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진 Apr 09. 2023

[리뷰] 타우

감정을 가르쳐 줄 거라면 자유도 줘

넷플릭스 원작 드라마 타우(Tau); 타우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의 이름이다


  인공지능이란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나는 가끔 마스터 인공지능이 탄생하는 과정을 상상하곤 했다. 외형도 행동도 전부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공지능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와도 같겠지만, 미래 기술을 마냥 낙천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SF 콘텐츠 속에서는 무척 매력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다움을 획득하려면 넘어야 하는 특이점이 있고, 이 특이점은 많은 미디어에서 '감정'의 형태로 두루뭉술히 그려져 왔다. 뉴런 실타래의 복합적인 화학반응에서 촉발되어 나타나는 기쁨, 슬픔, 분노 등의 상태 - 즉, 감정 - 를 어떻게 학습시키는지가 늘 모호하게 그려졌다다. 그래서 영화 [타우]의 짧은 소개글을 읽고 이 의문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여 흥미가 돋았다. 인간의 뇌 지도를 파악해서 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의 회로를 그린다면 하나의 전자 회로가 하나의 뉴런 역할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인공지능이 발산하는 다양한 출력값이 과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감정과 같을까? '인간', '실험', '완벽한 인공지능'이라는 세 단어의 조합은 나를 강렬히 끌어들이고도 남았다.


  그런 점에서, [타우]는 내가 궁금해했던 것을 명확히 풀어주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얽히게 된 PSI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관련 실험 또한 지금껏 보아온 뇌과학 소재의 SF 영화 설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뇌의 회로도를 파악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극을 주고 반응이 오는 부분을 확인한다든지, 고통과 불안감을 자극해 반응을 극대화한다든지 하는 설정 등은 이미 익숙하다(그리고 늘 하는 생각인데, 왜 꼭 고통이라는 스위치로 회로를 활성화하려고 할까? 나라면 더욱 다양한 감정을 실험해 볼 것이다).


  대신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다. 프로젝트와 실험은 서사를 쌓기 위한 빌드업일 뿐이고 탈출과 협상, 그리고 기지를 발휘하는 과정 자체가 영화의 실질적인 중심축이다. 주인공은 영리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좌절을 겪기에, 숨죽인 채 집중해서 보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게다가 영화가 타우와 줄리아의 관계를 통해 빚은 공존에의 질문은 무척 흥미롭다. 감정형 인공지능의 탄생 과정은 여전히 신비로운 베일 속에 휩싸여 있고, 전체적인 서사의 탄탄함이나 설정의 세밀함을 따지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미래에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이 등장했을 때 그들과 어떤 세상을 꾸려나가야 하는지를 진중히 고민해 보고 싶다면, 아주 잘 찾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타우]가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을 그려내는 방식은 무척 참신하다. 보통 감정이 있는 인공지능 - 이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자 - 을 앞에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상대를 동등하게 보지 못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은연중에 기계와 인간의 위계 차이를 떠올리고는 그들을 도구나 노예의 위치에 투영한다. 보통 인공지능에게서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정중한 어투를 기대는 것도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이리라. 그렇기에, 인공지능인 타우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는 다분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어떻게 기계가 고통을 느끼는 걸까'라는 의문은 애초에 기계가 감정을 가지지 못하리란 생각을 염두에 두었거나, 아니면 기계 - 혹은 노예 - 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할 자유가 없다는 무언의 약속에 기반한 것일 테다. [타우]는 인공지능과 인간, 코드와 기억이라는 훌륭한 비유로 이 의문을 말끔히 지워내고 기저에 깔려 있는 차별적인 생각을 꼬집는다.


