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여성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주입된 욕망
초등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한 살 터울인 남동생과 거의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다녔었다. 거기에 시력이 안 좋아 낀 안경은 기능에만 충실해 별로 세련되지 못한 디자인이었다. 더불어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뒤, 넘치는 잔머리를 수습하기 위해 무늬나 장식이 따로 없는 단색의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냉정하게 말해 예쁜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른이 되면 꾸미고 다니겠다는 마음이 어렴풋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당시에는 무조건 편한 것이 좋았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가능한 편하게 다녔다. 미성년자가 화장을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으므로 당연히 평상시에 화장을 하는 일 따위 없었다. 덕분에 학창 시절 나의 외적 변화라곤 앞머리를 내렸다가 없애기를 반복하는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십 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쯤부터 이런저런 외모 평가에서 더는 자유로울 수 없어졌고,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상적인 여성의 외모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 역시 강하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결과 대학교 졸업반쯤이 되었을 때 나의 자기혐오와 외모 콤플렉스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한때는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던 엘리자베스는 50대에 접어들고부터는 간신히 에어로빅 방송이나마 진행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나마도 다가온 생일날, 그는 자신이 곧 방송에서 잘려 더 젊고 예쁜 여자에게 대체될 거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운전해서 귀가하던 도중 옥외 광고 판에 붙어 있던 자신의 사진이 뜯겨 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이 팔린 사이 다가오던 트럭에 치여 사고를 당한다.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엘리자베스는 깊은 우울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러다 잠시 의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남자 간호사가 다가와 추가 검사를 해보겠다며 그의 척추 뼈 부분을 더듬는다.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으로 나온 엘리자베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서브스턴스’라는 글귀와 전화번호가 적힌 USB 하나를 발견하고, 결국 저장된 파일을 실행시키자 더 젊고 아름다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멘트의 수상쩍은 영상이 재생된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해하며 USB를 버리지만, 다음 날 신문에 자신의 방송을 이어갈, 30세 이하의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소식을 발견하고는 결국 USB를 다시 찾아내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마침내 수수께끼 같은 업체에서 배송받은 물질을 투약하고 얼마 뒤, 젊고 아름다운 수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가르고 태어난다. 이제 하나이자 둘이 된 그가 지켜야 할 조건은 단 한 가지. 원래의 몸과 새로운 몸을 각 일주일 씩 번갈아 가며 사용할 것.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수의 몸으로 지낼 때마다 되살아나는 과거의 영광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이라는 균형은 서서히 무너진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감독 혼자만 의도를 알고 관객에게 소외감을 주는 불친절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 초반부터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연출 역시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극 중 엘리자베스는 한때 많은 이들에게 아름답다고, 사랑한다고 찬양받던 성공한 배우였다. 그러나 이제 젊은 시절의 생기를 잃은 중년의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임에도 마음껏 늙고 추해진 나이 든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외모 평가를 받고, 화려했던 과거를 곱씹기를 반복하며 점점 자존감이 낮아진다.
엘리자베스가 한때 잘 나가던 스타였던 만큼 그 중압감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일반 여성들 역시 남성중심적 시선 아래 재단되고 평가받는 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남성들은 본능이라는 손쉬운 핑계를 방패 삼아 더 예쁘고, 더 어리고, 더 날씬한 여성에 대한 그들의 선호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이 정말 남성들의 선천적 본능에만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인간보다 더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암컷이 외모가 화려하고 신체적으로 건강한 수컷을 선택하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사실 동물 암컷들까지 갈 것도 없다. 인간 여성들이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남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모습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따지자면 더 젊고 아름다운 상대에 대한 선호는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독 남성이 더 노골적으로 이런 취향을 드러내고, 타협의 여지도 더 적은 것은 이러한 선호가 단순히 본능이 아닌 사회문화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여자가 예쁘면 고시 3관왕이라는 말을 농담 삼아 흘려대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의 나이와 외모가 동일한 기준에서 평가될 리 만무하다. 이러한 말들이 실제로 옳고 그른지는 둘째 문제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마치 유통기한이 있는 물건 취급 하는 말들을 일상적으로 듣다 보면, 결국 여성 스스로도 그러한 가치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진정한 문제이다. 이런 남성 중심적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미디어의 영향은 여성들의 내면화를 더욱 강화하고 가속화시킨다.
이러한 와중에 남자는 외모보단 능력이라거나, 남자 나이는 와인이라는 말들로 남성의 외모나 나이를 따지는 일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상황에서 여성은 오직 자기 자신의 외면에만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사회적 미적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인에 가까운 여성조차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다거나, 이미 충분히 매력적임에도 성형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나마도 성형을 한 이후에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떻게 보면 정신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외모 강박은 분명 여성 쪽에 압도적으로 흔하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여성의 타고난 본능이라거나, 여성 개인의 낮은 자존감 때문이라고 치부한다면 너무나 게으르고 남성들에게만 편리한 해석이다. 이러한 욕망을 누가 어떻게 주입한 것인지, 여성들이 단체로 아름다워지고자 애썼을 때 이익을 보는 집단이 누구인지 냉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영화 ‘서브스턴스’의 감독 코랄리 파르자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곧 바디 호러라고. 아마 대부분의 남성들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를 거치지 못한 소수의 여성들에겐 와닿지 않는 말일 테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너무나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메시지이다. 칭찬이든 모욕이든 여성의 외모에 대해 한마디 말이라도 보태지 않으면 못 견디는 무례한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며,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팔아 대는, 다양한 모습과 연령대의 다수의 남성들 사이에 젊고 아름다운 소수의 여성만이 존재하는 이미지에 익숙해지다 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으로서 외모와 젊음에 대해 의식하고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공기처럼 깔려 있는 남성중심적 시각이 과연 언제쯤 사라질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영화‘서브스턴스’가 여성들로 하여금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외모에 대한 강박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임은 장담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