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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Jan 13. 2022

설강화 변호, 또는 비판하기

JTBC 드라마 <설강화: snowdrop> 를 둘러싼 논란들에 대해

 솔직히 말해서 이 드라마를 소재로 이렇게 글을 적고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조금 부담이다. 평소 나를 잘 알던 사람이라면 '이런 걸 본다고?' 하면서 의아해하고, 더 나아가서 분노 섞인 반응을 보일 수 있겠다. 게다가 어느 정도는 옹호하는 걸로 비칠 수 있을 듯한 논조이기도 하니까. 어찌 되었든,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우리는 각자의 의견을 솔직하게 개지 할 자유가 있잖아? 물론 당연히 그에 따른 비판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일 거다.


 약 한 달 전쯤, JTBC의 드라마 <설강화: snowdrop>가 방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온라인 상에서 격렬한 논란이 일었다. 비판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의 요지는, 이 드라마가 민주화운동 간첩 개입설을 소재로 해 5.18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왜곡하고 안기부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극우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드라마라는 것이었다. 방영 전 공개된 시놉시스와 인물 소개 등을 바탕으로 논란이 확산됐고 사실 나 또한 당연히 그런 우려를 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비판하더라도 직접 보고 나서 비판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었기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이 드라마를 직접 보기로 결정했다.

 영상물에서 소재를 다루는 태도를 보기 위해서는, 카메라가 견지하고 있는 시선에 주목해야 한다. 이건 단편적인 이야기의 플롯이나 시놉시스에는 담기지 않는 요소임에 동시에,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매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캡처 사진들, 텍스트로 이루어진 시놉시스 만으로는 영상매체를 제대로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나도 직접 보기로 했던 거고.


 어쨌든 이 드라마는 이상했다. 분명히 안기부라는 조직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이건 당시 군부 정권 또한 마찬가지였다. 1화 방영 후 가장 극심한 논란이 일어난 부분은 북한 간첩인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가 민주화 운동 시위 현장을 지나쳐 도망치는 시퀀스였다. 이 장면에서 배경 음악으로 민중가요인 <솔아 솔아 푸른 솔아>가 사용되었고, 민주화 운동을 폄훼한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 시퀀스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시위를 탄압하는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시위대가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장면이 상세히 묘사됐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런 강압적인 폭력에 쫓겨 도망치는 희생양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주인공이 도망치게 된 계기는 안기부 요원들이 차를 들이받아서 고의로 자동차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안기부라는 조직은 정의로운 조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불법적인 수단을 마다하지 않으며, 권력에 복종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탄압하고 폭력과 불합리로 얼룩진 꽉 막힌 조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1, 2화 방영 후에도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다음 주는 3~5화가 방영되었다. JTBC에서는 5화에 극 중 중요한 반전이 포함돼있다며, 여기까지 보고 나면 오해가 풀릴 거라고 항변했다. 실제로 5화는 이 드라마에서의 주요 변곡점이었다. 단순한 간첩과 대학생의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간첩이 기숙사에 들어와 대학생들을 인질로 잡고 벌이는 가상의 정치 시대극으로 변모했다. 실제 북한 간첩들이 국내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기점으로 드라마는 완전한 가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픽션 시대극이 된다.

