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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Dec 30. 2022

2022년 영화 결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간략하게 영화 결산을 해보고자 한다. 기준은 다음과 같다.


올해의 영화 10편: 올해(2022-01-01~2022-12-31)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극장에서 개봉한 작품들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 10편을 선정. 순위 있음.

영화제 상영작: 올해 영화제에서 관람(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한 영화들 중 아직 수입/개봉되지 않았거나, 차후 개봉 예정인 작품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영화를 선정. 순위 있음.

취향저격 장르영화: 호러, 슬래셔, 판타지, 액션 등 장르를 중심으로 재밌게 감상했던 본인 취향의 영화들을 선정. 완성도와는 큰 연관이 없을 수도 있음. 순위 없음.

그 외 인상적이었던 영화들: 올해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극장에서 개봉했으나, 올해의 영화 10편엔 꼽히지 못했던 영화들 중 좋았던 영화들을 언급. 순위 없음.

번외) 올해의 TV 시리즈 10편: 국내에서 방영했거나, OTT 등의 플랫폼으로 감상할 수 있던 시리즈 중 올해 방영된 시리즈 중에 선정. 순위 있음.


올해의 영화 10편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극장 개봉한 작품 기준.


1. 헤어질 결심 (2022) - 박찬욱

2. 놉 (NOPE, 2022) - 조던 필

3. 엘비스 (Elvis, 2022) - 바즈 루어만

4. 썸머 필름을 타고 (サマーフィルムにのって, 2020) - 마츠모토 소우시

5. 탑건: 매버릭 (Top Gun: Maverick, 2022) - 조셉 코신스키

6. 본즈 앤 올 (Bones and All, 2022) - 루카 구아다니노

7. 애프터 양 (After Yang, 2021) - 코고나다

8.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2021) - 요아킴 트리에

9. 아마겟돈 타임 (Armageddon Time, 2022) - 제임스 그레이

10.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 다니엘 콴, 다니엘 샤이너트


<헤어질 결심> 첫눈에 바로 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고, 반년이 지난 지금도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결이 상당히 다르지만, 연출적인 세련됨은 더함과 동시에 자극적인 맛을 절제해 고전적인 느낌을 극대화한 고품격의 멜로 스릴러다. 9번이나 감상했지만 이 영화의 흠을 찾을 수 없었고, 볼 때마다 지루할 틈 없이 2시간 반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올해의 올타임 베스트를 꼽을 때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내 필력으로 이 영화를 논한다는 것은 영화에 실례인 것 같고, 이 감상을 표현할 만한 마땅한 어휘를 찾지 못했기에 <헤어질 결심>에 관해서는 글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박찬욱 감독, 박해일, 탕웨이 모두에게 인생의 역작이 될 작품.


<놉> 조던 필의 전작들을 모두 사랑하기에,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외계인 소재 SF 미스터리라기에 많은 기대를 안고 있었는데도 그 아득히 너머를 보여준 영화다. 단순한 외계 미스터리, 호러라는 장르적 재미와 서스펜스에도 매우 충실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분별한 미디어의 폭력과 스펙터클을 경계하는 태도, 자연과 생명과의 교감과 존중, 서부 장르에서 소외되었던 흑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써내려가는 서부극, 마지막으로 영화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되돌아보는 영화예술을 향한 애정까지, 촘촘하고 유기적이게 연결된 수많은 함의와 메타포들이 보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영화를 용산 IMAX에서 관람했던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황홀한 극장 경험이었다.


<엘비스> 국내에선 홍보 부족으로 개봉한 줄도 모르고 소리소문 없이 묻힌 비운의 영화. 바즈 루어만 감독의 전작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대 연극을 연상시키는 과할 정도로 현란하고 정신없는 연출과 편집이 종종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불꽃같이 타오르던 삶과 연출 스타일이 매우 적절하게 어우러져 영화만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또한 당시의 인종차별, 마틴 루터 킹 / 케네디 저격 사건 등의 사회적 이슈들과 버무린 적절한 각색을 통해, 시대를 풍미하는 저항의 아이콘이자 흑인 문화와의 융합을 추구했던 엘비스의 음악과 정체성에 대해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톰 행크스의 한 대 때려주고 싶게 만드는 훌륭한 악역 연기, 그 이상으로 순전히 분위기와 연기만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삶을 체현해내는 신들린 연기(단순 수사가 아니라 정말로 접신한 것만 같은 연기다)를 보여주는 오스틴 버틀러 또한 필히 주목해야 할 부분.


