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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you
Jan 27. 2022
내가 어쩌다 지금 502호에 살고 있냐면.. 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나를 구성하고 있는 DNA가 결합되고, 옆에 4개의 생명체와 엄마 뱃속에서 꼼지락 거리면서 지냈지.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득하게 깜깜하고 벚꽃 필 무렵 오후 2시처럼 따뜻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라는 것이 들리기 시작했지. 그런데 그 소리란 것이 너무 따가웠어. 오전엔 그나마 조용했지만, 오후 들어서부터 밤새도록 높고, 낮고, 가늘고, 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야 했지. 우리말을 모르는 사피엔스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괴로운 소리였을 거야. 내가 있는 따뜻한 공간과는 이질적인 경험이었지. 그렇게 우리 다섯 남매는 조금씩 커갔고, 엄마의 호르몬에도 변화가 생겼어. 62일이 지났을 때 엄마 자궁이 열리기 시작했어, 5명 중 가장 덩치 크고 힘센 친구가 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는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꿈지럭꿈지럭 밀고 나아갔지. 그렇게 하나둘 세상으로 나가고 나는 맨 마지막으로 나왔어. 따뜻한 공간이 좋기도 했고, 친구들보다 먼저 나갈 힘도 없었거든. 그렇게 힘들게 나온 세상이란 곳은..
Oh, My Goodness!!
맙소사, 이게 무슨 냄새지!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이 소리들은 뭐지!! 이 많은 동족들은 왜 철창 안에 있는 거지!!! 5평 남짓 될 만한 공간에 철제 상자들이 3층으로 쌓여있고, 1칸에 동족들이 10명이나 다닥다닥 붙어 있었어. 화장실도 제대로 없어서 바닥에 깔린 신문지 위에 딱딱하고, 흘러내린 배설물들이 가득하고 그 사이사이엔 게워낸 토사물들이 채워져 있었어. 그리고, 한쪽 구석엔 움직이지 못하는 동족들도 있었지. 내 후각세포는 6500만 개 정도 되는데, 사피엔스보다 적게는 6배 많게는 35배까지 냄새를 잘 맡을 수 있지. 코와 귀로 바늘들이 뭉텅이로 들어오는 것 같았어. 어쩔 수 없이 울 수밖에 없더군. 춥고 괴로웠어.
두 달쯤 지난 뒤부터 내 형제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어. 사라지기 전날 사피엔스는 우리를 처음으로 씻겼어. 그렇게 사라지면 사피엔스에게서 ‘띵동’ 소리가 울렸고, ‘80만 원 입금’이라는 텍스트가 수신됐지.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이 불편했거든 그래서 목욕을 해본 적이 없어.
이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8개월은 넘었고 11개월은 되지 않은 어느 날. 밖에 자물쇠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어. 평소에 열쇠로 여는 소리와 다르게 짧고 굵은 '뚝'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 그날 처음으로 문밖 세상을 봤네. 우리를 이곳에 감금한 사피엔스는 아주 재빠르게 문을 여닫고 사라졌거든. 오래도록 열려 있는 문으로 참수리 마크를 달았거나, 형광 조끼를 입은 사피엔스들이 우르르 들어왔어.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지.
작은 가방에 담겨서 이동이 시작됐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바늘 같은 냄새와 소리들로부터 해방되어 좋았어. 도착한 보호시설에선 처음으로 화장실이란 걸 사용해 보았지. 내가 내 배설물을 안 봐도 된다는 건 나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어. 없는 모래를 모으기 위해 신문지 위에서 헛발질했던 내 모습은 비밀. 밥과 물도 이걸 먹어도 되는 건지 고민 안 하고 먹을 수 있었어. 하얀 가운을 입은 사피엔스들이 나랑, 엄마 상태를 살폈고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곤 중성화 수술을 받았지. 그리고 플라스틱 목도리 보호막을 떼고 나선 사진을 찍었어.
그리고,
상암동 지하상가에서 밥을 먹고 나오던 언니 둘에게 사진이 발견되었지. 엄마나 나나 절세미녀라 아마 눈을 떼기가 힘들었을 거야. 사인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큰언니와 집사 녀석의 짧고, 긴 논의가 이뤄졌고, 어차피 시키는 대로 사는 형편의 집사는 결국 우리와 면담을 하러 오게 됐지. 우리를 직접 봤는데 사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집사들이란 원래 그렇거든. 그렇게 우리와 건강하게 공존하겠다는 사인을 하고 엄마와 나는 새 가방에 각각 들어갔어. 1907호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거지. 둘째 언니에 대해선 첫인상 등등할 얘기가 많은데 너무너무 많아서 다음에.. 냐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