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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 없이 달리기 Sep 17. 2023

꼭 의미 있고 계획적인 하루를 보내야 하나요?

변덕스럽게 달리는 법

*[별일 없이 달리기 magazine]

평안한 달리기를 추구하며 ‘달리기와 일상’에 대한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달리기는 마음이 편한 운동이다. 별다른 준비 없이도 꽤나 큰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달리기에 맞는 ‘복장’이 어느 정도 갖춰져야 달릴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마라톤대회에서는 분장을 하고 42.195km를 뛰시는 분들도 많다. 임금님 복장을 하고 풀코스를 완주한 주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복장이 조금 불편하면 그에 맞게 달리기 속도나 거리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면 되는 것이었다. 달리기는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 점에서도 마음 편한 운동이다. 대부분의 운동은 특정한 장소나 장비를 필요로 한다. 배드민턴을 치려면 최소한 셔틀콕과 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코트를 예약해야지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나름 대중적인 운동인 헬스도 헬스장을 가야 한다. 아마 달리기가 거의 유일하게 시기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고 혼자서도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반대로 한동안 나의 보통의 주말은 편안하지 않았다. 계획으로 시작해서 무계획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주말을 맞이하기 전에는 "이번 주말은 뭘 하며 보낼까?"라고 계획을 짜지만 결국 계획대로 주말을 보내지 못하고 월요일을 맞이하곤 했다. 예를 들어 "이번 주말에는 카페 가서 글을 써야겠다"하고 마음먹고 집에서 빈둥대며 하루를 보내거나, 쇼핑을 가고 자책하는 식이다. 이런 주말이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주말을 보내도 쉰 것 같지가 않았다. 나로서는 계획한 대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는 점은 당황스러운 점이기도 했다.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않더라도 주말을 계획한 대로 보내는 생활을 마치 게임처럼 즐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즐기던 삶의 패턴이 되려 나의 숨구멍을 옥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해결법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 보통의 주말에 나는 무언가에 조종당하듯이 계획 없이 집을 나섰다. 그리고 평소 즐겨 찾던 카페에 가서 평소 먹던 루이보스바닐라 티 한 잔을 시킨다. 그러고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목적 없이 허공을 응시하거나 초점을 잃은 채 강물만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공허 속에 빠져드려고 최선을 다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무(無)의 상태를 유지하려 최선을 다했다.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번득이는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그냥 두었고 그것들을 붙잡아두고 정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려고 애쓰자 생각이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도 점차 편안해졌다. 이러한 무(無)를 통한 생각정리의 끝에는 항상 '나(我)'가 있었다. 가령 "이번 주말에 뭐 하지?"라는 질문이 "나는 지금 뭘 하고 싶지?"라는 질문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보다 만족스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왜 나의 어린 시절에 어른들은 ‘계획이나 시간의 중요성‘만큼이나 ’ 쉬는 방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려주시지 않았던 걸까. 노력하는 것보다 쉬는 게 더 어려운데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무작정 집 밖을 나간 뒤에 목적지를 정하는 일이 많아졌다. 복잡한 계획 없이 마음 끌리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어제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태안의 만리포해변'이 떠올랐다. 만리포는 15년 전에 친구들과 잠깐 여행을 갔던 곳인데. 여행을 했다는 '사실'만 있지 내가 뭘 보고 즐겼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언젠간 다시 한번 가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만큼은 내 멋대로인 나는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외곽순환도로를 지나 서해안고속도로를 쭉 달렸다. 가다가 길을 잃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목적지를 변경하면 그만이었다. 가는 길에 비마저도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왔다가 안 왔다가 하는 것이 변덕스럽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태안 해변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서 서산 IC를 빠져나왔다. 예전 골목식당을 보고 가보고 싶었던 서산의 해미읍성을 가볼까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오늘은 나의 마음이 나를 태안으로 계속 이끌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과 이정표가 이끄는 세시간여의 여정 끝에 만리포 해변에 도착을 했다. 10여 년 전 과거의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안도로에 주차를 하고 해변을 걷는다.


