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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fter lunch Dec 07. 2019

한가해지면 위기가 찾아온다?

건설인의 인문학적 성찰 에세이

“한가하면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한가한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면 분명 우리는 한가로울 수 없을 것이다.”

Idyll (Fredrick Leighton 作)

선배들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한가하면 잡생각 나고, 그러다 보면 도망가는 놈들이 있다, 꼭 시간 많고, 할 일도 없는 놈들이 이런저런 불평이 많고, 자주 아프고,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니 마니 하는 걸 많이 봤다.” 

바꾸어 말하면 ‘무슨 이유에서든지 바쁘게 움직이고, 내일 니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만 하고, 조직이 시키는 일이면 군말 없이 수행해라 그러면 건강하게 소속된 곳에서 승승장구해서 장기근속상을 받는 영광도 누릴 수 있다’라는 말이다. 


 별생각 없이 살아왔던 지난 십여 년 간의 직장생활에서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퇴사한다거나, 갑자기 잡생각이 많아지는 후임들을 볼 때면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다들 한가한가 보다’라고. 어쩌면 그래서인지 난 지루하거나 여유가 있는 현장보다는 바쁘고 공기가 촉박한 현장을 더 선호했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건설회사에서는 어떤 종류의 현장을 무사히 마치면, 비슷한 현장으로 발령을 낸다. 한 번 했던 사람이 유사한 현장을 잘할 가능성이 많기도 하고, 그렇게 특정분야의 전문성? 이 키워지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도 더욱 배울게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파트는 하고 싶지 않다고 대놓고 말하고 다녔었다. 참고로, 요즘 아파트 현장은 널널한(?) 현장이 없다. 고객 수준 높아지고, 평형 다양해지고, 옵션 많고, 관리할 인간은 적고, 암튼, 그건 그렇고..


 좀 더 옛날로 돌아가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후기 선왕으로 평가되는 22대 왕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정조 이산 어록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공사(公事)에 대해 큰지 작은지, 긴급한지 한가한지를 막론하고 며칠씩 지체시킨 적이 없었다. 성품이 번잡한 것은 참을 수 있어도 한가한 것은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의 병통은 번거로운 일을 잘 견디지 못하는 데에 있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 선배들이 득도를 했는지, 거의 정조급이다. 공통적으로 바쁘고 복잡한 일이라도 잘 참아내고 한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만사형통이라는 말이다. 




 사전적 정의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한가(閑暇)하다는 ‘겨를이 생겨 여유가 있다’라고 뜻이고, ‘일과 시간이 여유롭다… 군사적, 사회적인 안정감과 함께 경제적인 형통함을 암시하기도 한다’라고 쓰여있다. 


 회사 생활하다 보면 겨를이 생겨 여유가 있는 시간들이 생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주일에도 며칠씩, 1년을 두고 따져보면 한 달 넘게 일과 시간이 여유로울 때가 있을 수 있다. 건설현장 근무자들에겐 함부로 얘기하기가 어려웠지만, 주 52시간 체제에서는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여유가 있을 것이다.

 일 마치고, 일찍 잠을 청해서 체력을 회복한다거나, 때로는 커피 한잔에 지는 노을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남는 시간 아까워 술을 마시는 것도, 술 마시며 상사 험담도 하고, 당구나 스크린 골프도 가끔 쳐주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다 좋은데… 

 

 내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는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미래 모습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한다.

 

 습관은 무서운 것이다. 허투루 보내게 되면 거기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옳고 그름을 모르게 되고, 그럴 까 봐 무서운 거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그릇된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갑의 횡포, 대기업의 세습, 종교인의 타락, 사이코패스, 왕따, 장기밀매… 정치문제는 더욱 그러하다. 민주열사 고문, 연평도 폭격 사건, 세월호 침몰,…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여유 없이, “한가하지 않게”, 생각도 없이, 남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산다면 아프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천편일률적인 생각들이 우리가 아파해야 할 때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그 무조건적인 희생과 복종이 진실을 못 보게 하여, 서민과 민중을 노예와 반역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서 말한 그 무서운 습관들이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동안에 우리 스스로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로봇같이 인내의 한계가 없는 사람처럼 살다가도 가끔 자신이 부족하고 아픈 부분이 어디인지 살펴보고, 미래를 설계하고, 창의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의식과 체력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건 바로, 가끔의 여유롭고 한가한 사색과 여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 믿는다.

5000m정상에서 30분간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는 개 (2019년 중앙일보에서)

 선배들이여… 내가 한가하지 않음에 당당하지 말고, 불평 없이 일하는 묵직한 후배들에게 조금은 부끄러워하여야 하겠다. 튀지 않아야 오래 버틴다는 신조는 이제 버리고, 불의에 맞서 싸워보는 생각 만으로도 기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자.


 후배님들, 그리고 우리 자손들이여! “한가하면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한가한 시간을 한가하게 보내면 분명 우리는 한가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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