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L Jul 15. 2019

직장생활 5년 정도 하면 나도 커리어우먼 일 줄 알았다

꽉 채운 5년이 되는 나의 사회생활을 되돌아보며-의 기록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오면 그 이야기를 평생 한다고 한다는데, 병역 의무에 해당사항이 없는 나는 고등학교 기숙사 3년을 졸업하고 나서 스무 살에 그 말에 공감했었다. 1, 2, 3학년 다 합쳐서 약 2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사회에서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선후배의 인간관계와 규율이 엄격했고, 특성화 고등학교로 일반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생 부럽지 않은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기에 사실 내게 '대학 생활'이라는 것의 첫인상은 굉장히 밋밋했다.


그래서 대학교 1학년 첫 학기부터 학교 밖으로 이것저것 대외활동에, 2학년 때부턴 한 가지 전공만 끝까지 할 흥미가 없어 복수전공을 했다.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 채 항상 갈증이 났었고, 그래서 그 나이 때에 많이들 생각하는 휴학을 고민했지만 부모님의 단호한 반대에 실패했다. 그렇다면?


'학교를 빨리 벗어나자.'


3학년 때는 아직 졸업예정자도 아니면서 학교도 그만둘 각오도 하며 가보고 싶은 회사에 이력서도 넣고 면접도 보러 다녀봤다. (면접 경험에 그쳤지만.) 그렇게 단 한 번의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로 학기를 마쳐가던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무보수라도 좋으니 너무 실무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이제 막 시작한 어떤 여가 플랫폼 애플리케이션 스타트업에 무작정 일하고 싶다고 자처해서 방학기간 동안 실습을 하게 되었다.



한 달 월급 20만 원 첫 사회생활


인턴도 아니고 약 6주간의 실습이 나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원래는 회사와 연계된 대학의 학생들만 학점 인정으로 방학 동안 하는 실습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내가 불쑥 끼어들게 되었다. 학점 인정도 안되고 한 달 월급도 20만 원뿐이었던 나의 첫 사회생활. 사실 남들이 보면 그냥 아르바이트랑 다를 바 없어 보이고, 그렇게 큰 회사도 아닌데 당시에 나는 '첫 사회생활'이라는 도전과 사회로부터 받는 '첫 평가'라는 생각에 6주의 하루하루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정말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다 생각되는 최선을 다했었다.


덕분에 아무리 동네 구멍가게 규모의 작은 회사일지라도 9명의 실습생 중에서 2명의 인턴 전환에 포함되었고, 이제는 한 달 월급을 50만 원이나 받는 인턴이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인정과 최소한의 적정 보상


회사에서 마케팅에 관심을 보이고, 마케팅에 관련된 업무 능력을 갖춘 사람이 갓 인턴이 된 나 하나였었다. 덕분에 인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회가 주어졌었다. 그중 가장 큰 기회는 인턴 보름 만에 찾아온 파견업무. 대표님과 친한 사이였던 한 결제 단말기 사업을 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바이럴 마케팅으로 업계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그곳에서 바이럴 마케팅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에 파견 가서 월~금 정규 근무시간인 9 to 6 동안에는 파견 회사의 바이럴 마케팅 업무를, 퇴근하고 집에 가서는 배운 것을 토대로 매일 새벽 2~3시까지 본래 회사의 6~8개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꼬박 3개월을 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내가 만든 콘텐츠가 온라인에 노출되고, 매출로 연결되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었다. 열심히 배워서 본 회사로 돌아가고서 제대로 띄워보고 싶었다.


그러나 실습과 인턴까지는 회사가 나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했기에 월 20만원, 50만원의 급여는 상관없었지만 정규직으로서도 최저시급보다 못한 돈을 받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달랐다. 물론 당시에 아무리 내가 바이럴 마케팅을 배웠다 하더라도 나는 이제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였지만, 적어도 약 5개월 동안 회사에 내가 보여준 나의 가능성과 열정, 태도, 그리고 성과가 있었기에 최저시급도 받지 못한 채 더 크고 많은 책임감과 노동을 요하는 것은 열정 페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감하게 이별을 고했다.


