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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탐험가 황다은 May 13. 2021

골목 여행의 끝판왕을 만났습니다

골목 여행은 매력적이다. 골목을 걷다가 예쁘고 개성 넘치는 가게를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집을 개조한 건물들은 더욱 매력적이다. 한옥을 예쁘게 개조한 카페나 구옥을 고쳐 만든 맛집은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이색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그렇게 빈티지와 레트로는 어느샌가 핫한 카페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골목 여행을 하다가 가끔 아쉬울 때가 있다. 나의 경우는 맛집-카페-맛집-카페로 이어지는 골목 여행이 그랬다. 너무 소비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오래된 건물들이 살아남을 방법은 카페밖에 없는걸까? 옛 건물을 다른 방법으로 경험할 수는 없을까? 물론 박물관으로 개조되기도 하지만... 뭐 다른 공간은 없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광주 양림동의 양림골목비엔날레와 함께한 하루를 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럼 왜 양림동 여행이 특별했을까? 



이 우아한 벽돌 건물은 어느 시대 건물일까? 고풍스러운 느낌이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사실 이 건물은 지어진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 1920년대 양림동 특유의 회색 벽돌 선교사 사택 스타일이기 때문에 오래되어 보이는 것 뿐이다. 이렇게 원래 양림동의 개성이 뚜렷하니 새롭게 생겨나는 공간도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벽돌 건물에 위치한 찻집 하원재에 들어가본다. 친절한 사장님과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우아한 찻잔들에 벌써 행복해진다. 잠깐, 귀를 기울여 보니 독일어, 프랑스어, 오페라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여기가 광주 양림동인지 유럽인지 잠깐 헷갈린다. 아, 원래 양림동은 선교사 사택이 있던 곳이지. 묘한 근현대의 흔적이 남아있던 곳이지, 다시 상기한다. 여튼 선곡 덕분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사랑의 찬가'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차를 마시며 여유를 즐겨본다.


그렇다면 정말 100년 전의 건물들을 만나볼까? 진짜 시간여행을 할 차례다.


호랑가시나무언덕의 시간여행


호랑가시나무언덕은 선교사 사택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사실 한 때 이 곳은 한센인 병자들의 시체가 버려지던 땅이었다. 그 자리에 선교사들이 집을 짓고,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고국에서 가져온 피칸, 은단풍, 흑호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은 아직까지 자라 굳건히 언덕을 지켜주고 있다. 그리고 나무들과 함께 희망이 자라 이곳은 새로운 지역성을 가진 땅이 되었다. 버려진 땅에서 선교사의 사택이 있던 역사적인 장소가 된 것이다.


나는 양림골목비엔날레의 도슨트 투어를 들으며 이 곳을 처음 마주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 머릿속에 선교사들의 모습이 그려지더라. 광주 5.18운동 당시 시민을 도왔던 허철선 선교사 사택도 있고, 드라마 사의 찬미에 등장했던 우일선 선교사 사택도 있다. 그리고 직접 선교사 사택에 머물러볼 수 있는 호랑가시나무언덕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르기까지 하면 호랑가시나무언덕에서의 완벽한 하루를 완성할 수 있다. 그 이유가 뭘까? 



나는 근현대건물 덕후다. 한옥이나 옛 가옥을 개조한 숙소나 카페를 정말 좋아한다. 그럴 때면 보통 '여기 옛날 건물이구나- ' 하고 묵곤 했었다. 하지만 이 숙소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알면서 묵어보니 그렇게 기분이 특별할 수가 없더라. 예를 들어 이 빈티지한 벽난로는 아직까지도 겨울철이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택의 2층 발코니는 피터슨 목사가 518 당시 헬기가 시민을 폭격하던 장면을 목격한 곳이다. 실제로 목사는 저택에 시민들을 숨겨주기도 했다고.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짜로 더 큰 울림은 따로 있다. 바로 이 공간들이다. 



옛 건물을 개조한 카페에서는 힙한 방식으로 공간을 느낄 수 있고, 숙소에서는 머물러보며 깊이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런데 호랑가시나무언덕에는 그 이상이 있었다. 바로 예술가들의 레지던스로 활용되고, 전시관으로 쓰이는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이다. 사택과 차고를 개조한 이색적인 전시관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과거에서의 역사를 박제하지도, 소비로만 끝내지도 않는다. 현재 그 자리에서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여행객들은, 그 예술을 즐기며 새로운 영감을 얻어간다.



키가 낮은, 한옥의 아름다움

 

그러면 양림동에는 선교사 주택같은 서양식 건물만 있나? 그건 아니다. 호랑가시나무언덕에서 내려오면 오밀조밀 키가 낮은 한옥들이 숨어있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 맛집도 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특별한 장소가 있다. 바로 골목 사이에 위치한 한옥을 개조한 함희원미술관이다. 권위를 내세우는 미술관이 아니다. 정감있는 한옥 미술관은 마을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이질적이지 않고 그냥 동네 카페를 들리듯이 편안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우아한 찻집 윤회매 문화관이다. 평일 5시, 운이 좋게도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여기서 윤회매 문화관의 반전 매력이 나온다. 이 곳에는 4000장의 LP와 CD가 있다. 전통차를 팔지만 팝 맛집이기도 한 거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한옥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하는 시간. 창 너머로는 철쭉과 꽃이 보이고, 고개를 돌려 벽을 응시하면 윤회매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우아한 한옥에는 샹송과 팝이 흐르고, 동서양이 묘하게 결합된 이 공간은 마치 양림동같았다.




동네 맛집에서 예술을 즐기다


양림동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면 양림골목비엔날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양림골목비엔날레는 '마을이 미술관이다'라는 주제 하에 기획된 축제다. 관에서 하는 규모 큰 예술만이 다가 아니다. 양림동 골목에서, 일상적인 공간에서 주민과 여행객에게 예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런 양림골목비엔날레 시즌에 여행하는 만큼, 맛집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술도 빼놓을 수 없다. 시그니처 카레가 일품인 초승달 커리에서 만나는 윤회매 작가의 작품은 원래 그 곳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한옥 이탈리안 레스토랑 ACA에서는 주인 분이 좋아하신다는 작가분의 작품을 보며 슬쩍 취향을 나눠본다. 



보통 역사적인 건물이 있는 골목 여행에는 맛집과 카페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까지는 충분히 좋았다. 예를 들어 없어질 뻔한 익선동 한옥지구가 살아남은 것도 맛집과 카페 덕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 지역의 이야기나 개성을 담은 공간은 없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양림동에는 지역의 정체성을 살린 미술관까지 있었다. 물론 이런 근대건물이 유명한 여행지에 박물관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박물관은 보통 정말 박물관으로 존재한다. 다소 딱딱하고 위엄있다. 맛집 카페와 같은 핫플과 박물관은 따로 노는 느낌이다.


하지만 양림동에서는 맛집도 카페도 미술관도 모두 편안했다. 같은 결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양림골목비엔날레라는 주민과 함께하는 축제와 이어지면? 금상첨화다. 이런 양림동의 매력이 더욱 극대화된다.


공간 재생, 개조가 점점 핫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개조된 공간들은 독특한 골목 여행이 되어줬다. 이제는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어떤 사람이 있는지 주목해볼 차례 아닐까? 공간을 보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속의 이야기도 발굴한다면 어떨까. 더욱 특별한 그 골목만의 여행을 만들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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