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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겁꾼 Apr 19. 2023

엄마에게 기동력이 생긴다는 것은

육아라는 세계의 확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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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skgus5130/47


보험사에 첫 사고를 접수하고 집에 오자마자 문화센터 수업부터 취소했다. 그 주차장에는 얼씬도 하기 싫었다. 운전을 조금이라도 덜 해보고자 했던 얄팍한 꾀로 집과 가장 가까운 마트에 개설된 문센 수업을 신청한 거였는데, 주차장이 복병이었다.


사실 그 주차장은 역사 내에 있는 주차장이라 애초에 차가 많은 곳이었다. 그런 건 고려 안 하고 그저 집에서부터 주행거리만 따졌으니 아마 그대로 문센을 다녔다면 주차장에서 언젠가 충분히 사고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은 운전을 시작한 내게 ‘사고는 안 일어날 수가 없다’고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교통사고는 내가 조심한다고 사고가 안나는 게 아니라고들 말하는 그런 이야기의 맥락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 사고였다고 한들, 그 타이밍이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당황스러웠다. ‘초보인데 접촉 사고쯤이야 일어날 수도 있지!’하고 당당해보려고 해도 자책감이 들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그럴 거면 마음 편하게 택시를 타고 문센에 다니라고 했다. 근데 그건 또 내 몹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그러진 어린이집 입소 덕분에 장롱 면허를 탈출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는데, 내 손으로 그 기회를 놓쳐버리긴 싫었다.


결국 집 가까운 백화점 한 곳과, 조금 더 멀지만 주차장이 넓은 마트 한 곳에 각각 수강신청을 하고 본격 문센 라이딩을 시작했다. 첫 수업에 차를 끌고 가던 날, 옆자리에 남편을 태우지 않고 운전을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어찌나 손에 땀을 쥐게 되던지 마음속으로 온갖 신을 불러가며 제발 내 차에 안전을 달라고 빌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차들은 무섭다 물론 내 차도…




다행히도 사고 없이 문센 한 학기를 완주했다. 지난주에도 다녀왔으니 이번주에도 다녀올 수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매주 문센에 다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니는 길을 외우게 됐다. 이쯤에서 차선을 바꾸면 수월해, 곧 단속 카메라가 나오니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해, 여기서 좌회전하고 곧장 우회전을 해야 하니까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잘 보자 등등 주행에 필요한 소소한 팁을 스스로 깨닫게 되니까 운전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사람들이 초보운전일 때 익숙한 길을 자주 다녀보라고 얘기하는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됐다.


문센 수업이 없는 날에는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 안에 있는 키즈카페나 널찍한 공원같이 주차가 편한 곳 위주로 외출을 해봤다. 주유구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몰랐는데, 주유소에서 처음으로 주유도 해보고, 고속도로를 타고 박물관에도 놀러 가보고, 친구와 친구 아이를 만나 밥을 먹기도 했다. 사실 집에서 대단히 멀리 있는 곳도 아니고, 택시로도 갈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운전 횟수가 누적되면서 어쩐지 운전에 희열을 느꼈다.


칭찬스티커마냥 운전 인증샷도 종종 남김




어느 날은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육아종합지원센터에 오감놀이 수업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아이의 동네 친구를 만났다. 집에서 거리가 좀 있다 보니 다른 동네에서 만난 것 자체가 신기했는데, 그 엄마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유모차를 끌고 지하철을 타고 30분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그 고됨이 느껴져서였는지 ”집에 갈 때는 제 차 타고 같이 가요!”라고 덜컥 말을 내뱉고 말았다.


무의식에 말을 뱉고 나서, 내가 감히 가족이 아닌 타인을 차에 태워도 되는 건지, 과연 그래도 괜찮을 운전 실력인 건지, 게다가 임산부를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이 차에 태워도 되는가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번뇌가 이어졌다. 이미 말을 뱉어버렸으니까 다시 주워 담기엔 늦었다.


엄마와 아이를 뒷좌석에 태운 채 집으로 향하던 길, 그녀에게 나의 오만 걱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하게 웃으면서 운전했다. 흔들리는 동공을 그녀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 엄마와 아이 그리고 유모차까지 집 근처에 잘 내려주고 무사히 집에 돌아왔던 그날, 나는 몇 없는 운전 경험 중 가장 뿌듯한 행복을 맛봤다. 나의 서툰 운전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그 자체는 설명할 수 없이 엄청나게 벅찬 감동이었다.




그동안 내게 없던 기동력이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육아가 수월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좀처럼 아웃풋이 없는 삶을 살다가 만난 운전은 성취감의 도구이자 결과이기도 했다. 뭐야 나도 할 수 있잖아?, 하니까 되네? 같은 기분은 살면서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 감정이었다.


“아, 나 이런 감정이 필요했었네. “


비록 불완전하고 세상 느린 운전이었지만, 나의 육아에도 마치 바퀴가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육아라는 그 세계가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봐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운전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을 넘어 이걸 꼭 잘 해내야 한다는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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