근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급여는 최저시급도 되지 않는 보수를 제시했던 대표님이 퇴사 의사를 밝혔을 때 회의실 화이트보드를 가득 채우며 몇 십억, 몇 백억 밸류의 미래를 이야기하시고 1주일의 강제 유급휴가까지 주시며 3번이나 붙잡으셨었다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많은 급여도 아니었고, 회사 창립이래 단 하루도 휴가를 가지 못한 팀원들 속에서 혼자만 1주일씩 휴가를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기여한 것에 대한 인정과 그에 대한 최소한의 적정한 보상이었다. 결국 회사는 내가 기대한 바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고, 그렇게 나는 나의 첫 직장과 이별했었다.



첫 스카우트, 팀원 없는 팀장


첫 직장과 이별을 고했을 때에도 사실 내 나이 스트레이트로 대학 4년제를 갓 마치던 23살이었다. 차근차근 취업 준비를 해도 늦지 않을 나이였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건 다름 아닌 바이럴 마케팅을 배우러 파견 갔던 결제 단말기 스타트업 회사였다. 파견 3개월 동안 사실 분에 넘치게 칭찬도 많이 받았고, 장난 삼아 "림씨, (당시에 나의 닉네임이 '림'이었다) 우리가 스카우트할게요, 계약서 씁시다!"와 같은 말을 듣곤 했었다. 그런데 진짜로 제안하실 줄은 몰랐었다.


나보다 5살밖에 많지 않은 대표님들인데도 사업을 잘 이끌어 나가시는 모습과 동료들과의 분위기가 좋은 그 회사에서 더 함께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 막 시작한 회사이기에 내가 하는 작은 일 하나도 회사의 성장으로 직결되는 것을 바로 볼 수 있었기에 내가 회사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메리트였었다.


그렇게 열명 남짓한 회사에서 나는 팀원이라고는 나 1명뿐인 마케팅팀의 팀장이 되었었다.

(사실 입사 당시에는 나 포함 2명이었지만 약 한 달만에 하나뿐인 동료분이 퇴사하셨었다는.. 하하)



첫 성취의 기쁨


입사와 동시에 대표님들에게 받은 미션, 목표가 있었다.

당시 당사의 매출 창출 프로세스는 바이럴 마케팅을 통해 인콜(in-call)을 만들어내어 우리를 찾아오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콜 수가 항상 중요한 지표였다.

대표님이 내게 주셨던 목표는 일 최대 60 콜.

이게 어떤 수치냐 하면- 보통 업계에서는 한 달에 총 10콜 정도 오는 게 일반적이고, 업계에서 선두를 달리던 당사도 최대 40콜대 정도였었다. 당시에는 약간 50%는 이룰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래도 목표는 높을수록 좋으니까-라는 것에 의의를 두고 세웠던 목표였는데.. 사회초년생으로 열정이 불타오르던 나에게 있어 목표란 게 한번 설정되고 나니 달성하고 싶은 정복욕이  마구 불타올랐었다. 그렇게 매일같이 야근에 집에 가서도,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 생각에 몰두하며 보냈더니 꽉 채운 3개월이 되던 3월의 마지막 날, 드디어 목표를 달성했다.


일 최대 66콜 달성.

사회에서의 나의 첫 공식적인 성취의 기록.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벅참이었다.(퇴근길에 친구와 감격의 눈물을 쏟으며 치맥을 했던 기억까지도 생생하다.) 그때의 성취의 기쁨은 후에 나를 계속해서 더 불타오르게 해주는 좋은 원료가 되었었다.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얻게 되는 성취의 기쁨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6개월 만에 17배


그렇게 대표님들의 진취적인 사업 추진력과 마케팅팀의 눈에 보이는 성과와 성장으로 나 하나뿐이었던 마케팅팀은 반년만에 17명이 되었었다.  처음 1년은 매일 같이 자정까지 야근을 해도 모든 것이 너무나 재밌었다.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매출이 느는 것을 보는 것도, 팀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효율을 위해서 문서와 보고서를 만드는 것도, 제안서를 만드는 것도... 내가 해나가는 것들이 다 개척 길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쌓여나가는 나의 성취 경험과 실력, 그에 뒤따라 오는 인정과 칭찬들은 나를 더 신나게 만들었고 더 달려 나가게 만들었다.



