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학교는> 리뷰
*이 글은 원작 웹툰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만을 감상하고 작성하는 글임을 밝힙니다.
1.
본격적인 리뷰 전, 최근 공개됐던 넷플릭스 콘텐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먼저 정리해보려 한다. 근 1년간 이슈가 됐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보면, 기존의 극장 개봉 영화, 방송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의 콘텐츠가 많다. <오징어 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 등의 드라마는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를?’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참신하고 화려한 연출, 거침없는 전개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기존의 틀을 깨는 다채로운 창작물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넷플릭스의 다양한 콘텐츠 발굴은 소비자로서 기쁜 일이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사실적이어야 할까?’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부분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다. 묘사의 대상이 ‘폭력’이 될 때 그렇다. 작품 중간중간 등장하는 적나라한 폭력 묘사, 특히 약자에 대한 강자의 일방적 폭압은 때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어떠한 사회적 메시지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연출이 아닌 오로지 ‘보여주기 위한 폭력’으로써 연출된 화면을 보고 있자면 마치 내가 폭력의 현장을 관음하는 듯한 불쾌감이 들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적 폭력을 불필요하게 삽입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현실일지도 모르는 일들을 ‘긴장감 고조’나 ‘공포감 조성’을 위해 지나칠 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면 사회적 약자의 불행을 재미로 소비하는 것 같은 찝찝함이 몰려온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창작의 자유를 명목으로 구조적 폭력이나 사회적 문제를 소품화해도 좋은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개인이 개인을 해하는 폭력은 19세 연령제한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의 현실을 이야기 전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만약 괜찮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괜찮고, 아니라면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괜찮지 않은가? 모든 창작물과 창작자에 해당되는 질문이지만, 그 영향력이 크다면 더 진지하게 이 물음을 던지고 싶다.
2.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도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드라마가 미성년자 미혼모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드라마 초반, 식은땀을 흘리며 조퇴하는 여학생 한 명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 학생의 행적을 상당히 공들여 뒤쫓는다. 비틀대며 길을 걷는 학생의 다리를 타고 양수와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 공중화장실에서 홀로 고통스럽게 아이를 출산하고 뒤처리를 하는 현장까지 빈틈없이 잡아낸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화장실에 아이를 버리고 나온 학생의 모습과 ‘내 아이가 죽는 걸 내버려 둘 수 있느냐,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다’는 과학 선생의 대사가 교차한다. 대사가 예고했듯 학생은 좀비 출몰을 목격하고는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아이를 안고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치던 중 주인공 ‘청산’이 걱정돼 학교로 향하던 청산의 엄마와 부딪힌다.
과학 선생의 대사와 청산이 엄마와의 조우, 학생이 최종적으로 ‘우연히’ 도착한 곳이 ‘청산치킨’이라는 점,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어린 미혼모의 등장 이유는 오로지 ‘모성의 강조’다. 그렇다면 부수적 인물을 등장시켜야 할 만큼 모성애가 이 작품의 전개에 중요한 가치였는가? 그리고 그 인물은 반드시 미성년자 미혼모여야 했는가? 둘 모두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작가가 굳이 모성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청산이 엄마의 무모한 여정만으로 충분했다. 출산한 아이마저도 후에 등장하는 형사의 정의감을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만 사용됐다는 점에서, 미성년자 미혼모의 등장이 필연적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학교폭력도 다르지 않다. 학교폭력을 대주제로 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이 역시 어떠한 메시지나 위로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첫 장면부터 학교폭력 피해 현장을 적나라하게 담아냈음에도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은 없었다. 만약 작가가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면, 최소한 이야기를 이끌어갈 ‘귀남’과의 갈등 당사자는 청산이 아닌 피해자 ‘은지’여야 했다.
드라마가 끝으로 갈수록, 학교폭력은 ‘악을 해치우고 친구들과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는 영웅’ 청산을 더욱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절비’가 된 가해자 귀남은 혼란 속 절대자가 되어 청산 무리를 위기로 몰아넣고, 그럴수록 청산의 정의감은 더 빛난다. 그리고 응징할 대상을 청산에게 빼앗긴 은지는 비참하게도 또 다른 학교폭력 피해자를 향해 화살을 겨눈다. 귀남과 싸우다 함께 전사한 청산에게는 영웅이라는 칭호가 남았지만, 다른 피해자를 물어뜯고 은지가 만난 현실은 ‘군의 좀비 관찰샘플’이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채 홀로 임신과 출산의 무게를 짊어져야 했던 여학생과, 학교폭력 피해자임과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인 은지의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드라마 곳곳에 숨어있는 다른 조연들과 달리 이들이 눈에 띄는 이유다. 무거운 현실을 담겠다고 결심했다면 적어도 가볍게 쓰고 버리는 방식을 취해서는 안됐다. 타인의 고통을 사소함으로 전락시킬 전능함은 그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