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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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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May 08. 2021

3월의 허송인 ; 유민호

허송세월 인터뷰, 헛터뷰


가상의 가치가 현실로 범람하는 요즘, 주식과 가상화폐에 손을 대보지 않은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서는 하루만에 월급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성공담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럴때면 지금 하는 일과 취미생활을 되돌아 보곤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아하는 일과 취미를 지속하는 데에는 가상 화폐가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본업 이외의 취미생활을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뭐하러 하냐', '프로가 될 것도 아닌데 뭐하려 하냐'는 물음이 들려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사회가 돈으로 치환할 수 없는 가치를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으로 치환될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프로'보다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좋습니다.


3월의 허송인, 민호 님은 스노보드, 스케이트보드, 사진, 복싱, mma 시청, 레고 모으기, 독서까지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취미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음악입니다. 중학교 때 처음 시작해 지금까지 그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부모님의 반대로 음대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포기한 것은 대학이지 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마포의 작은 합주실에서 초등학교때부터 함께했던 친구들과 소리를 섞습니다.


Edited by P

Photo & Graphic by L

heosongsaewol original contents.


어릴 때부터 스트릿 패션을 좋아해 패션 디자인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입을 줄만 알았지 만드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죠. 첫 직장은 스노보드복을 만드는 회사였어요. 음악 다음으로 스노보드를 좋아할 정도로 굉장히 좋아하던 건데, 제대 후 보드복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표님이 저를 알아봐 주셔서 덜컥 입사하게 됐죠. 입사 후 1년 넘게 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막내다 보니 디자인은커녕 다른 일만 하게 되서요.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는지, 틀렸는지도 모르는 상태였어요. 그리고 의상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보드복이라는, 특수성 있는 곳에 오래 있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만큼 올라갈 수 있는 곳도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렇게 스트릿, 영캐주얼 쪽으로 방향을 잡았죠.


그런데 어딜 가도 박봉인 경우가 많고, 수명이 짧은 건 같더라고요. 대인 관계가 무너질 정도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야근도 그렇고요. 그래서 아예 디자인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MD 자격증까지 땄죠. 전 직장까지만 디자인을 할 생각이었어요. 그게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다녔고요.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을 그만하려던 전 직장에서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어떤 스트레스를 받아도 일하면서 풀린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내가 만든 옷을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입어 주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보통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현실적으로 힘들 때가 있잖아요. 옷도 마찬가지였어요. 생각보다 따라오는 것들이 적거든요. 그럼에도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아요. 여기서 받은 스트레스는 여기서 푸는 거죠. 옷과 관련된 일은 평생 하지 않을까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음악을 하기 시작했어요. 학교 복도를 걷는데 합주실에서 연주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창살 사이로 보이는 드러머 형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다짜고짜 밴드부에 들어갔어요. 드러머가 되면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많아질 것 같았죠.(웃음) 장르는 펑크록. 몇 달 지나지 않아 진로가 정해졌다고 생각했어요. 2-3달 남짓이었던 것 같아요. 패드로 연습만 하다가 처음으로 드럼 세트에 앉았는데 이건 내 길이다 싶었죠.


부모님이 많이 반대하셨어요.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음악으로 대학 가는 길목을 다 차단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일단은 음대를 포기했죠. 하지만 입시를 포기한 것이지, 음악 자체를 포기한 건 아니었어요. 함께 밴드하던 친구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인데요. 저를 포함해 다섯 부모님이 모두 음악 하는 걸 반대하셨어요. 그때 약속했죠. 재수하지 말고 바로 대학 가서 다시 모이자고. 그런데 저 빼고 다 재수를 하더라고요.(웃음)


제 꿈은 드럼을 잘 치는 세션이 되는 게 아니에요. 이 친구들과 밴드로 성공하고 싶다, 이런 거죠. 얘네가 아니면 할 수 없어요. 친구들 중 누가 빠지거나 바뀐다면 아예 음악을 하지 않을 거예요.


취미가 많은 편이에요. 음악은 취미 이상이고요. 스노보드, 스케이트보드, 사진, 복싱, mma 시청, 레고 모으기, 독서… 스케이트보드 문화도 너무 좋아하고요. 개인적으로 트릭을 연습하는 것보다 보드 타는 친구들 찍어주는 게 더 재밌어요.


동네 친구가 필름 카메라를 산다고 하길래 따라갔다가 필름 카메라를 알게 됐어요. 그렇게 혼자 찍으러도 많이 다니고, 보드 타는 친구들도 자주 찍어줘요. 지금 쓰는 모델은 미놀타 X-700, 그리고 후지 네츄라 클래시카. 미놀타 X-700은 상태 좋은 것을 사려고세 개나 샀죠. 오래된 카메라지만 케이스도 완벽해요. 가장 오래 쓴, 애정 하는 카메라에요. 50-55mm 렌즈가 주는 심도가 좋거든요. 보드 탈 때나 합주하는 친구들 얼굴을 담을 때는 똑딱이(P&S 카메라)를 즐겨 쓰고, 혼자 출사를 나가거나 여행을 갈 때는 대부분 수동 카메라를 써요.


