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머니의 장례식
첫 번째 기일이 다가온다. 쓰다 멈추던 이 글도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타인의 글을 읽는 목적 중 하나가 경험과 생각의 습득이라고 하니, 누군가에게는 할머니의 장례식 때 영정사진을 들고 운구의 맨 앞에 선 손녀의 기록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자기소개서 한 줄 남아있지 않은 할머니를 대신해 아주 짧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제주 4.3 사건으로 첫 번째 남편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후 디즈니에서나 나올 법한 폴 인 럽을 통해 연고가 하나도 없는 서울로 과감히 올라온다. 치열한 근현대사를 비켜선 소박한 시민이었지만, TV처럼 크고 무거운 가구는 피난 갈 때 들고 갈 수 없으니 집에 들이지 못했던 그 시절 사람이었다. 당신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파는 데 능숙한 장인이고, 수완도 좋고 고집도 있던 장사꾼이자, 나의 할머니였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에게 사춘기가 찾아올 즈음 아빠의 사업이 휘청이면서 유쾌하기만 할 순 없는 할머니와의 동거가 시작됐다.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살았던 손녀는 여느 10대가 되어, 생각과 가치관이 너무 다른 사람들은 관심과 이해의 대상에서 제외했고, 그 범위에 할머니가 속했다. 내가 나이를 먹고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을 땐, 할머니에게 더 많은 세월이 흘러있었다. 뭔가를 풀기도, 담기도 어려운 감정은 소복이 쌓여가는데, 할머니는 조금씩 야위기 시작했다.
어린이날. 미국에 사는 딸과 제주도에 사는 아들. 그 외에도 보고 싶었던 가까운 친지들이 모인 방에서 조용히 돌아가셨다. 사후경직이 있기 전, 틀니를 끼워 드리고 돌돌 만 수건으로 턱을 받치면서 얼굴의 형태를 잡아드렸다.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에는 인근 장례식장과 미리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좋다. 119로 무턱 전화를 하게 되면 사건으로 접수되어 경찰이 동행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사전에 준비가 되어 있어 별도로 연락할 수 있었고, 앰뷸런스는 사이렌을 끄고 조용히 집으로 왔다. 모든 일가친척들이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조용히 북적거리던 집에 나만 남았다. 날씨가 너무 맑아서 여러 가지 감상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흩어져서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반질반질 깨끗했던 바닥만 떠오른다.
병원에선 아마 사인을 확인하고 있었을 시점, 나는 장례식장에서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챙겼다. 상주하는 가족과 친척들을 위한 간단한 세면도구와 수건 여러 개, 로션, 가그린 등이 목록에 들어갔다. 장례식장에서 떡값, 꽃값 등은 현금으로 바로바로 든다고 해서 현금인출기를 찾았고, 근처 문구점에서 조의 봉투를 제외한 포스트잇과 고무줄, 클립을 샀다. 검안비, 일당, 차비 등 현금 지급이 불가피한 경우가 예상보다 많았다. 급하고 경황이 없으면 조의금에서 현금을 조달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여유가 될 때마다 조의금을 기록하고, 사용내역을 정리한 게 꽤 유용했다.
연락처를 주면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에서 일괄 문자를 드린다고도 하는데, 너무 낯선 문장을 나도 낯선 사람에게 보내는 것 같아 사양했다. 할머니와 내가 오랜 시간 함께 산 것을 아는 몇몇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회사에는 전화했다.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끊고 나서 조금 울었다. 말로 내뱉는 게 글을 적는 것보다 더 어렵고 생생했다.
