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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31. 2022
4화. 블랙&화이트
우리 집 4족 보행인은 3명인데. 털의 종류는 수십 명, 다양한 털들이 굴러다녀. 엄마랑 나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라 잘 눈에 띄지는 않아. 브러쉬로 빗질을 해야 빗 사이에 갈색, 검은색 각 7:3 정도 비율로 뭉친 헤어를 볼 수 있지. 막내는 흰색 롱헤어에, 갈색 브릿지가 일부 섞어있어. 아직 어려선지 장발을 선호해. 자기 몸의 20%도 그루밍을 하지 못하는데, 그래도 큰 체격과 장발을 유지하네. 나는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 집에 살지는 않지만, 검은색, 흰색, 회색, 브라운 털들과 이 네 가지 색이 각각의 비율로 섞인 짧고, 긴 헤어가 곳곳에 굴러다녀. 지리산 밑 구례 편의점에서 집사에게 쥐포를 얻어먹던 동네 아이들 헤어도 있고, 강화도에서 보자마자 바짓가랑이에 머리를 비비던 블랙 헤어. 양주 '글 밤'에서 묻어온 '조이'를 비롯한 5명의 컬러풀한 털. 도쿄 베이비와 제이의 회색 헤어. 턱시도를 입은 양반달의 블랙 헤어. 신정동 트럭 밑 우유를 나눠먹던 아깽이의 화이트 브라운. 강원도 고사리 펜션 대가족 11가지 헤어. 그리고 양재천 옆에서 집과 공원을 맘대로 드나드는 자유로운 영혼 '바닐라'의 다크 그레이. 상암동에서 참치 캔 세례를 받던 3명의 어린이. 또, 또, 철 지난 이불을 꺼내거나, 안 입던 옷을 꺼내면 내가 모르는 헤어는 계속 쏟아져. 너무 많아 더 세기 힘들다. 하앍.
그중에 가장 많은 건 ‘라이트 블랙&화이트’ 비교적 짧은 헤어야. 큼큼 냄새를 맡아보니, 미국에서 건너온 동족이네. 한국에 건너와서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고, 덕분에 좀 더 샤프한 턱선을 갖게 된, 고조할머니뻘쯤 되는 분이야. 사실 이분이 큰언니 동거 프로젝트의 첫 결과라고 할 수 있지. 계획이라고 하기엔 우연이 너무 많지만.
사피엔스들은 동거를 시작하면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선물을 건네. 우리가 바라는 츄르나 말린 생선살이나, 캣닢은 아니고 청소기, 세제, 휴지, 와인잔 등등 뭐 종류가 많아. 여럿이 모아서 텔레비전이나 세탁기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더군. 저 돈이면 방한칸에 츄르를 가득 채울 수 있을 텐데. 쩝.
아무튼, 동거 전에 집사와 이틀에 한 번은 4족 보행하던 친구가 선물로 ‘Felis catus’가 어떨까 생각을 한 거야. 큰언니와 계획을 공유한 것도 아닌데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세상의 모든 기운이 큰언니에게로 향한 걸까. 큰언니는 어금니를 깨물며 웃음을 참았고, 집사는 선택권이 없었지. 일산의 한 방송국 옆에 있는 깨끗한 윈도 너머에서 딩굴딩굴하던 '라이트 블랙&화이트 헤어'를 친구가 발견했고, 창문 너머로 보던 집사는 큰언니와 구멍 뚫린 가방을 사러 갔어. 흰 양말파에, 새하얀 목도리를 한 친구였거든. 저항할 수 없었을 거야.
4족 보행 집사 친구는 꽤 머리가 좋은 사피엔스거든. ‘Aesthetics’이라는 아름다운 공부를 했고, 베를린영화제에서 레드카펫을 밟고 상도 받았어. 반짝이는 머리를 좀 더 양질의 알코올을 섭취하기 위해 사용한 거지. 사피엔스들은 보통 동거가 시작되면 시, 공간의 제약을 많이 받거든. 그 제약을 ‘라이트 블랙&화이트 헤어’가 풀어주길 바랐던 거야. 물론, 계획은 아주 성공적이었지. 집사는 동거 몇 개월 만에 서열 공동 1위에서 꼴등으로 단번에 내려앉았거든.
몰디브에서 세워진 큰언니의 계획과, Y감독의 아이디어로 1405호에서 동거가 드디어 시작되었어. 집사는 친구와 4족 보행을 이어갔지만 하앍질을 해댈 생명이 하나 더 늘었다는 건 그땐 몰랐을 거야. 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