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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시인 Jul 29. 2024

사람을 살리는 고양이 (1)


4년 전만 해도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갓난아기였다. 이제 막 세상 빛을 본 지 4개월이 지난 하얀 고양이는 내리쬐는 뙤약볕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작은 꼬마 아이로 입양되었다. 작게 울부짖는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어우러지는 게 퍽 인상적인 처음 만났던 날씨다.


어릴 적부터 고양이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반려 동물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생명을 맡아 키운다는 책임감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반복되는 일상이 적적했던 걸까. 굴곡진 인생의 선율은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것인지 그 여름 날에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이른 나이에 빚을 지며 카페, 식당, 도슨트, 공사장, 택배 등 돈이 되고 시간이 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우스울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치열했고, 보이지 않는 각자의 전쟁터에서 몸부리 치고 있었다.


 지겹도록 들은 '시간 빠르다'는 이야기,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이야기, 어른들의 훈화 말씀에서나 나왔던 일들이 현재의 시간을 서서히 메워 나갔다.


외로움과 고독을 사이에 둔 투쟁에서도 행복은 늘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왔다. 쓰러지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는 것처럼 생애는 나를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았다. 노동을 위해 쉴 새 없이 먹은 비타민처럼 짧은 순간에 행복을 한껏 들이키고 다시금 노동 기계처럼 분주한 삶을 이어갔다. 청년들은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는 누군가의 글귀 한 조각은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더하여 상처를 영광의 흔적으로 가려 놓았다.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나를 빛내기 위한 상처니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용기 내라는 누군가의 뜻이었겠지만, 당시의 내게는 마음의 병을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한 과장된 희망에 불과했다. 독인지 약인지 모를 희한한 말이다.



반려 동물을 찾은 것도 이런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올 때였다. 이래나 저래나 힘든 삶에서 홀로 맞이하는 고독을 겪는 게 몸서리칠만큼 싫어졌을 때 고양이를 분양받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래, 먹이, 양육에 필요한 물품, 병원비 등 걱정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생명을 책임지는 일을 쉽게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길러본 적이야 있겠는가. 제 몸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20대 청년이지만, 그냥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그 이상 더 바랄 거 없이 나를 좋아해줄 존재가 필요했었다.


 달라질 생활을 기대하며, 새로운 가족이 들어오는 느낌이 궁금했다. 하늘의 선물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처음 마주했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쿠팡 박스를 오려 집을 만들어주고 다이소에서 천 원하는 인공 잔디를 깔아 푹신하게 해주고, 그 소박한 거 하나를 만들면서 머 그리 기분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일생에 처음 느끼는 매순간이었다. 하루 중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이유가 필요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힘들었다. 삶은 힘들었지만 마음을 공유할 친구가 있어 자는 동안 꼭 껴안고 그날을 치유했다.


 네가 낯선 공간에서의 불안함을 차츰 허물어갔던 것처럼 나도 너와 함께 새로운 삶에 다가서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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