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지 May 03. 2020

파도의 생각

2. 휠체어와 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스쿠버다이빙이란 스포츠를 알게 된 후부터 줄곧 다이버가 되고 싶었다. 지구는 표면의 2/3가 바다다. 진짜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면 여행지에 바다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짜였다. 바닷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게 되자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바닷속 세상에 중독될 것 같았다. 그 어떤 아쿠아리움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게 지구의 바다라는 걸 깨달았다. 더 다양한 세계를 보고 싶어 졌고, 새파란 홍해에서 처음으로 보트 다이빙을 하게 됐다.


파도가 낮게 치는 잔잔한 바다. 구름 한 조각만 달랑 걸려있는 깨끗한 하늘. 하얗고 얄상한 보트들이 만드는 흰 거품과 은색의 파도. 짠내 없이 살랑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 정갈하게 일렬로 늘어져 단단히 배에 묶여 있는 공기통.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스쿠버다이빙 장비들. 언젠가 상상했던 보트 다이빙의 풍경 그대로였다.


그리고 항상 현실은 상상 그 이상이지 않은가. 그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 번째로 보트에 올라 잔뜩 신이 나 있던 내 시선을 처음 낚아챈 건 특이한 모양의 핀이었다. 핀은 추진력을 내기 위해 착용하는 장비를 말한다. 대게 수영장에서 사용하는 오리발과 비슷한데 좀 더 크고 단단하게 생겼다. 물론 핀도 다른 스포츠용품처럼 착용방법, 재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뉜다. 그런데 갑판 한편에 놓인 이 핀은 이론교재에서도, 다이빙 샵에서도 본 적이 없다. 어린아이가 아니고선 발에 끼울 수 없을 것 같은데 두 쌍으로 보인다. 이게 뭘까? 새로운 스포츠인가?


초보 다이버의 눈에는 낯설기만 한, 어색한 것들의 발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이한 핀 옆에서는 ‘진짜 오리의 발’처럼 생긴 장갑을 발견했다. 활짝 펼친 손바닥 모양인데 벌어져 있는 손가락 사이가 물갈퀴처럼 채워져 있다. 바다에서 보트로 올라올 때 사용하는 사다리 옆엔 마치 엘리베이터 같은 커다란 리프트가 있다. 고작 2층짜리 작은 보트에는 과분한 게 아닌가 싶은데, 리프트의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과한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다. 욕조를 넣어도 될 정도로 크고 널찍했다. 나무 갑판으로 된 배인데도 문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물이 조금 세어 나와 있었다.


굳이? 싶은 신기한 물체와 구조에 대한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 깔끔한 답을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배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왜 스쿠버다이빙이 젊은 비장애인들의 스포츠라고 생각했던 걸까?



신경계나 근골격계에 발생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몸의 기능이 영구적으로 제한된 것을 지체장애라고 한다. e-나라지표 사이트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지체장애는 1,239,000명이다. 전체 등록장애인 수(2,586,000명)에선 절반에 해당하고, 같은 연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수가 51,826,059명이었다고 하니,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백 명 중 두 명인 셈이다. 생각보다 엄청 높은 수치가 아닌가? 그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왜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가?  


익숙한 것들 때문이다. 젊은 비장애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모든 것들 때문이다. 그 당연함 뒤에는 커다란 차별이 있다. 무지와 무관심을 바탕으로 견고하게 짜인 사회, 젊은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간은 안 그래도 불편한 이들- 지체장애를 포함한 모든 장애인과 거동이 불편해지는 고령층 모두의 움직임을 더욱더 불편하게 한다.


반면, 바다는 모두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낯선 자유가 있는 곳. 바닷속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일렁이는 햇빛의 흔적이 느껴진다. 어렴풋한 밝기가 단순히 시야로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어느 수역은 온도 차이가 극명해서 빛을 온몸으로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아직 우주에 가본 적은 없지만, 눈을 뜨면 달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주에 있는 것처럼, 잘 맞춰진 부력은 무중력 상태의 자유를 느끼게 한다. 위아래가 구분되지 않으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몸으로 뛰어든 바닷속은 이렇게 자유로운 세계인데도, 나는 이 바다를 향유하는 다이버들이 당연히 모두 젊은 비장애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고 스스로 자부해왔건만, 내 보트 다이빙 ‘상상’ 속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노인은 없었다. 파란 바다와 휠체어를 번갈아 보면서, 나의 상상 위에 실제 다이버들의 얼굴을 채워 넣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내 익숙함 기저에 있는 기울어진 균형을 마주한 게 부끄러워졌다.



심지어 그들은 나 같은 햇병아리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다를 오래전부터 알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에펠탑에서 홍해로 휠체어를 타고 온 프랑스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불어는 메르시뿐이라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다. 이집션의 말도 안 되는 통역과 몸짓 발짓으로 이해한 건 전쟁으로 다리를 잃었단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불편한 환경에 놓이기 전부터 바다를 찾아다녔던 다이버였다. 몇몇 포인트를 추천해 줄 정도로 다이빙에 대한 애정이 엄청났다.


손녀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다이빙 포인트에 도착하기 전까지 보드게임을 해주고, 색칠놀이를 함께 하던 할머니와는 말이 통했다. 할아버지는 보통 지팡이를 짚고 돌아다니는데, 아무래도 배는 미끄러워서 위험하니까 호텔에서 휠체어를 빌려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린아이들이 지금 같은 바다를 언제든 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개인 장비를 전부 갖춰서 정말 프로구나- 싶었던 이는 갑판에서 휠체어로 돌아다니는 것 마저 아주 익숙해 보였다.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만약 우리가 수중에서 처음 마주쳤다면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곤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 같았다. 내일 다이빙에도 또 올 거지? 또 보자! 하고 내 부족한 다이빙 실력에 응원까지 보내줬다.


지구 곳곳을 제법 여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그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 체형, 인종이 섞여서 심지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둥글게 모여 눈 앞에 펼쳐진 바다의 속내를 궁금해하면서, 까맣게 탄 스태프가 준 해바라기씨를 나눠먹는 광경이라니. 정말 새로웠다.


몇 년이 지나도 이 배의 따뜻함이 생생하게 떠오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 느낌을 나 혼자만 알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기회가 되는 대로 영업을 했다. 다이빙을 해봐. 스쿠버다이빙부터 시작해봐. 걱정 마. 수영은 못해도 스쿠버다이빙은 할 수 있어. 바다에 들어가면 생각이 바뀔 거야. 시야가 넓어져.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너의 편협함과 문제들을 방치하고 있던 나태함을 피부로 느끼게 될 거야. 한 숨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 1초라도 젊을 때 배워둔 게, 미래에 네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해졌을 땐 시원한 탈출구가 될지도 몰라.


바다는 우리를 모두 같은 존재로 보니까.



이 글과 우연히 마주쳐 여기까지 읽은 분들도 다이빙, 휠체어와 바다에 관심이 생기면 좋겠다. 당장 무언가를 실천하고 도전하는 게 아니어도 좋다. 다만 함께 사는 삶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어떤 미래를 맞이하고 싶은지 상상해보면 좋겠다. 그 상상 어딘가에 휠체어와 바다가 있다면 좋겠다. 함께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세계가 오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파도의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