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마지막 인사가 아니길
A는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어학연수생이다
열여덟 살에 부모님과 헤어져 혼자 우리나라에 와 있다.
방학에도 틈틈이 강의를 듣고 사이 시간에는 무거운 물건을 이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시설과 선생님들이 방학 동안 기숙사 사실 정비를 하는데
유학생들이 있는 방을 생각 없이 낡은 책상과 책장을 교체했다
유학생들은 대부분 방학에는 자국으로 돌아갔다가 개학이 되면 다시 오곤 하는데
짐을 다 뺄 수 없으니 그냥 두고 가는 경우가 많다.
가끔 자국에 돌아가지 않고 밀린 강의를 들으려고 남아있는 학생들도 있는데
A가 그런 경우였다.
자신의 방을 허락도 없이 뒤엎고 간 것을 외출에서 돌아온 A가 보고는 무척 화를 내며 전화로 항의가 들어왔다가 담당과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당연히 화가 날 일이고 사과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A를 찾아갔다.
노크를 하자 큰 기에 깡 마른 A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방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보아도 상태는 심했다.
책상을 교체하느라 책상 위에 얹어둔 짐들을 바닥에 다 내려놓고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작업을 마무리하신 것 같다.
다행히 언어가 조금은 통하는 학생이라 일단 사과를 하고,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A는 화를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내가 치우려고 해도 손도 못 대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 관리자인 내가 사과하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거라 사과를 하고 또 하고
겨우 사과를 마뜩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A가 방 정리 하는 것을 거들며 몇 마디 물어보며 대화가 시작됐다.
A는 3형제 중 맏이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기숙사 생활은 하지만 급식 신청을 하지 않아 자기 스스로 끼니를 해결한다고 한다. 뭘 먹느냐는 물음에 한 달 동안 컵라면을 먹었는데 건가에 안 좋을 것 같아 이제는 쌀을 샀다고 하며 쌀을 가리켰다. 조그만 지퍼팩에 쌀이 담겨 있었다.
엄마한테 전화가 오면 잘 먹고 잘 지낸다고 말한다는 A의 말에 마음이 짠해진다.
해외에 나가있는 딸아이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조리도구 하나 없는 이곳에서 겨우 밥솥에 밥을 해서 반찬도 제대로 없이 먹을 테니..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쌀을 1.8리터 물병에 담아 나르고, 김을 구워 나르고, 멸치를 볶아 나르고, 장아찌를 나르고...
A가 없는 사이 방 문 앞에 두곤 했다.
그 이후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흘러갔다
어느 날 문득 누가 나를 찾아왔다. A였다.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단 한 번 본 얼굴이라 더구나 마스크를 한 얼굴이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더 이상 공부를 할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A는 충분한 언어표현이 안 될 것 같아 자신이 배워 편지를 썼다며
A 4 세 장의 편지를 주고 떠났다.
고맙다는 말과, 한국 사람이 좋다는 말과, 맛있게 잘 먹었다는 말과
자신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과
그동안 인사하러 오지 못한 건 너무 부끄러워 서였다는 말과
그럼에도 마지막 인사로 찾아온 건 어머니께서 꼭 인사를 하고 오라는 말씀이라는 것이었다.
180 정도의 키에 마른 아이의 얼굴이 쓸쓸해 보인다.
나중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지내고 싶다는 A를 문밖까지 배웅을 하고 들어왔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있을 때 와 주렴!
A의 쓸쓸한 뒷모습을 본다
10년, 20년 후 저 소년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어쩌면 우린 어느 길모퉁이에서 스치듯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A가 날 알아볼까?
나도 A를 알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