 해안가 앞에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2층에 올라와 잠시 여유를 즐긴다. 한두 시간 정도 글을 쓰던 중 그런데 갑자기 카페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 년 정도밖에 쓰지 못한 싸구려 블루투스키보드가 고장 난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 큰 스트레스를 받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상관없지 뭐, 대충 허기지던 참이었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김밥을 샀다. 차에 돌아와 대충 끼니를 때운다. 이것을 본격적인 계획여행이라고 생각했다면 태안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집을 찾아가야만 만족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런대로 차에서 먹는 편의점 음식도 나름 낭만 있고 좋았다.


 '지금 인천까지 올라갈까?'라고 생각해 봤지만 아직 차가 막힐 시간이다. 적어도 7시 이후에 출발하고 싶었다. 날씨 때문에 불가능에 가까울 태지만 일몰을 한번 봐볼 마음도 있었다. 운이 좋게도 비는 점차 그쳐가는 중이었다. '오늘날이 흐려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차에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찹찹하니 기분이 좋았다.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좀 보내다 보니 어느덧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가을에는 7시 정도면 해가 다 진다. 슬슬 해안가로 다시 향할 시간이다.


  오늘은 달릴 계획이 없었지만 비가 잦아들면서, 즉흥적으로 '뛰기 좋은 날씨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선게 아니기 때문에 신축성 없는 면바지를 입고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복장이 불편하니 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차에는 보통 여분의 러닝화를 구비를 해놓으므로 신발만 대충 갈아 신고 달릴 채비를 마쳤다.


최악의 깔맞춤

 만리포 해변 끝쪽에 빨간 등대가 있는 걸 봐두었다. 해안가 모래사장보다는 바다 깊은 곳에 위치한 등대에서 거기서 일몰을 구경하면 더 운치 있을 거란 생각에 등대로 향한다. 거리는 대략 편도 1.5km 정도 되어 보였다. 아까 편의점 음식을 과식한 탓일까, 아니면 신축성 없는 바지 때문일까? 달리기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다. 힘들면 천천히 뛰거나 걸으면 될 일이고 그마저도 힘들면 그냥 되돌아가면 된다. 다행이었던 점은 그래도 계속 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스치는 풍경과 바람을 느끼다 보니 어느 무렵 등대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게 6시 30분부터 7시까지 등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구름이 많아 역시 완벽한 일몰을 보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구름이 미처 깔리지 못한 하늘바닥에 용암 같은 햇빛이 구름을 찢고 나왔다. 그 모습이 찬란하기까지 보여 신기한 광경이었다. 매번 완벽한 일몰만을 계획하고 여정을 했던 나로서는 평생 보지 못할 광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을 돌리자 태안의 해변 마을도 보였다. 데크길에 있는 LED램프도 나름 운치 있다. 태안 해변 바로 뒤에는 산이 많았다. 구름이 산을 타고 넘어가는 것인지, 산이 구름을 흡수하는 것인지 그런 장면도 나름 진귀한 장면이었다. 주변을 그렇게 둘러보니 나 또한 구름에 둘러 쌓여있는걸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와 내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때 즈음 나의 태안여행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달리기는 각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좋은 운동이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뛰거나 걸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무엇을 꼭 해야 한다거나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과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좌절'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을 비워내고 나를 알아간 것처럼, 내가 달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내가 원하는 만큼의 달리기를 했을 때도 결국 내가 남는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바람의 촉감 그리고 가을이 다가오는 냄새 그리고 건조한 날씨에 말라오는 입술.. 내가 원할 때 하는 달리기는 평일에 정신없이 살아온 나에게 온 신경을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이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진정으로 1인칭화 됨을 느낀다.

 1인칭화 된 세상 속에서는 삶의 중심이 내가 되고 작은 감촉하나하나가 기쁨이 된다. 나는 나의 시간을 의미 있게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 왔으며, 나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살아왔을까.. 오늘은 송도의 한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집을 나설 때는 비가 적잖이 왔는데 지금은 구름 한 점 없이 고운 하늘을 보니 꽤나 변덕스러운 하루가 될 것 같구나, 오늘 저녁에도 뛰고 싶으면 뛰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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