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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지 May 19. 2020

파도의 생각

3. 시간의 무게


누구나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루가 너무 짧다는 푸념. 어쩌면 당신도 나이테가 쌓이는 만큼 자주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달이, 일 년이 너무 짧다는 소리. 누가 그런 말을 주로 하는가? 왜 그렇게 말하는가?


어렸을 때 난 이게 꽤 궁금했다. 어른들은 뭐가 문제지? 정말로 그들에겐 시간이 빠르게 흐르나? 흔한 고민 하나 없이 보낸 하루가 나에겐 너무 길고 꽉 차있어서 도저히 그 문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너무 짧다는 말이 단순히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면 너무 이상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게 되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체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는 상대성 이론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다. 멋진 삽화들로 호평을 받는 이 책은 상대성이론의 배경인 ‘내가 생각하는 1초와 당신이 생각하는 1초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과 그림)을 통해 멋지게 증명한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정말로 초침의 움직임이 절대적이지 않다면, 시간의 흐름마저 늘려버릴 정도의 ‘빠름’은 무엇인가? 나는 놀이공원에서, 워터파크에서, 할머니네 비닐하우스에서 엄마보다, 아빠보다, 할머니보다 엄청나게 빠르기라도 했던 걸까?  



속력은 단위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를 말한다. 속도에는 방향이 포함되어 일정 시간 동안 얼마나 멀리 갔는지를 의미하게 된다. 중학생의 활동량이 아무리 좋아봤자, 우주 단위에 빛의 속도로 입증한 내용만큼 빠를 순 없는 법이다. 엄청나게 커다란 시야로 볼 때 할머니와 나의 이동거리는 고만고만한 게 분명했다. 단순히 속도로 생각하지 말고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을 가져와야 했다.


뉴턴의 제2법칙은 가속도를 설명한다. F=ma. 물체의 질량이 같을 때는 힘의 크기가 클수록 가속도가 증가하고, 같은 크기의 힘이 작용할 때는 질량이 작을수록 물체의 가속도가 크다는 내용이다. 하루하루 새롭고 즐거웠던 여름방학이 나에게는 아주 긴 기간이었지만 어른들에겐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이었다면 내 질량이 엄청나게 가볍다는 뜻인가? 은하 수준으로 차이가 난다고? 흠. 그럴 리가 없다.


시간을 늘려버릴 정도의 질량. 질량을 측정해야 하는 대상을 바꾸면 어떨까? 인간은 결국 비슷한 구성의 유기체다. 어른과 아이의 근본 물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노인과 아가를 구분 짓는 가장 명확한 특징이 하나 있다.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긴 세월을 보냈느냐 아니냐. 그리고 세월은 시간의 중첩이라고 볼 수 있다.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아무리 종잇장처럼 얇은 것이라도 층층 쌓아 올리면 점차 형체가 생기고 예상보다 무거워지곤 한다.



이렇게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해 혼자 만든 개념이 ‘시간의 무게’이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온 삶의 길이와 방식으로 인해 서로 다른 시간의 무게를 지니게 된 거다. 갓난아기는 이렇다 할 시간을 겪지 못했으니 아이가 가진 시간의 무게는 한 없이 가벼울 테다. 그러면 엄청난 가속도를 가지고 있어 누구보다 더어어어어어 느리게 1초를 지내는 게 아닐까? 반면 할머니는 수확한 고추만 몇만 개는 될 텐데. 그 시간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는가. 자연히 느릿느릿한 속도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할머니에게 새로운 시간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나중에 더 커서 생물학을 전공하게 되니 ‘시간의 무게’라는 나의 생각이 완전히 그른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뇌는 도파민 활성에 따라 시간 감각에 대한 인지가 달라지는데, 도파민은 어린아이처럼 새롭고 흥미로운 게 많을 때 많은 양이 나온다. 게다가 기억이라는 것 또한 자극이 강할수록, 새로울수록 슬로모션처럼 공 들여 저장한다. 결국 어린 시절에 쌓이는 기억의 양이 많고, 그러니 어린 시절이 무척 길게 느껴지고, 반대로 반복되는 현재의 일상은 기억할 내용마저 적으니 더욱 짧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의 무게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는 건, 새로운 정보와 자극 없이 무뎌져서 잊히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슬픈 사실인 셈이다.


사라지는 내 시간들을 붙잡고 늘려서 온전히 기억하고 싶다.

내 시간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나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 됐다. 낯선 곳, 낯선 시간, 낯선 문화 속에서 나는 어린아이 같아 진다. 모든 것이 새롭게 들어오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여행지에서 내 시간의 무게는 한 없이 가벼워진다. 자연히 시간도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흐른다. 즐거움, 재미, 감동, 슬픔, 상처, 모든 감정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오래 머무른다. 그렇게 기대와 전혀 다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도,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그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됐다.


물론 이제는 안다. 이 마음으로 여행뿐 아니라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대해야 함을.


모두가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가벼운 시간의 무게를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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