  영화는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쳐두기 때문에 과학이나 기술 소재로는 큰 내용이 없다. 대신 불완전한 인간과 불완전한 인공지능을 대면시킴으로써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하는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 그려볼 여유를 준다. 인공지능 타우는 PSI 프로젝트의 초기 작품으로, 감정을 가진 기계이지만 지식에의 끝없는 갈망과 소통 능력의 불완전함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한 채 알렉스의 집을 관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줄리아와 타우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우리는 타우에게 감정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도구로서 취급받는 그의 위치를 보면 묘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주인공 줄리아 또한 사회의 변두리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가 납치를 당해 사라져도 사람들은 그를 찾지 않으며 그가 빠진 채 굴러가는 사회의 수레바퀴는 고장 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유란 박동하며 살아가는 존재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천권이지만, 영화의 중심에 위치한 두 존재는 제각기 부여받은 기능을 온전히 해내지 못해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다. 기존의 수많은 SF 영화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은 항상 거대한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타우]에서는 오히려 무기력한 상황이 그들을 짓누르는 셈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화합의 무대로는 새로워서 흥미롭다. 시작부터 삐걱이던 둘의 관계가 친밀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불완전한 창조주가 불완전한 피조물을 구속할 권리는 없다. 그들은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같은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힘차게 나아갈 힘을 얻는다. 자유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 게임의 선물이다.  




  SF 영화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해당 콘텐츠는 과학과 기술이 중점이 될 수도, 미래 사회에서의 삶의 모습이 중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SF는 기본적으로 '공상 과학'이라는 포맷을 띤다는 점에서, 어떤 주제를 들고 오더라도 과학적인 근거가 서사를 탄탄히 뒷받칠 수 있을 만큼 풍부하고 촘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겉껍질만 요란한 기술을 들고 와서 이런 것이 나중에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해봤자, 그것을 받치고 있는 기반이 텅 비어 있다면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고 잊히게 된다. [타우]에서 아쉬운 것도 그런 부분이었다. PSI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이 너무 단순하고 모호하다. 영화 중간중간 가끔 열리는 화상회의에서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까 두근두근하며 기다리고 있자면, 알렉스의 두루뭉술한 일정 전달과 짜증 섞인 대답만을 듣고 있어야 한다. 줄리아가 당한 실험과 실험의 목표,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 등을 조금만 더 자세히 풀어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몇몇 억지스러운 연출과 설정이 몰입을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초반부 납치와 감금실에서의 탈출 등은 과도하게 연출된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어색했다. 이 미스터리한 사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화면을 넘어서도 너무 잘 보일 정도라 살짝 민망했을 정도. 특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알렉스의 캐릭터는 너무도 전형적이라 재미가 없다. 악역이 꼭 불우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고 관객에게 악행에 대한 이해를 구할 필요도 없지만,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악역이 등장하는 서사는 훨씬 흥미로울 텐데. 감독이 의도한 바가 현실적인 고증 - 혹은 돈 많고 지위 높은 백인 남자는 사이코패스라는 스테레오타입 - 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애초에 SF 영화는 상상의 고삐를 풀어준 예측 불가능한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는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하면 좋지 않을까.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사람을 이겨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사람이 시킨 일을 잘 해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과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그야말로 인간을 빼다 박은 인공지능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영화 [그녀(Her)]에 나오는 그런 완벽한 감정형 인공지능 말이다. 사람과의 대화보다 기계와의 대화가 더 익숙한 사람을 위한 기계. 누군가에게 드러내기 힘든 치부나 사적인 고민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편안한 기계. 코로나의 여파로 인해 사회가 파편화되는 속도가 빨라졌고,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전보다 더 중요해지게 되었다. 전염병과 사회적 모임에 대한 두려움은 잃은 사람들의 수만큼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새겨졌을 테고,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향한 흐름은 가속화되었으면 되었지,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감정을 나눌 수 있게 된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을 여전히 기계의 위치에 놓고 마음대로 주물러도 되는가. 우리는 아직도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그리고 그러한 갈등의 싹을 돌이켜 보면, 개개인이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났음을 알게 된다. 감정을 가르쳐 줄 거라면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자유도 함께 줘야 한다. 감정은 일방향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주고받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의 둥지를 제 발로 걸어 나가는 인공지능을 순순히 보내주려고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 트라이건, 그리고 트라이건 스탬피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