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기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지 Dec 16. 2022

2. 부자의 기준

2022 한국 부자보고서를 읽으면서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서 '2022 한국 부자 보고서'라는 통계집을 발행했다. 매년 찾아보는 신한은행 '보통 사람 보고서'에 비해 자료 구성에 조금 아쉬운 점이 있지만, 출처가 '부자' 400명의 대면 설문이므로 대한민국 부자들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 보고서다.


표지와 요약(Snapshot)


보고서는 '부자'의 정의에 대한 설명 없이 요약표를 바로 제시한다. 좀 희한한 구성이지만 덕분에 첫 장을 펴자마자 등장한 표와 그래프를 보면서, 대체 이 응답을 한 사람들은 누굴까? '부자'를 어떻게 골랐을까? 궁금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기준의 기준 매거진에 글을 쓰게 되었다.


부자의 기준은 뭘까?

사실 이 보고서나 나의 기준 말고

당신이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이 궁금하다.





당신에게 '부자'란?



기준을 잡았다면 당신이 세운 '부자'의 기준과 이 보고서에 쓰인 '부자'의 기준부터 비교해 보자. 금액의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8P 본문에 따르면 집필진은 2022 한국 '부자'의 기준을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개인으로 잡았다.


아마도 10억이 '기준'이 된 것은 8억이나 13억 같은 금액보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돈의 단위라서 그럴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1인~2인 가구를 기준으로 할 때 경제적 자유(경제적 독립)를 진짜로 실천할 수도 있는 최소한의 시드머니가 10억 수준인 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자고로 '부자'라면 노동의 굴레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원한다면 언제든 은퇴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춰야 할 테니 말이다.


2021년 기준, 한국에서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을 보유한 사람은 총 42만 4천 명이라고 한다. 해당 연도의 대한민국 총인구는 약 5,174만 명이기 때문에 0.82% 만이 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가 채 되지 않지만, 백 명이 모여있으면 한 명 정도 부자가 있을 수 있는 수준이다.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적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아무래도 수치가 이상하다. 가격을 보고 이걸 누가 사?라고 생각한 감성캠핑 아이템이 모든 텐트마다 하나씩 있을 때, 오랜만에 평일에 연차를 쓰고 핫플이라고 소문난 가게로 가는데 이미 사람들이 한가득 있을 때, 모바일 게임을 하거나 스트리밍 영상을 볼 때. 대한민국에 부자 참 많다 싶은 순간은 정말 많다. 나 빼고 다 부자 아냐?라는 생각을 얼마나 자주 하는데. 고작 1%가 안 된다고? 말도 안 돼. 


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 당신은 서울이나 경기, 인천에 거주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한국 부자의 70.3%는 수도권에 살고 있다.


심지어 서울 안에서도 부의 집중도는 지역구 별로 나뉜다. 보고서는 부의 지수가 1.0을 초과하는 곳과 미만인 곳을 표시하고 있는데, 보고 있으면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서울시 대선 개표 결과를 한 번 붙여봤다. 흥미롭다. 지지하는 대선후보의 정당이 마치 부의 지수처럼 보인다. 휴전 국가인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소득, 직업 등의 변수보다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념 성향과 세대 차이에 더 집중해 왔는데, 갑자기 '계층/계급정치(class polictics)'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것은 10억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부자들에게 '당신은 부자입니까?'라고 묻자 '아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부자들의 대답에 따르면 대한민국 부자들의 세계에서 진정한 '부자'란 총자산이 100억 원 이상인 사람을 의미한단다. 10억에서 50억 정도 가지고 있는 자산가의 78.4%가 스스로를 '부자가 아니'라고 평가했다. 부자 중에 부자. 진짜 부자들. 보고서는 이들을 고자산가(100억~300억)와 초고자산가(300억 이상)로 재정의한다. 초고자산가는 8,600명으로 한국 부자의 2%, 전체 인구의 0.02% 뿐이다.


이렇게 물리적인 부자의 수는 전국민의 1%도 안 될 정도로 적고, 그 부자들의 의식 속에서 '진짜' 부자는 또다시 한 줌으로 줄어드는 데. 어떻게 서울시 개표 결과와 서울시 부집중도 지수 두 개의 그림 사이에 한눈에 찾아볼 수 있는 유사성이 나타내게 된 걸까?


다른 부분도 한 번씩 훑어볼 만 하지만 쭉 넘겨서 4. 한국 부자의 부의 생애라는 챕터로 이동해 보자. 개인적으로는 목차를 봤을 때부터 가장 궁금했던 '부의 원천'이라는 내용이 기다리고 있다. 이 파트에서 한국의 부자들은 자신이 부자가 된 비법을 소개한다.




1. 사업소득 - 2. 부동산 투자 - 3. 상속*증여 - 4. 근로소득 - 5. 금융투자



시사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해도 뜨지 않은 이 추운 날 힘겹게 눈을 떠서 출근을 하고, 하루 종일 (초)고자산가의 부를 축적해 주기 위해 내 모든 시간을 쓰고, 해가 다 진 후에야 겨우 퇴근하는 노동자의 삶을 사는 보통의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뜻이다. 


