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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po Sep 19. 2019

고야의 유령

< 뻔뻔한 영화평-1 > 


 미술사상 최초의 인간 누드화는 스페인의 화가 고야가 그린 <옷 벗은 마하>다. 고야 이전에도 누드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비너스 같은 그리스 여신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고, 인간 여성의 생생한 누드를 그린 그림은 <옷 벗은 마하 :La maja desnuda>가 처음이다. 그럼 '마하'는 누구일까? 실제 역사 속 인물일까? 

스페인어 '마하(maja)'는 원래 '옷 잘 입고 멋 내는 마드리드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남성 명사로는 '마호(majo)'.  마하는 '세련된 서울내기'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이지 사람 이름은 아니라는 거.

 '마하'가 당시 고야와 친분이 있었던 알바 공작부인이라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뭐 마하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후세에 사는 우리야 그림 속 마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야는 이 그림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른다. 외설 논란에 신성모독 어쩌고 저쩌고. 

 당시 고야가 살던 18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종교재판소의 권위가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고야에게 그림의 수정을 요구했고, 5년이나 버티던 그는 결국 <옷 입은 마하;La maja vestida>를 새로 그렸다.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19세기 초반에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정복한 후에야 폐지되었다

영화 <고야의 유령 ; GOYA'S GHOSTS>은 역사 시대극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화가 고야가 아니다. 고야의 일생을 시시콜콜 묘사하는 전기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고야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관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할 뿐이다. 포스터 속의 남자 주인공 하비에르 바르뎀은 고야 역할을 맡은 게 아니다.  그가 맡은 '로렌조'신부는 세속적인 욕망의 화신이다. '이네스'역의 나탈리 포트만은 거대한 권력의 희생자, 비련의 여자 주인공이다. 어쩌면 고야의 그림 속 '마하'의 화신일지도 모르겠다.


 밀로스 포먼 감독의 명작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그야말로 원탑 주인공이다. 그를 관찰하는 조연은 '살리에리'가 맡았고 살리에리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같은 감독이 연출하고 위대한 예술가를 모티브로 한 공통점이 있지만 <고야의 유령>에서 고야는 조연에 불과하다. 그가 관조하는 비극의 시대가 바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전파하겠다고 스페인을 침략한 나폴레옹 군대는 과연 자유 평등 박애의 전도사였을까? 프랑스군은 마드리드의 민중들에게는 종교재판소의 억압을 대체하는 또 다른 침략자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의 승리와 영광을 찬양하는 역사만을 알고 있었다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이 말하는 진실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좋겠다. 

    

* 하비에르 바르뎀이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봐도 좋다.

* 나탈리 포트만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지는지, 그녀를 정말 사랑한다면 안 보는 게 나을 수도...

* 역사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강추! 

* 승자는 항상 정의롭다는 단편적인 뇌구조를 가진 사람은 접근 불가!

* 이 영화를 보고 고야의 그림을 다시 찾아보면 정말 감동 먹을걸. 영화 말고 그림에...  


 다음은 개인적인 신변잡기. 안 읽어도 좋다.

  나는 그림 문외한이다.

 그래도 피카소 그림은 좀 볼 줄 안다.  

 스페인 여행 중에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그림들을 보고 흠뻑 취한 적이 있다. 미술 애호가 정도는 아니지만 고야가 그린 인물들의 눈빛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고야의 그림들을 다시 보고 싶어 져서 인터넷을 뒤졌다. <옷 벗은 마하>를 물끄러미 보다가 갑자기 또 여행병이 도졌다. 누드화를 보다가 여행병이 도졌다고? 


 여행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 란다. ‘알랭 드 보통’이란 사람이 <여행의 기술>이란 책에서 한 말이다.

 나름 혼자 하는 여행을 즐기는 나로서는 공감 또 공감이다. 

 사실 홀로 여행을 떠나서 하루 종일 걷다 보면 그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는 게 결국은 자기 몸과의 대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아침에 길을 나서 자못 철학적인 사색에 잠기기도 하지만, 지쳐버린 석양 무렵에는 어느덧 내 몸과의 대화에 빠져들고 만다. 아픈 다리, 허기진 배... 

 몸은 있는 그대로 나의 실존이다. 나는 나의 들숨과 날숨을 느낀다. 나는 걷고 있고, 숨 쉬고 있고, 나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몸과의 대화'그리고 누드화. 옷 입은 마하보다 옷 벗은 마하가 더 좋다.(오해는 마시라)  

 일상 속에서 거의 잊어버렸던 내 ‘실존’을 혼자 하는 여행을 통해 비로소 되찾는다.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마저도 잊고 사는 나날들. 거대한 감옥 같은 이 도시에서 나는 종종 탈출을 감행한다. 


 <고야의 영혼>을 보고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다시 가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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