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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지 Nov 19. 2021

파도의 생각

4. 건조함 위에 올린 실패

내겐 수능을 치지 않은 동생이 하나 있다. 우리는 딱 보통의 남매 같아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솔직한 이야기까지. 서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삶의 크고 작은 변곡점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대게 다 지난 후에 아 그랬어? 그때 그래서 네가 유독 더 이상했구나. 하는 식이다.


예민한 사춘기를 동시에 보내고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그렇게 각자의 시절을 지내고 나서 나는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나쁘지도 굳이 좋지도 않은 사이. 퍼석하게 마른 낙엽처럼 건조하지만 같은 뿌리와 가지에서 나왔다는 사실 만으로 아주 가끔 위로가 되는 관계. 




이런 생각을 지금은 진심으로 후회한다. 


내가 아는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사건을 정리하면 이렇다. 동생과 친한 친구, 또 다른 친한 선후배 등등. 몇몇이 영끌을 해서 투자를 했다. 아쉽게도 부동산이나 비트코인이 아니라 중고차 시장이었다. 코 묻은 돈부터 대출로 이루어진 돈을 끌어모아 투자금으로 사업을 하던 놈은 아주 난 놈이었다. 그가 벌려놓은 여러 가지 일 중 하나가 사기인 게 걸렸고, 줄줄이 줄줄이 걸려서 감옥에 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도 감옥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 자식이 사기꾼인지 몰랐어요!라는 말은 투자금 회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투자한 이들은 여러 복잡한 채무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는데?


정말 한 문장 한 문장이 볼 때마다 속 시끄러운 이야기다. 그래서 보통은 저 아래 의식에 잘 묻어 놓고 들여다보지 않는다. 시간은 지났고, 일은 벌어졌다. 퀴블러 로스가 On Death and Dying에서 명시한 모델을 따라 수용의 단계에 도착한다. 그래. 몰랐다는 것도 변명이 되어주진 않아. 어쨌든 선택을 했으면 그 책임을 져야지. 그게 인생이야. 이런 일을 나이 더 먹고 직장이 안정된 상태에서 당했어봐. 몇 천이 아니라 몇 억이었을지도 몰라. 인생수업 비싸게 받은 셈이지만, 이 정도면 대학교 졸업장 값이랑 비슷하지 뭐. 괜찮아.


그렇게 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우리가 수용하고 지나간 일이 사회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사회는 우리가 실수라고 말해온 일의 실체가 실패임을 잊을만하면 상기시켰다. 여의도에서 서류가 오고 경찰이 부르고 참고인 조사로 갔다가 검찰에 고소를 당하고 변호사를 구하고 재판에 서는 일들이 이어졌다. 아주 천천히. 


가만 보고 있으면 이건 그저 깊은 수렁이다. 스스로 나오는 건 단연코 불가능하고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데 단단하고 커다란 나무줄기를 뻗어주는 게 아니라 얇은 나뭇가지나 어설픈 구명조끼 같은 걸 던져 줬다간 그 사람마저 같은 늪에 빠져 버린다. 열심히 끝으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더 깊이 진득함이 몰려온다.




이렇게 한 번 실패한 사람이 재기하는 게 영 쉽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라는 말을 이름을 부를 수 없는 ' 그 사람'처럼 대한다. 어지간한 실패는 실수라고 이야기한다. 운이 없었다고도 한다. 코로나라는 방패를 들기도 한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재도전을 하면 된다고 말한다. 아니면 눈을 낮춰버린다. 여기까지가 원래의 목표였던 것처럼 나를 속인다.


하지만 원래 인생은 크고 작은 실수와 실패로 이어져 있지 않나? 다들 굳이 말하지 않을 뿐이다. 동생의 이야기를 실컷 했지만, 이건 흔한 실패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통장과 심정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은 수두룩 빽빽하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모아 놓으면 동생의 이야기는 정말 새로울 것도 없다. 세상을 사는 방식은 살아있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삶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더 다양하다. 자연히 실패의 모습도 다양하다. 


사람은 원래 온갖 종류의 실패를 딛고 사는 존재다. 그러니까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실패를 경험하기 전에 작고 소소한 실패들을 겪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실패를 혼자 이겨내면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경험까지 할 수 있다면 다 괜찮다. 하지만 아무래도 혼자 이겨내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솔직하게 상황과 생각,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정보를 모으고 조언을 듣고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경험해 보는 게 더 좋겠다.




어제 누군가에 의해 삶의 한 챕터를 끝내는 온점을 찍은 이들이 있다. 인생에 목표가 마치 이것밖에 없는 것처럼 몰아붙였던 건 사회고 기성세대인데, 그래 놓고 그 대단한 시험이 끝나자마자 '괜찮아. 수고했어. 세상에 다른 중요한 게 얼마나 많은데. 다른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거 가지고 너무 비관하지 마.'라고 말하는 게 퍽이나 들리겠다 싶다.


과외나 학원에서 만났던 요즘 애들은 똑똑해서 이게 전부가 아닌 걸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허무함과 우울함,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는 동생들이 있을 것 같았다. 이 소리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혼자 아득바득 애쓰고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적당한 타인을 찾아냈으면 좋겠단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도움을 요청한 대상에게 책임을 그대로 미루지 않고, 나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의견을 나누는 건 이렇게 글을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힘든 일이지만 늪에서 나오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실패와 그다음까지 경험하면서 성장한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야 지금과는 달리 실패에 관용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테니까. 


여전히 나와 동생의 관계는 건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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