<썸머 필름을 타고!> 일본 영화는 크게 몇 갈래의 흐름으로 구분할 수 있을 텐데, '특유의 과장된 감성을 극대화하는 류'의 영화를 흔히 접할 수 있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나, 특기할 만한 지점은 이 영화의 사랑이 향하는 종착지가 영화 그 자체라는 것일 테다. 오그라드는 손발에 스크린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돌릴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서투른 진심을 전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게 된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감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필자가 선정한 올해의 엔딩 씬 중 하나이다.


<탑건: 매버릭> 이 영화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극장이라는 공간의 위상에 대해 모두가 회의감을 갖고 있던 시기에, '그럼에도 극장은, 영화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투박하고 특색 없지만 그 이상으로 진중한 무게감이 있는 단순한 플롯과, 실제 촬영으로 구현해낸 극한의 액션은 CG가 인간의 연기를 대체해가는 지금의 영화계에서 그래도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1편에 비해 모든 면에서 진일보하며, 동시에 그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많은 저질 프랜차이즈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 시기에 속편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범적으로 제시해줬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본즈 앤 올> 사실 6위라는 순위엔 루카 구아다니노와 티모시 샬라메에 대한 사심이 상당 부분 들어있기도 하다. 카니발리즘(식인) 소재의 로맨스 영화라니 역시 감독답지만, <서스페리아>의 기괴함은 덜어내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애틋함과 서정성을 더 배가시킨 듯한 인상이다. 의외로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종국에는 잔혹하고 애절한 사랑으로 끝맺음하는 악랄함까지 쏙 마음에 들었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선 아쉬운 면이 있다는 평이 대부분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애프터 양>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억할 때, 그 감정을 영상으로 담아낸다면 이런 영화가 될 것만 같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기억(추억)을 어떻게 향유하고 동시에 보존하고 있는지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전체에 잔잔하게 배어 있는 서정적인 OST와 독특한 감성이, 마치 내가 '양'과 함께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보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묘한 매력이 있는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원제도 훌륭하지만, 이 번안 제목은 가히 초월번역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언뜻 보면 아름답고 황홀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으로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사랑할 땐 그 순간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말하고 있듯이, 너에게는 최악의 사랑이었을지라도, 나에겐 최선의 사랑이었던 거다. 모든 사랑은 다 그런 법이다.


<아마겟돈 타임> 감독 제임스 그레이의 어린 시절을 다룬 자전적인 영화. 내로라하는 명배우들의 열연과, 감독의 어린 시절 동네, 그리고 자신의 가족 공동체에 대한 따스하면서도 진심 어린 시선이 돋보인다. 이 영화는 지금처럼 극단의 갈등 속에서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해 준다. 급류 속에서 물고기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물살에 휩쓸려 무너지지 않고 단지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라고 말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멀티버스를 소재로 한 똘끼 넘치는 익살스러운 SF 가족 영화다. B급 화장실 유머 감성이 많은 호불호를 불러일으키지만, 자칫하면 저급해 보일 수 있는 유머와 한 편의 영화로 다루기엔 상당한 난이도가 있는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가지고 세련된 연출로 성공적이게 엮어냈다.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음에도 종국에는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힘 또한 강력하다. 자고로 멀티버스란 이런 식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같은 게 아니라.



*이하는 국내에 아직 개봉하지 않았거나 수입되지 않은 작품들도 포함한다. 영화제, 해외 스트리밍 등 기타 경로로 감상.


영화제 상영작

올해에는 영화제에서만 감상할 수 있던 영화들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들. 추후 수입, 개봉 예정작들도 포함.

