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는 아빠곰 Dec 11. 2015

집에 누가 온다고? - 정수기 아줌마 오시는 날

육아휴직하는 초2 아빠의 일상 스케치

원체 집에서도 혼자 잘 노는 나.


하지만 나만의 평화로운 방구석 놀이를 방해하는 것 중 하나가 집에 누가 오는 일이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친구를 데려온다거나, 손님이 갑자기 집에 오는 상황을 꺼려하고 피하게 되는데 사실 우리 집에 손님이 올 일은 일 년에 몇 번 생기지 않으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불안해하는 셈이다. 그런데 단 한 사람, 피하거나 미룰 수 없이 집에 맞이해야만 하는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정수기 아줌마다. 

공식 명칭으로 코디~ 라는 앙증맞은 휴지 브랜드와 똑같은 이름도 있지만 내게는 그냥 정수기 아줌마다. 


정수기 아줌마를 (이하 코디라고 한다. 아무래도 어감이 좀 그래서.. ㅎㅎ) 살림 공간에 맞이한다는 것은 아주아주아주 부담스러운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정수기 관리와 필터 교체를 위해서는 싱크대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설거지도 모아 뒀다가 한꺼번에 하고, 음식물쓰레기를 자주 치우지 않아 집사람한테 한소리 듣곤 하는 그 싱크대 말이다. 갑자기 설거지의 끝은 싱크대의 물기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던 친구가 생각난다. 집에서 살림의 핵심을 아주 잘 배웠던 것 같다. 대신 와이프는 좀 피곤할 듯.


싱크대 정리의 포인트는 이거다. 부엌의 다른 요소들은 깔끔하게 오거나이즈되어있어야 하되, 당일 오전의 설거지는 방금 한 것처럼 적정한 분량의 셀렉션을 건조대에 조화롭게 배치해 두어야 한다. 다만, 너무 인위적이지 않게, 완벽한 상태에서 한두 곳쯤은 허술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 항상 생동감있는 살림의 현장인 것처럼 보이도록 해야 한다. 


마치 친구네가 놀러 왔을 때 뻑적지근하게 차려 놓고 와인도 한 병 따면서 우리는 매일 이렇게 먹는다구~ 하는 눈빛을 보낼 때처럼 특별한 상황을 일상화하거나, 시작하는 연인들이 설렘의 단계를 넘어 오늘 저녁에는 다음 단계로 이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상호간에 표현은 하지 못하는 그 날, 속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너무 신경쓴 것이 표 나면 안 되는데, 너무 익숙한 것 같아도 안 되고 너무 어설퍼도 안 되는데 하며 고민하다가 정확한 밸런스 포인트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난 하도 오래돼서 어떤 건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한편 이것은 학교 때 장학사님이 오시거나 군대에서 사단장 방문시 하게 되는 환경정리 활동과는 다르다. '내가 온다고 신경좀 썼군~' 이라는 반응이 나와서는 실패다. 언제나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과정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써, 수퍼바이저가 온다고 해서 일회성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이 항시 정돈되고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평가받는 순간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회사에서 신임 사장 내정자가 예정에 없이 취임 전에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러 오는 상황이나 시어머니의 급작스러운 방문과 비슷한 상황이겠다. 좀더 나의 생활에 대한 통제권을 많이 갖고 있는 분의 지속적인 생활태도에 대한 점검. 




코디께서 방문하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또 다른 이유는 이 분이 대개(처음에 대게라고 오타를 냈다. 대게 먹고싶은 욕구를 드러내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그런가보다. 최근 우리동네에 롯데타워에 있는 랍스터 식당을 벤치마킹(이라고 쓰고 표절이라고 읽는다)한 랍스터 전문 부페집도 생겼는데 여기는 가격표시가 유로로 되어 있다.) 살림을 오래 하신 베테랑일 테고, 여러 집들을 돌아다니며 보시게 되니 자연 각 집들의 꼬라지가 비교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관 신발정리부터 정수기가 놓여진 싱크대 주변까지 동선에 따라 청소와 걸레질, 적당한 자연스러움을 곁들인 세팅은 기본이고, 동선에 따른 시선이 닿는 범위까지도 고려해 가며 세팅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프로 주부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오시기 직전에 작업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11시에 오신다고 하면 9시 30분 정도에 이 작업들이 완료되고, 다른 것들은 언제나처럼 흘러가고 있는 순간에 방문하게 된 것 같은 자연스러운 앳모스피어를 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테일로 가자면, 걸레질 후 마루바닥의 물기, 청소기나 청소용구의 배치, 싱크대 주변의 물기, 얼굴의 땀과 손의 물기, 초인종이 울렸을 때 맞이하러 나오는 발소리의 안정감, 흔들리지 않는 눈빛 등을 하나하나 체크해야 한다. 


어쨌든 위 사항을 준수한 오늘의 싱크대 프레젠테이션은 이 정도. 코디 오시기 1시간 30분 전 완료.

자연스럽지만 설정.





다음, 아이가 있는 집이니만큼 학습과 놀이의 균형, 정적인 활동과 동적인 활동의 조화를 겸비한 충실하고 안정적인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해 주면 좋다. 학습지와 장난감을 적절히 믹스하고, 공이나 헬멧과 같이 바깥활동을 암시하는 오브제들을 시선의 이동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한다. 학교 수업 진도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다. 아이가 최근 배우고 있는 '초2 통합교과 이웃 나라' 와 관련한 세계 어린이들의 생활 모습이 들어 있는 사진집과 최근 시사 이슈인 세계의 분쟁지역과 테러에 대한 책, 만화가 아닌 백과사전을 배치해 보았다. 책상에 놓아서는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아이가 주로 책을 보는 장소인 소파에 늘어 놓은 것이 포인트. 

