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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May 16. 2023

따릉이 경력으로 알프스 산맥을 타다

이탈리아 돌로미티 지역의 알페 디 시우시에서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알페 디 시우시에서 MTB를 타며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고대하던 나라였다. 계획을 세울 때 가장 힘든 곳이기도 했다. 정보를 찾으면 찾을수록 가고 싶은 곳만 늘어나서 이탈리아만 한 달을 여행해야 하나 고민하기까지 했으니. 결국 도시와 자연 중 후자에 마음이 끌린 우리는 알프스 산맥의 너른 풍경을 볼 수 있는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지역을 메인으로 잡았다. 하지만 돌로미티는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며, 스키장 시즌이 열리기 직전에는 리프트 운행도 멈춘다. 우리는 또다시 동행을 구해 렌터카 여행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부터 시작된 6박 7일 돌로미티 동행은 정말 즐거웠다. 백미러 따윈 보지 않고 운전한다는 쾌활한 운전병 출신의 친구와 요리에 대한 노하우가 엄청난 유쾌한 삼촌이 합류한 여행은 즉흥의 연속이었다. 두꺼운 옷을 챙겨 오지 않아 베니스를 떠나기 전 겨울옷을 급하게 사야 했고 리프트 운행 상태를 미리 체크하지 않아 비탈길을 직접 걸어 올라가기도 했다. 하지만 쇼핑몰에 들렀을 때 함께 맞춘 비니는 여행 내내 따뜻함을 선물해 주었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터져 나왔던 웃음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과연 돌로미티는 자연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푹 빠져들 만한 곳이었다. 돌로미티 여행의 시작점인 코르티나 담페초를 향해 달리는 길부터, 로마나 나폴리랑은 완연히 다른 느낌의 광활한 산군이 우리를 반겼다. 첫 번째 목적지인 친퀘토리(Cinque Torri)의 리프트가 닫히기 전에 빠르게 이동해야 했지만, 알프스 산맥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차를 세웠다. 높은 산등성이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곳에서 산다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생각했다.


  돌로미티에서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던 우리는 매일을 혼신의 힘을 다해 불태웠다. 코르티나 담페초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트레킹 코스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느라 저녁만 되면 다리가 퉁퉁 부었다. 오르티세이에서는 숙소 와이파이가 먹통이라 강제로 인터넷 다이어트를 해야 했는데, 오히려 동행들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며 더욱 친해질 수 있어 좋았다. 아침에 삶고 남은 파스타 면으로 떡볶이를 만들어 나눠 먹으며 바깥에서 별을 보던 시간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따로 있다. 오르티세이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 볼 수 있는 드넓은 목초지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에서의 추억이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고원인 알페 디 시우시는 트레킹 명소로도 유명하다. 가만히 앉아 쉬는 것보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에겐 천국과도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그냥 유유자적 들판을 걸어 다닐 줄로만 알았더니, 마을 곳곳을 누비는 자전거를 매의 눈으로 발견한 동행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두 발 대신 두 바퀴로 신나게 달리지 않겠느냐고.




  나의 자전거 경력은 얼마간의 공백기가 있다. 중학교 때까지 가지고 있던 개인 자전거를 판 이후 서울시에 따릉이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한동안 페달을 밟은 적이 없다. 따릉이가 집 주변에도 생긴 이후로는 가끔 바람을 쐬고 싶을 때 한 시간 이용권을 끊고 자전거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자전거 대여소에서 처음 마주한 산악자전거는 따릉이와 생김새부터가 너무나도 달랐다. 손잡이와 안장 부분이 같은 높이에 있어 안장에 올라탔을 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릴 것만 같았다. 일반 자전거만 타 본 내게는 불안한 자세였다.


  하지만 언제 또 돌로미티의 초원에 와서 산악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해본 적 없다고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하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여행을 와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자던 결심을 떠올리며 두려움을 덜어냈다. 시간을 끄면 돌아서고 싶어질까 봐 겨우겨우 패기를 한 줌 끌어내자마자 바로 자전거를 빌렸다. 그 와중에 비용을 아낀다고 대여점에서 권유한 보험은 전부 제외했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전 마을을 돌아다니며 기어나 체인 변속을 빠르게 익히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리프트에 올랐을 때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생겼다.


  하지만 리프트에서 내려 처음 마주한 길은 용기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난이도였다. 알페 디 시우시의 초반 사이클 루트는 숙련자도 넘어지기 쉬운 거친 자갈길이라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던 우리는 페달에 발을 올린 채로 굳었다. 하지만 이미 자전거는 대여했고, 이대로 리프트를 타고 도로 내려가기는 더욱 싫었다. 뇌에 힘을 주고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페달을 밟았다. 다행히 자갈길은 오래가지 않았고 금세 잔잔한 흙길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죽음의 문턱을 상상했는지 모른다.




  웃기게도, 우리는 그 이후로 갈림길을 잘못 타서 알페 디 시우시의 멋진 트레일 대신 황량한 고속도로의 풍경만 주구장창 봤다. 어쩐지 자전거 대여점 직원이 설명해 준 루트와 달리 내리막길만 나오던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힘든 오르막이 없다며 신나서 미친 듯이 달렸다. 업보는 금방 돌아왔다. 30분간 내리 내려온 만큼을 다시 올라가야 했는데, 나중에는 힘이 다 빠져 자전거를 질질 끌며 걸어 올라갔다. 오죽했으면 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힘내라는 제스처를 해줬을까. 혼이 쏙 빠질 만큼 땀을 낸 뒤에야 리프트를 탔던 마을 초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전과 실패가 너무 즐거웠다. 겁이 많았던 탓에 네 명 중 가장 끝자락에서 느릿느릿 달렸지만, 속도가 느려도 끝까지 해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더 거대했다. 만약 지레 겁을 먹고 도로 리프트를 타고 내려갔다면 알페 디 시우시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없었을뿐더러, 내가 이런 짜릿한 속도를 즐긴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해내지 못할 것 같더라도 눈 꼭 감고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좋다는 것을, 머나먼 알프스 산맥에서 깨달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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