우물 안 개구리 꼰대가 되어버린 25살


인턴 생활 때부터 나는 내 위에 나와 같은 포지션의 사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해온 것들은 늘 그 회사 안에서 '최초'가 되었고, '기준'이 되어다. 그 무게는 무거웠지만 나서기 좋아하고 주목받기 좋아하던 내게는 오히려 즐거웠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리석었던 25살의 나는 어느새 내가 만든 결과물에 뿌듯해하고 혼자 만족감에 젖어버렸고, 나와 다른 사람을 열정과 의지의 부족으로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했고, 감투가 당연해졌고, 결국 우물 안 개구리 꼰대가 되어버렸다.



다시, 도전!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꼰대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눈치채게 될 무렵, 그간 쌓아두었던 환경적 요소들이 함께 터지며 내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내 회사인 줄 알았던 두 번째 직장을 퇴사하였다. 그때, 내가 한참 반짝이던 때에 함께했던 거래처로부터 감사하게도 생애 두 번째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그게 바로 지금의 회사.


지금 회사를 선택하는 게 결코 쉽진 않았다.  회사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되, 과정보단 결과로 이야기하는 스타트업이었다. 지금은 조금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근무 환경과 시간대, 휴가 등 많은 것이 정말 자유로웠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무한한 자유로움 속에서 성과 창출이라는 나의 의무를 스스로 컨트롤하며 해낸다는 것은 나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또 여태까지 남들과의 경쟁으로의 결과가 아니라 나 혼자 개척해 나가는 결과에 익숙했던 내겐 조금은 두려웠다. 당시에 나는 전 직장에서 '실패했다'라는 생각에 사회적 자존감과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러나 계속해서 구애(?)해준 동료들과 함께라면 나도 다시 한번 부딪혀보며 성장해보고 싶었기에 과감하게 다시 도전했다.



자승자강(自勝者强)


지금 회사는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두 개의 회사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우선 직급/직책이 없는 모든 것이 수평인 조적이었다는 점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2년 전 입사 당시의 이야기로, 지금은 여전히 직급은 없지만 직책(역할, Role)은 있다.)


수직 조직에서 상위에서 관리자 역할을 하던 내가 수평 조직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은 사실 모든 순간들이 과거의 나와의 대면이었다. 아, 과거형이 아니라 2년을 꽉 채워가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 마주함이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더디더라도 조금씩 나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편협한 시각을 넓혀나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고, 문득문득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이 튀어나올 때도 아주 많다. 그렇지만 잠식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며 그렇게 나는 나아가고 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지만, 스스로(自身)를 이기는 사람은 강(强)한 사람이라는 노자의 말씀처럼, 나는 지금 스스로를 이기는 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여정을 걸어가려고 노력 중이다.



감사와 불만족의 조화로 나아가기


20대 초반에 20대 후반의 언니들을 보며 막연하게 나도 저때가 되면 개인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되게 어른스럽고 많은 것을 알아서 담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 <검. 블. 유>의 배타미처럼)
근데 어느새 20대 후반에, 일반 직장이라면 대리급일 연차에 접어들었는데도 나는 스스로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고, 일과 개인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척척- 해내는 담백함은 아직도 머나먼 이야기 같다.

아직도 나는 일도, 삶도 여전히 모르겠는 것 투성이고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좌절과 다짐의 롤러코스터 타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래도 이렇게 돌아보니 5년 전 23살의 햇병아리 시절보단 무언가 나아진 게, 무언가 아는 게 생겼기도 하다. 또 배우고 얻은 것도 많고.
그렇게 얻어진 것들에 복이 복인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면서 또 방시혁 대표의 서울대 연설처럼 항상 나 스스로 더 개선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불만족으로 나를 더 발전시킬 줄도 알아야 한다는,
그 경계의 조화를 잘 지켜가며 열심히 살아가자고 했던 나의 최고의 사회 선배이자 인생의 멘토인 엄마와의 오늘 대화를 다시 되새기며-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 보려 한다.


응원해율
응원해, 율.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를 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