보드 타는 친구들 찍을 때는 하루 만에 안 끝나요. 같은 기술을 성공할 때까지, 잘 담아낼 때까지 찍어요. 한 장 찍는데 세 롤을 쓴 적도 있어요. 보드 사진에는 우리만의 룰이 있는데요. 정말 성공한 기술, 할 수 있는 ‘나의 기술’이어야 해요. 이상한 고집이죠.(웃음) 이렇게 찍은 사진들을 모아 언젠가 사진집도 내고 싶어요.


가장 최근에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독서에요. 지인이 제 이야기를 고전문학의 문체로 써주신 적이 있었는데,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저에게 문학은 국어 시간에 배운 것들 뿐이었으니까요. 자기만의 세계를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박준 시인인데요. 작품으로만 오롯이 이해하고 싶어 그분이 누군지 일부러 안 찾아봤어요.


이 많은 취미를 매일 즐기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을 모두 하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노력해요. 어쩔 수 없는 루틴이 생기는 거죠. 매일 출근 전 10-15분 정도 패드로 드럼 연습을 하고, 주말에는 작업실에 가서 드럼을 쳐요. 출퇴근 시간에 핸드폰으로 합주한 영상을 편집하고, 조금 일찍 퇴근하면 보드를 타거나 mma 경기를 보기도 하고, 운동을 하기도 해요. 한창 스케이트보드를 탔을 때는 지금보다 야근을 많이 하던 때였는데, 새벽까지 타다 쪽잠 자고 출근했죠.


주변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물어봐요. 저는 일할 때의 모습과 취미 생활에서의 모습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하는 일과 취미만큼의 다양한 모습이 제 안에 있는 거죠. 그게 재밌어요. 각각의 활동 속에는 어떤 클라이맥스 같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희열을 느끼곤 하는데, 정도가 각각 다른 것 같아요.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음악이고, 복싱할 때도 가끔 느껴요. 제대로 맞았을 때. 상대의 주먹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잡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걸로 먹고 살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그래요.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요. 지금도 많이 듣는 말이에요. 사람들은 본업 이외의 것을 열심히 하면 ‘해서 뭐해’라며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곤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물음을 들으면 화가 난다기보다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결이 다른 거죠.


제가 가장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퇴근 후 집에 도착해 씻으러 가기까지의 시간이에요. 피곤한 몸으로 잠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가버리더라고요. 매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고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오늘도 고쳐보려고요.(웃음)


살면서 방황했던, 또 다른 ‘허송세월’들도 있어요. 스무 살 때 학교에 입학했는데 음악이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사물함에는 늘 보드복을 넣고 다니며 보드를 탔지만, 그걸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전전긍긍했죠. 학교도 안 나가고, 아는 형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술병을 치우기도 했어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었는데 기름 넣을 돈이 없어 집까지 서너 시간을 걸었던 적도 있어요.


그러던 중 학교 밴드 동아리에 가입해봤지만 안되겠더라고요. 거기엔 함께한 친구들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군대를 갔다 오니 아버지가 음악 관련 학과 입시요강을 준비해두셨더라고요. 지원해 줄 테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하라고요. 근데 안 했어요. 무서웠거든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돌이켜보면 넙죽 받아서 하는 거였는데 말이에요.(웃음)


또 한 번의 방황은 이직 준비할 때였어요. 또래 친구들보다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해 어린 나이였지만 경력도 있었고, 20대 중반에 팀장으로 승진한 터라 경쟁력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제가 디자인한 스노우보드복이 평창 동계올림픽 때 쓰이기도 했어요. 뿌듯했죠. 자신감도 넘쳤고요. 근데 업계를 바꿔 영 캐주얼, 스트릿 패션으로 전향하려니 아무도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최대 3개월을 넘기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이직 기간이 1년 반으로 늘어났어요. 죽고 싶었죠.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졌어요. 서류 탈락도 많이 하고, 면접도 많이 떨어졌거든요. 합격 문턱까지 수십 번을 갔는데 안되더라고요. 그러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이 나올뻔했죠.


괴로운 나날들이었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경험이었어요. 방황의 순간들이 남긴 생채기는 운동과도 같아서, 그 아픔을 한 번 맛보고 나니 몸으로 알게 되더라고요. 알기 때문에 무뎌진 걸까요. 그 후로 이직을 두 번 더 했지만, 탈락하더라도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됐어요. 물론 노력은 해야죠. 중요한 건 그 ‘허송세월’들을 제 몸이 기억한다는 사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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