파견 도급 규제의 관리감독이 흐릿해지고, 주휴수당이 폐지되고, 52시간제를 1주가 아니라 3개월 단위로 계산할 것을 연장하는 권고문이 당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지, 안 주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당신의 노동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당신의 작업 복장이 어떤 색이든. 대한민국에서 근로소득으로 사는 노동자 4,553만 명(88%) 중에서 근로소득을 부의 원천으로 삼아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은 약 4만 9천 명(0.11%)에게만 주어진다. 수능은 상위 누적 백분위 4%에 들면 1등급을 받는다. 그것도 힘들었는데, 0.11%? 이런 환경에서 과연 n잡 한다고 살림살이가 나아질까 싶다. 


이쯤 되면 다시 궁금해진다. '부자'는 뭘까? 죽을 때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데 '부'를 왜 쌓아야 할까? 왜 우리는 시간을 되돌려 부자가 되는 스토리에 열광할까? 부에 대한 선망은 자본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역사적인 흐름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부작용일까? 그렇다면 시간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었는데도 왜 성실한 노동의 가치는 성공신화가 아니라 어린이 동화에서만 보일까? 아래에서 더 아래로. 선을 긋고 칸을 나누고 무시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이들의 사례는 왜 점점 많아지는 것 같을까?




내가 생각하는 '부자'의 기준



마침 롯데월드로 현장학습을 가는 학교마다 매직패스에 대한 고충이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학교 측은 당연히 단체행동의 질서를 위해 롯데월드 티켓을 자유이용권 구매로만 제한했는데, 일부 가구는 단체 티켓도 구매하고 추가로 청소년 1일 자유이용권과 매직패스 프리미엄을 구매해서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그러자 현장학습 다음 날, 왜 매직패스를 살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하지 않았냐는 보호자의 전화가 학교로 쇄도했다고 한다.


원하는 놀이기구를 돈을 더 주고 별도의 대기라인을 이용해 빠르게 탑승하는 '매직패스 프리미엄'은 고전이 되어가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예시다. 기다린 순서대로 줄을 서서 공정하게 탑승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이지만, 돈을 주고 매직패스를 사면 당신은 얼마든지 당당하게 새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매직패스 이용자가 구매한 것은 공정한 질서에 따라 줄을 선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다. 하지만 매직패스 이용자가 지불한 돈은 모험과 신비의 나라의 곳간으로 들어간다. 자본주의는 원래 돈으로 시간을 사는 게 맞긴 한데, 줄에 서있는 동안 당신에게 시간을 팔아도 되겠냐고 물어본 적도 없고, 멋대로 팔아놓고서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매직패스는 자본주의에 입각한 영리 행위에도 못미치는, 서비스 제공자의 횡포인 셈이다. 


오로지 수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이 중심이 되어 만드는 문화가 대게 그렇다. 자본주의의 탈을 쓴 물질만능주의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그 과정도 제법 체계적이면서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보통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서비스 제공 주체를 인식하는 데 혼란을 겪으면서 그 시스템에 스며들게 된다. '솔직히 여유 있으면 매직패스 그거 그냥 사고 말지.' 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매직패스로 당당히 새치기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또 얼마나 자연스럽고 신이 나 있는지. 하루 종일 줄만 선 아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전 기다리는 시간의 낭만과 재미, 추억을 모두 빼앗겼다. 그저 지루하기만 한 시간을 보냈으니까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매직패스 사야지'라고 생각하게 될 수 밖에. 지인이 최근 지하철에서 초등학교 3학년 아이 둘이 문제집을 풀다가 '야, 너 이거 못 풀면 올백 못 받아. 그러면 삼성 못 들어가.'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했는데. 번듯한 대감집의 노예가 되는 게 최고의 훈장인 것처럼 들리는 아이의 말은 어쩌면 꿈과 희망이 모두 사라진 놀이공원에서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과연 매직패스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학교 현장학습에서도 매직패스를 꼭 사줘야 했던 사람들은 모두 부자였던 걸까? 아니라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만약 그들이 초고자산가라고 하면, 이게 옳은 행동일까? 


나는 부자의 기준을 '자발적 탈선'에 두고 싶다.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을 경제적 자유라고 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제시하고 많은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을 '안' 하는 시점이 자본주의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어낸, '부자가 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놀이공원에서는 매직패스를 턱턱 사고, 기후위기로 식량문제가 심각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식을 하고, 전용기까진 아니어도 연비 안 좋은 외제차를 탈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자산을 형성한 순간이 오더라도 이 모든 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려면 어쨌든 돈을 조금 더 벌고 훨씬 더 많이 모으긴 해야 한다. 노동만으로는 답이 없다고 하니 다른 방법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긴 해야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자가 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차원이 다른 서비스를 떠올리는 것이다. 예로 에버랜드에서는 이제 가장 인기 있는 티익스프레스를 타기 위해 현장에서 줄을 서지 않는다. 이미 모바일 원격 줄 서기로 모두 대체되었다. 여기서도 정보의 격차는 발생하겠지만 어쨌든 명확한 새치기 과정을 보지 않아도 되고,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에버랜드의 다른 컨텐츠를 즐기면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런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답을 찾을 수 있기를. 







이 보고서는 금융자산 10억이라는 기준으로 '부자'를 설정했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부자'와 보고서의 '통계'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보고서의 기준으로는 가치 평가가 아쉽게 되었으나, 분명 '노동'은 다른 기준을 적용할 때 가치와 의미가 있는 행동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 목표가 모두 돈인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88%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배척할 필요도 없지만 불필요한 패배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존재 화이팅.


매거진의 이전글 1. 여행의 기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