 그 이후의 전개는 생각보다 흥미진진했고, 장르적인 재미는 확실히 있었다. 인질극이 끝나고 어떻게 전개되려나 했지만, 아마도 드라마는 기숙사에서의 인질극이 주요 소재이고, 이 이야기를 결말까지 끌고 갈 걸로 예상된다. 이전까지는 주요 플롯에서 겉돌던 안기부장과 군부정권의 정치인들, 그리고 북한 수뇌부들, 안기부 요원들이 이야기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면서 드라마의 태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드라마는 이들을 한심하고 무능하며 이기적인 집단으로 묘사하고, 시종일관 조롱하고 있다. JTBC가 이 드라마의 장르를 '블랙 코미디'라고 말했던 것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방영 전 '대쪽 같은 안기부 요원'이라는 등장인물 소개의 문구가 큰 논란이 되었다. 안기부는 당시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간첩으로 몰며 고문하고 죽이고 폭력적으로 시민들을 억압하던 조직인데, 그 안에 '대쪽 같은' 국가에 충성하고 성실한 가상의 요원을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당시 폭력에 희생당했던 피해자들과 그 주변인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요지였다. 당연히 나도 이 말의 논조에는 동의했지만, 그런 등장인물이 결국 당시 조직의 불합리와 폭력성을 대비시켜, 강조하는 수단으로써 사용된다면 이 정도는 허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물론 이건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9화에서, 북한 간첩 임수호는 안기부 요원 이강무(장승조 분)에게 "억울한 사람들 간첩으로 몰아다가 죽이고 국민들 폭력으로 억압하던 조직에서 월급 받아 처먹던 놈이 정의롭다는 듯이 말하지 말라"며 일갈하고, 이강무 또한 수긍하며 침묵한다. 뭐 이 장면 하나만으로 이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심을 지울 수는 없겠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의도 자체가 불순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렇다고 방영 전에 우려하던 사람들, 방영 초반 비판하던 사람들의 우려가 터무니없는 억측이었고, 불합리한 비난이기만 했냐면 그건 아니다. 이 드라마의 시놉시스는 불순하게 읽힐 여지가 다분했다. 여주인공의 이름은 원래 '은영초'였고, 민주화 운동에 종사했던 실존 인물의 이름이 노골적으로 연상된다는 비난에 직면해 결국 '은영로'로 이름을 수정했다. 5.18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며, 운동권 학생과 북한 간첩의 로맨스가 아니라고 했지만, 학생운동 시절을 배경으로 한 것부터가 충분히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역시나 한심하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교적 합리적이고 비폭력적으로 그려지는 안기부의 최고 권력 은창수(허준호 분)-이런 인물이 안기부장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에게서 실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던 범죄자를 연상할 수 있는 요소가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북한 간첩인 주인공 임수호는 '독일 유학생' 출신으로, 이는 동백림 사건을 노골적으로 연상시키는 설정이었다.

 그냥,  드라마의 작가는 ' 생각이 없었던 '.  시대와 소재를 다룰  조심해야  부분에 대해 전혀 고려를 하지 않았고, 단순히 주제를 부각하기 위한 소재, 재미와 흥미를 위한 도구로 썼을 뿐인 거다. <사랑의 불시착> 넷플릭스에서 흥하자, 한국의 분단 현실을 소재로 사용한 로맨스가 국내와  세계 시청자들에게 애절하게 다가온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현대를 배경으로 분단 로맨스를 기엔 미묘하니,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가능하고 흥미로운 소재가 많은 민주화 운동 시절 과거로 시곗바늘을 되감은 거다. 여기에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종이의 >처럼 인질극 플롯을 끼워 넣어도 재밌겠다 생각했을 거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드라마가 바로 <설강화: snowdrop> 거다.

 그러니 동백림 사건을 모티프로 베를린 소재 대학 유학생 북한 간첩이라는 설정을 짜면서도 실제 피해자들을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히 유명한 여성 민주화 운동가라는 것만으로 주인공 이름을 비슷하게 설정하면서 실존인물에게 향할 화살은 고려하지 않았으며, 민주화 운동 시기와 안기부를 주요 소재로 삼으면서 당시 안기부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리고 고문받고 죽어갔던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과 그 유가족들을 생각지 않은 거다. 왜냐면,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우리의 '의도는 선하니까'. 그런데, 아니다.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고 해도, 그게 헛소리를 일삼고 사실을 왜곡하는 무리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여지가 있다면, 그건 안일하게 만들어진 거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니까 지금 "너네가 오해한 거다"라며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JTBC와 드라마 관계자들을 동정할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당연히 중요하다. 나 또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며 이 드라마는 방영되면 안 된다고, 애초에 제작되었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지는 못하겠다. 창작물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소재로 할 때는, 심지어 그게 불과 몇십 년 전이고 당사자들이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면, 당사자들과 당대 시대와 지금의 사회에 대한 고려와 조심스러운 접근은 당연히 필요하다. 2022년 지금도 5.18 민주화 운동은 북한이 개입해서 벌인 공작이며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동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같지도 않은 족속들이 넘쳐흐르고 있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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