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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May 23. 2022

잘 있었니? 잘 지내니?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를 읽고

 나는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를 몰랐다. 작년에 지인 분이 이 영화가 재개봉했다며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고 추천해 주셨었는데, 나는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처음 접하는 영화였다. 그만큼 내 영화 식견이 짧다는 얘기일지도? 어쨌든 고양이를 좋아하는 평범한 한국인 1로서 이 제목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다음 날 오전 상영이 있었고, 극장 할인 쿠폰이 있었다. 바로 예매해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이런 영화를 몰랐다니?'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정말 애정하는 세기말 한국 영화 중 하나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비슷할 정도의 감흥을 느꼈다. 20세기가 마무리되고 2000년대가 새로 시작하는 그 오묘한 혼란스러움, 인천의 도회적이면서도 오랜 향수가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 학창 시절을 그리워하는 청춘들의 이야기, 귀여운 고양이. 궁합이 잘 안 맞을 것 같은 이런 요소들을 맛깔나게 버무린 독특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난 그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동창들과 연락해 만날 약속을 잡았다. 아마도 나 말고도 많은 관객들이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고양이를 부탁해> 관련된 서적을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플레인 아카이브의 블루레이를 열정적으로 수집하는 콜렉터였다(친구들은 내가 맨날 인스타에 블루레이 사진만 올린다고 나무란다). 이들이 발매하는 영화들은 선정 라인업 또한 훌륭했으며 화질, 음질은 두말할  없었다. 거기에다가 영화의 콘셉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아름다운 패키지 디자인은 관심 없던 영화마저 구매욕구를 불러일으켰고,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애정 어린 디자인이었다. 이런 회사에서 발간하는 책이니 당연히 책에도 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구매.

 사실 최근에 연구실 일이니 뭐니 바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얼마 전에서야 짬 내서 겨우 책을 펼칠 수 있었다. '20주년 아카이브'라는 제목답게, 이 책은 단순한 각본 또는 스틸컷의 수록과 감독의 인터뷰만 실은 수준이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인상이었다. 내가 각본을 따로 찾아서 읽어보는 편은 아니기에 각본만 수록한 책이었다면 아마도 구매를 고민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각본과 스토리보드에 더해서 학창 시절 영화를 이 영화를 접하고 어른이 된 2022년에 영화와 자신의 청춘 시절을 그리고 있는 누군가의 글, 이 영화를 보고 영화를 찍고자 결심했다는 영화감독, 당대 시대상과 인천의 향토를 담아낸 영화를 고찰하는 건축학 교수, IMF와 결부 지어 영화 속에 담긴 여성들을 이야기하는 여성학자,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배우, 그 외에도 많은 기고들까지 매우 다양한 내용들이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스틸컷과 함께 당시의 촬영 현장 이야기를 다룬 감독의 포토 코멘터리 또한 인상적이다.


 영화를 감상했을 적, OST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제목도 가수도 알지 못했고 딱히 찾아들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책에는 영화의 OST를 맡은 '모임 별'의 글과 영화 속 노래 <진정한후렌치후라이의시대는갔는가>, <2>의 가사가 수록되어 있었다. 유튜브에서 음악을 검색해 들으며 책을 마저 읽어 나갔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게 하는 노래였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이번에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을 꺼냈다.


"잘 있었니? 잘 지내니?"

 친구들은 무척 반가워하며 잘 지냈냐고, 당장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날인 지난 주말, 거의 4년 만에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먹고사는 이야기를, 연애 이야기를, 때로는 정치 얘기로 티격태격하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녀석들 그때랑 많이 변했구나 싶었다. 친구들은 너도 그때랑 참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친구들의 낯선 모습에 때로는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며, 영화 속 혜주와 지영의 관계가 떠오르기도 했다. 불과 몇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어도 학교에서 사회로 나아가고 그들의 관계가 많이 달라졌듯이, 우리들의 관계도 이전 같지 않은 거겠지.


 영화 속에서 고양이는 갑작스럽게 등장해 주인공 일행의 관계를 휘젓는다. 나에게도 이 영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와 내 학창 시절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억은 금세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되살리고 그 시절의 감정을 다시 느끼기 위해 사진을 찍어 순간을 '보존'하고 사진을 꺼내보며 추억을 되새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001년 10월에 <고양이를 부탁해>를 보고 다양한 감정을 느꼈을 관객들의 추억을 다시 꺼내올 수 있게 만드는 '아카이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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