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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애정 Jun 13. 2023

어느 날, 현관문 비빌번호를 잊었다.

조금 사라지고 조금 불탔던 날들, 번아웃

5월이 오기 전, 많은 기대와 설렘을 안고 있었다. 날씨가 좋을 때 여행하자며 잡아놓은 캠핑여행, 멀리 프랑스에서 오는 친구와 함께하는 여행,  해외봉사 모임 원중 한 명의 결혼 전 잡아놓은 여행,몇 개월째 해오던 심리학 모임의 워크샵. 다 너무 설레고 기대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5월의 시작과 함께 감기가 찾아왔다. 열이 38도까지 오르며 코로나 검사까지 하였는데 결과는 음성. 어쨌거나 여행을 갈 수 있는 컨디션은 아니었기에 그 주에 예약되었던 캠핑 약속을 취소했다. 어린이날까지 포함하여 연휴내내 집에서 쉬었는데도 몸은 나을 기미가 안 보이다가 2주 차가 되니 조금 회복이 되었다. 회복하며 제일 기다렸던 모임 워크샵을 다녀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6월 시작과 함께 완성한 수채화


그리고 그다음 주, 프랑스 친구 S가 한국에 도착했다. 요즘 스케줄 상 평일엔 약속을 잡지 않은지 꽤 됐는데 화요일 낮부터 브런치 약속을 잡고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니 너무 반가워서 그간 못 나누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창덕궁 투어 후 출근, 그 주 주말에 함께 다녀온 부산 여행. 하필이면 5월에 직장에서의 바쁜 일정까지 겹치면서 틈틈이 여행 계획을 짜야 했다. 어찌어찌 여행까지 잘 마무리 하고 돌아오니 다시 감기가 걸렸다. 친구가 한국에 오기 전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예정되어 있던 한국에서 10일의 여행이 3주로 늘었다. 너무도 반가운 일 이었지만 무너져 가는 내 일상과 낫지 않는 감기속에서 마냥 반가워할 수는 없었다. 그다음 주에도 9시 퇴근 후 도심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한국 전통주 칵테일바에 갔다. 2주간 퇴근 전, 퇴근 후의 시간을 활용해서 친구를 챙겨주려니 나의 일상은 많이 멈춰야 했다. 수채화 클래스도 2주 동안 빠져야했고, 요가 와 복싱 모두 잠시 쉬고 연장을 했다. 그렇게 나보다 남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퇴근 후 집 건물 앞에 섰는데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습관처럼 머리보다 손이 먼저 가던 비밀번호였는데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집중을 해서 머리로 생각을 하려니 더 생각이 안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경비아저씨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000호 입니다. 진짜 죄송한데 제가 현관 비밀번호가 기억이 안 나서요..." 당황한 나와는 달리 선생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며 그런 일도 있다고 비밀번호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더 기가막힌 것은 그렇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문 앞에 섰는데 집 비밀번호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를 하다가 다행히도 비교적 쉬운 비밀번호 덕에 집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씻고 누웠는데 정신이 멍 했다. '이런게 번아웃일까?' 라는 생각과 함께 '고작 이런거 가지고 번아웃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나?'라는 자기검열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조금은 불타고, 조금 사라진 느낌이었다. 


20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평일에도 술 약속을 가고, 주말이면 하루에 약속을 두, 세 개도 다니던 나였는데. 고작 이렇게 멘탈이 무너진다고? 꾸준히 운동을 해온 덕분에 평소 나의 20대에 비해서 30대 중반인 지금, 떨어지는 체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분명 이건 체력탓도 아니었다. 외부적인 마음의 에너지는 이미 많이 소모한 탓일까. 내적인 요청이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사라진 나, 6월에는 천천히 시간을 갖고 되찾기로 스스로와 약속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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