나겠다고.
뉴질랜드에 워킹홀리데이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환멸은 이어진다. 명문대를 나온 계나는 단순 노동부터 시작해야 했고 일터에서는 인종차별을 겪는다. 일하면서 만난 친구는 계나에게 모험을 권장하며 빌딩 꼭대기에서 낙하산을 펼치고 떨어진다. 계나도 이 일에 연루되어 그동안 번 돈을 모두 벌금으로 내게 된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계나에게는 어떤 내면의 변화가 필요한 것일까?
영화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다루지 못한 채, 동화책의 내용을 빌려 얼렁뚱땅 마무리 지었다. 동화 속 펭귄은 추위를 싫어해 모든 걸 걸고 남극을 떠나 탐험하고, 끝내 따뜻한 나라를 찾는다. 주인공도 다시 새로운 나라로 떠나면서 동화처럼 해결할 거라는 근거 없는 낙관성을 던지며 끝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매듭지어지지 못한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나풀거렸다. 그래서, 한국이 싫다고 떠나면 그게 정말 해결책이 될까?
한국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에 따라 자살률도 상승했다. 이는 경제적 성공을 위한 단일한 길을 설정하고 모두가 맹목적으로 경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영화에서 계나는 사회의 암묵적 기대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정체성을 잃어간다. 계나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따뜻한 나라가 아니라 정체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실패자라는 가혹한 판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을 탐색할 기회였을 것이다. 뉴질랜드가 낙원이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계나의 얼굴이 더욱 매력적이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정체감은 간단히 말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다. 건강한 정체감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도전하고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오늘날 '나답게'라는 문구를 쉽게 사용하지만, 건강한 정체감이 있어야만 나 다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정답이 존재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는 시행착오를 겪을 여유를 갖기 어렵다.
영화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의 가족은 뉴질랜드에 이민 가서 잘 정착해 살고 있다. 계나가 꿈꾸는 생활이지만, 그 남자는 늘 불안해한다. 집이 흔들리는 것 같은데 아무도 공감해주지 못한다.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니 남자는 더욱 힘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나중에 실제로 그 지역에서 강한 지진이 났다는 뉴스가 나온다. 어쩌면 그 남자는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감각이 민감한 사람으로 남들이 못 느끼는 미세한 지진의 징후를 혼자서만 알아차린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신뢰할 수 없던 남자는 점점 미쳐갔다. 그의 모습은 외부의 동의 없이 주관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외부에서 자신의 주관에 대한 인정을 받기 어렵다면, 그 환경을 떠나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
다시 내가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겠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다면,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건강한 정체감 형성이다. 경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귀 기울여서 선택하고, 그 결과를 통해서 배우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자세로 주인공이 여러 나라를 경험한다면, 주인공이 찾던 따뜻한 나라는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반면외부만 바라보면서 변화를 시도하여 내면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진정한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