황금연휴에 낀 어린이날,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다행이었다. 규모도 작은 편이었고 우리 가족이 들어간 첫날에 다른 장례식은 발인날이어서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종교이자 신실한 고모의 종교에 따라 장례식을 운영했고, 절차 대부분은 상조회사에서 도와주었다. 음식을 나르고 치워주시는 아주머니 두 분은 장례식장에 요청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가까운 친척들이 많은 부분을 도와주셨다. 방울토마토 같은 과일 몇 가지는 근처 식자재 마트에서 사 왔고, 대부분은 장례식장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썼다. 박스에서 뜯으면 전체 가격을 무는 것은 어디나 동일할 것 같다. 다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집과 장례식장을 오갈 일들이 있었다. 차가 없으면 꽤 불편하겠단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수의를 만들어두셨고, 영정사진은 가족이 정했다. 할머니 가게 맞은편에 있었던 영화 제작 업체에서 지역사회 활동으로 어르신들 사진을 찍어줬다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었다고 한다. 프로의 사진은 꽤 멋졌다. 할머니의 성격과 추억, 인생이 느껴지는 사진이 걸려있어서 그런가? 문상객들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추모하는 모습을 할머니가 정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당 한쪽에서 상조회사 두 분이 작은 꽃다발을 하나씩 하나씩 포장하는 걸 봤는데, 입관하려고 가니 할머니 주변이 그 꽃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사후 경직 전 조치 덕분에 너무 오랜만에 고운 할머니를 봤다. 사진만큼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계신 모습에 울컥했다. 가족들이 한 마디씩 하고 관을 닫았는데, 호상이라며 그래도 내내 덤덤한 상주였던 아버지는 이때 무너져서 울었다. 대리효도와 효자 노릇을 반복하던 모습을 봐왔던 나와 동생은 그 모습에 서로 다른 감상을 느끼며 울었다.
입관이 끝나면 장례식장에서의 절차는 거의 마무리된다. 운구에 참여할 성인 남성이 필요한데, 이때가 가장 황당했다. 장례식장 구조, 의복, 완장, 상주에 대한 구분 등, 장례 문화 자체가 가부장제 특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행사이지만 개선되어야 하는 전통 이런 걸 떠나서 이때는 좀 서러웠다. 황금연휴가 끝나버린 바람에 지방으로 가야 하는 친척들이 생겨 동생을 포함해도 두 명 정도 손이 부족했다. 여중과 여고를 나왔고 여초과 대학을 나온 나는 당장 내일 휴가를 쓰고 와서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친한 남자사람친구가 얼마 없어서 더 그랬다. 어찌어찌 동생의 친구가 급하게 왔고, 내가 영정사진을 드는 것으로 분장이 됐다.
할머니가 그래도 손녀랑 가장 친하고 제일 좋아했다-는 걸 우리 가족은 안다. 우리 가족만 안다. 화장터는 장례식장보다 훨씬 붐비고 소란했는데, 그 많은 무리 중에 영정사진을 들고 선 여성은 나 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도 있는 걸 알지만, 나름의 시선이 느껴졌다. 상조회사에서 자꾸 자기는 이런 날이 처음이라고 옆에 와서 곁들이는 말 때문에 더 저항하는 기분이 들었다. 요란한 종소리를 따라 걸어가는 내내 액자가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는 걸 신경 썼고, 왼쪽 팔 근력운동을 더 해야 한다고 그때마다 생각했고, 우리 할머니는 내가 이렇게 서 있는 걸 좋아할 거라고 계속 생각했다.
한 줌으로 유골이 나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별별 일이 다 일어난다. 우리 집에서도, 다른 이들의 집에서도.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 장례식장에서 타고 왔던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각자의 예정된 장소로 이동한다. 우리는 할머니가 바다가 보이는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다고 협의했기 때문에, 비행기 운송에 필요한 서류를 챙겨 드렸다. 할머니의 하얀 유골함은 아마 그만큼 하얀 구름을 뚫고 짧은 비행을 거쳐 아주 오랜만에 푸른 섬에 도착했을 거다.
일 년이 되어간다. 처음 할머니에 대한 글을 썼던 순간에서도 일 년이 지나간다. 나라는 개인에게는 가족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더 다양한 이해와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반성이 남는다. 놓쳐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손끝까지 느껴진다. 슬픔의 크기와 표현의 방식을 성별로 제한하지 않도록 더 많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도 기록하고 싶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지만, 그 언젠가 다음 장례식이 닥쳤을 때, 나도 사회도 변화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