그래도 셋 중 한 권은 아이가 좋아하는 책이다. 완전 가식은 아님.



하지만 놓고 보니 2000년대 어린이의 생활을 주제로 한 박물관 전시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아이가 즐겨 보는 책을 가니쉬하여 마무리. 한결 생동감있는 사실주의 책 더미가 되었다. 

난 만화학습서가 싫어~





현장심사 준비가 끝났으면 의전 준비를 해야 한다. 

인사말씀과 동선 유도,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 준비하기. 


"마실 물은 받아 두셨나요?" 

"네?"

"정수기 필터 교체를 하면 몇 시간동안은 물을 드시면 안되세요."

"아 네~"

"지금 받아 드릴까요?"

"아뇨 안먹을래요"


맨 처음 코디님을 영접하던 날의 다이얼로그인데, 그날 오후에 결국 편의점에 음료수 사러 갔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코디님 오시기 전에 미리 물 한통 받아 놓는 정도는 하고 있는데, 지난 달에는 정수기 필터 교체하고 좀 있다 학교에서 돌온 아이가 정수기 물을 그대로 따라서 벌컥벌컥 마시는 사건이 발생. 이미 늦어버려서 당시에 별 말은 안했지만 좀 꺼림찍하다. 미안~ 인생에 한 컵쯤은 괜찮아~




그 다음은 코디 방문 의식 중 가장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바로 정수기 필터 교체와 세척 작업을 하는 시간인데 이 시간동안 아저씨가 집 안에서 어디 편히 가 있을 곳이 없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거실이나 부엌에 있자니 감시하는 것 같고, 왔다갔다 집안일을 분주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평소에는 이틀 걸릴 일을 한 시간동안 싹 해버렸으니 그럴 일도 별로 없다. 그러면 안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게 되는데, 한 20분정도 되는 시간동안 할 것이 없다. 방 안에서 왔다갔다 하거나 괜히 화장대를 정리하는 척 하다가 침대에 걸터 앉아 게임이나 해 볼까 하고 핸드폰을 열어 넥슨에서 맘먹고 만든, 예전 콘솔에서 플레이하던 턴제 SRPG 느낌을 제대로 살린 최신 게임을 실행시키니, 엊저녁에 축구 중계 본다고 풀로 올려 두었던 볼륨 때문에 게임 오프닝 음악이 발랄하게 방을 울린다. '남자들 집에 있으면 집안은 안 챙기고 게임만 한다던데..' 하던 동네 미용실 원장님의 일갈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다. 게다가 아무리 중성화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외간 여자와 단둘이 집안에 있는 상황이 아닌가. 말 한 마디, 옷매무새 하나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인거다. 어쨌든 감옥아닌 감옥에 갇혀 긴 시간을 기다린다. 코디님의 이 말 한 마디를 기다리며. 


"고객님 다 끝났구요~"




드디어 마지막 관문.

"고객님 다 끝났구요~ 여기 성함 적어주세요." 

가입자명은 집사람인데 내 이름을 써도 되는 걸까 고민하다가 고객 확인란에 이름을 쓰는 손톱 끝이 덜덜 떨린다. 스타일러스 펜을 주면 좋겠다. 웅진에서는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이 때 너무 어색하거나 좀 떨린다면 "정수기 요금이 너무 비싸네요", "몇 년 쓰면 요금이 싸진다던데" 이런 의미없는 말을 던져 주면 좀 도움이 된다. 


이제 다음 방문 날짜를 잡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시고 나면 끝이다. 두 시간쯤 있다가 물을 한번 싹 빼낸 후에 물을 마셔야 한다. 애한테도 알려줘야겠다. 


두 달에 한 번 있는 정수기 아줌마 오시는 날이 이렇게 끝났다. 다른 날은 오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지나가는데, 오늘은 집 정리, 싱크대 정리, 세팅 다 끝내놓고 코디님 다녀가고 난 시간이 11시다. 아이 학교 보내고 난 뒤부터의 시간을 5분 단위로 분절하여 최대한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냈다. 


보통 이런 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고, 저녁에는 맥주도 한잔 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마눌님께 "오늘 언제 왕~??" 이렇게 물어 보면 "왜?" 그러거나 "늦어" 한다. 그러면 좀 우울해진다. 

학원갔다 돌아온 아이에게 "야 오늘 아빠랑 나가서 맛있는거 사먹을까?" 하면 "아니 집에서 먹을래~ 집에서 먹는게 제일 맛있어. 메추리알 장조림 있지?" 이런다. 아우 씨 눈치도 없는 놈같으니라구.. 메추리알 없다 임마.


정수기 아줌마 오시는 날이 이 정도면 여자들 시부모님 오시는 날은 한 15배 정도 더 신경 쓰이려나? 

어쨌든 정수기 아줌마 한 번만 더 뵙고 나면 복직이다. 살림하고 애 뒷바라지하는 휴직 생활에 큰 불만은 없지만 오늘만큼은 이렇게 마음이 홀가분할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맨스 소설을 써 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