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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화 Jun 15. 2019

아이는 되지만 어른은 안된다.

에티켓에 관하여

 아주 오랫동안 내 집처럼 찾았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그 카페는 누구나 다 아는 외국의 프랜차이즈 브랜드였고 카페가 있는 장소는 강남의 한 복판이었다.

내가 그 카페를 자주 드나들었던 건 불행히도 커피의 맛 때문이 아니라 입출이 편한 주차장과 발레파킹 서비스 때문이었고 큰 규모의 탁 트인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수많은 좌석 덕에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자리가 없을 리 없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친구를 만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노트북을 펼쳐놓고 강의 준비를 할 때도 언제나 그곳을 찾았다.

 그 카페는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기둥을 최소화한 인테리어 덕분에 카페의 모든 구석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광활했다. 그 광활함 덕분에 늘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때로는 그 광활함 때문에 불편했던 순간도 있었다.

아이들이 포함된 손님 무리와 함께 카페를 이용하게 될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아이들은 항상 뛴다. 도대체 저 작은 체구에서 저런 체력이 어디서 나오나 의구심이 들도록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신나게 뛴다. 아이들의 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함께 뛰어 줄 친구만 곁에 있다면 뛰며 놀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어른들은 알고 있다.

 그 카페도 가족단위의 손님이 꽤나 있었기 때문에 아이 손님들이 많았고 어른들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들은 카페 곳곳을 뛰어다니며 노는 경우가 잦았다. 아이들의 놀이는 허용범위를 넘어선 소음과 다른 손님과의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손님 중 누구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꽤나 신경 쓰이고 불편함을 느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문제는 뛰는 아이가 아니다. 뛰는 아이를 제지하지 않는 어른이다.

아직 에티켓을 알기에는 너무나 어린아이들은 당연히 뛸 수 있다. 하지만 에티켓을 충분히 알아야만 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당연히 뛰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지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들은 다른 손님에게 방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미안해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제지하며 정숙하도록 타이른다. 비록 그 제지와 설득이 주체하지 못하는 에너지를 가진 아이들에게 얼마나 먹힐지는 모를 일이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부모는 제지와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에티켓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주변의 다른 손님들이 이런 부모의 노력을 본다면 아이로 인해 받는 불편과 불쾌는 이해가 가능한 수준으로 여기게 된다.


 반면에 뛰어노는 자신들의 아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는 어른들도 있다. 마치 아이들이 알아서 뛰어노는 것을 자신들의 커피타임과 대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기는 듯. 그런 부모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화를 나누다가 이따금 아이들이 잘 뛰어노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이들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거나 뛰어노는 아이들을 잠시 불러 케이크나 음료를 한입 먹인 후에 다시 풀어놓는 것뿐이다. 그 모습은 마치 42.195km를 달리고 있는 투혼의 마라토너에게 코스 중간 어디쯤에서 물과 음료를 제공하는 트레이너 같기도 하다. 그런 부모의 모습 어디에서도 카페 안 다른 손님에 대한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다.



 누군가는 카페가 독서실이냐며 정숙을 요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기도 하며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도 정당한 카페 이용자의 권리라고도 한다. 물론 카페라는 공공의 공간은 필연적으로 대화 소리 나 음악소리 같은 소음들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엄연히 허용 가능한 범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범위는 수치화, 계량화 될 수는 없지만 공공장소를 함께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과 불편함을 주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한다. 이런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공공장소 에티켓이다.

 나의 완전한 즐거움을 위해 타인의 불편함을 발생시킨다면 그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나의 즐거움은 언제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 에티켓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소음 때문에 불쾌했던 기억이 있었다면 혹시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같은 불쾌함을 준 적은 없는지 되짚어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 곳곳에 풍성하게 자리잡아 모두가 즐겁게 살게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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