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과 Oct 09. 2019

미드나잇 인 파리

불행한 예술가들을 위한 신의 선물



 1920년대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위치한 전간기이다. 이때 전쟁의 참상이 불러온 비극을 극복하고자 하는 낭만주의와, 전쟁의 비극을 더 비극적으로 받아 들인 비극들이 공존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1920년대의 예술을 지극히 그리워하고, 파리의 여행 중에 꿈같이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본인의 그렇게나 꿈꾸고 존경하던 작가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과거로 여행을 시작하며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주인공 소설가는 사랑에 빠진 여자가 1890년대를 그리워하는 것을 알게 된다. 1920년대를 황금시기라고 생각했던 주인공은, 그 시절의 사람들은 또 과거를 황금시기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아마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어마나 황금의 시기를 구축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지금에서야 우리에게 환상과 신화를 만들어준 것이지, 그 당시 고흐의 삶이 단 한 명에게라도 인정받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윤동주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이제야 위대한 영혼의 예술가라 칭하는 이들은 당대에 그 영광을 누린 이들이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오는 수많은 예술가들, 헤밍웨이, 피츠제랄드, 피카소들도 아마 전쟁의 참혹함 뒤에 인간의 영혼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몰두하며 예술을 했을 뿐이지, 그 시절을 황금의 시기로 만들 거라고 생각한 이는 없을 것이다. 


 난 이 부분이 참으로 흥미롭다. 도대체 당대에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알아주는 이가 없는데 그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뎌내고 예술을 했을까 하는 지점이다. 물론 그 당대에 유통되고 일회적으로 유행하는 예술을 하는 이들은 그 시절의 나름의 영광도 받고, 돈도 벌었을 테지만 도대체 이 불멸의 예술을 남기는 이들은 무엇으로 이 시기를 버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간은 시간을 부른다.


 주인공 소설가는 마지막쯤에 이전에 있던 연인과 헤어지고 새로운 연인(가브리엘)을 만난다. 같이 비 맞으며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는데, 네이버에 네티즌이 이 장면을 해석한 것을 보고 참 새롭기도 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감독이 의도한 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이렇게 해석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만 마지막 장면을 다르게 본건 가요? 가브리엘이 비 맞는걸 좋다고 하는 대사와 비 오는 파리가 좋다고 하는 대사가 주인공이 한 말과 똑같아서 미래에서 온 게 아닐지? 미래에는 주인공이 유명한 작가가 되고 가브리엘이 과거로 와서 그 유명한 작가를 만났다고 생각되는데 "


 이 우리의 불쌍해 보이는 방황하는 주인공 소설가가 미래에는 불멸의 예술을 남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불멸의 예술을 보고 이 여자가 또 미래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설정이다.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멸의 예술을 남기는 사람들은 과거로 한 없이 여행을 하며 영혼을 새겨야 하는 이들의 아픔과 고독을 공감한다. 시간은 시간을 부르듯, 과거는 과거를 부르고, 시간은 엉켜 과거는 미래를 부르기도 한다. 주인공이 도달한 과거가 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어쩌면 이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들, 영혼을 걸고 예술을 하는 이들에게는 시간을 여행하는 특권이 주어진다. 그들은 고흐의 사무치는 외로움과 아픔을 공감하기도 하지만, 고흐의 예술이 언젠간 우리의 영혼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듯, 나의 예술 또한 언젠가 그렇게 누군가의 영혼을 밝히는 일이 될 것임을 직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과 영혼의 바통을 이어받는 방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파괴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거스르고 거스리며 살아가는 것이 예술가들의 유일한 특권이 아닐까?


 Copyright 2019.양과.All right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기쿠지로의 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