1. 스칼렛 (Scarlet, 2022) - 피에르토 마르첼로

2. 레일라의 형제들 (Leila's Brothers, 2022) - 사이드 루스타이

3.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The Tsugua Diaries, 2021) - 미겔 고미쉬, 모린 파첸데이로

4.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 2022) - 루벤 외스틀룬드

5. 빌어먹을 휘게 (Fucking Bornholm, 2022) - 안나 카제약

6. 헬벤더 (Hellbender, 2021) - 젤다 애덤스, 토비 포서, 존 애덤스

7. 린치/오즈 (Lynch/Oz, 2022) - 알렉산더 O. 필립


<스칼렛> 피에르토 마르첼로 감독의 전작 <마틴 에덴>을 보고 반했었는데, 이번 작품은 훨씬 더 훌륭하다. 거친 입자의 필름 질감, 회화적 이미지의 숏들, 전통적인 플롯까지 모든 면에서 '고전적'인 영화이다. 필름 아카이브 출신인 감독답게 기록 영상들을 활용한 몽타주들이 인상적이며, 영화 전반에 흐르고 있는 서정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당시 시대상의 암울함을 상쇄한다. 이 영화의 모든 면에 반해 홀린 듯 감상했다. 정식 개봉이 되었더라면 TOP 10 리스트에 충분히 오르고도 남았을 거다. 아직까지 수입이 정해진 바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


<레일라의 형제들>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극단을 달리는 이란에서, 멍청한 남자 가족들에게 고통받는 여성 주인공을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 영화다. 최악의 한심한 짓거리만 골라하는 형제들과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면 부처님이 오더라도 속에 천불이 나서 한대 줘패지 않을까 싶을 정도. 상황의 부조리함을 배가시키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블랙 코미디로서도 훌륭하고, 사회 고발극으로서도 훌륭하다. 얼마 전, 이 영화의 주인공 레일라를 연기한 배우 타라네 알리두스티가 이란 시위 정국 속에서 히잡을 벗은 사진을 올렸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 그것으로 이 영화의 블랙 유머는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배우 분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바라며...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오가며, 영화예술의 본질적 접근법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다. 코로나 팬데믹 격리 기간의 스태프들의 모습을 그대로 촬영해 영화 속에 담기도 하며, 21일간을 역순의 시간으로 진행하는 독특한 구성 방식은 어째서 영화의 제목이 'august'가 아니라 'tsugua' 인지 보여준다. 영화는 결국 예술의 본질은 인과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행동의 궤적을 포착하는 것에 있다며, 팬데믹 같은 외부 요인의 개입에는 관계없이 실존의 증명에 힘쓰라며 항변하고 있다.


<슬픔의 삼각형>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에 상당히 파격적인 영화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의외로 그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표현 수위였지만(?) 노골적이고 악랄한 풍자는 보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며, 차근차근 기반을 쌓아 올려가다 종국에 폭발하며 역전시키는 솜씨가 탁월하다.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도식적인 면 또한 지니고 있어 상당한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과연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한 영화였는지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시네필들이 동의하기 힘들지 않을까.


<빌어먹을 휘게> 친구네와 같이 가족 여행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주인공의 감정을 조명한 영화. 친구네 가족, 아이들, 남편 모두 상당한 짜증을 유발하고(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은근히 사실적이다), 관객들은 깔깔거리며 감상하다가도 어느새 진심으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종국에는 관계에서 중요한 건 이성이나 논리보다 결국 감정이라는 걸 상기할 수 있다. 매번 여자친구와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들에게 이 영화를 꼭 보여주고 싶네.


<헬벤더> 4명의 가족들이 감독, 촬영, 배우 등을 맡아서 소규모로 제작한 인디 호러 영화. 허접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퀄리티에 놀라게 된다. 매일 밤마다 가족이서 다 같이 고전 영화를 본다는 시네필 가족들답게, 아방가르드한 연출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거기에 더해 약간 뜬금없는 맥락의 음악과 영화의 미묘한 불합치가 오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이 가족의 차기작을 벌써부터 기대 중이다.


<린치/오즈>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오즈의 마법사>와 그의 영화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전문적으로 찍어오던 알렉산더 O. 필립 감독은 이번에도 다양한 6명의 인물들에게 각각의 이야기를 맡긴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보다도 각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으며 위대한 고전 한 편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체감할 수 있다.



취향저격 장르영화

오롯이 내 취향대로 골랐다.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말 재밌게 감상했던 영화들. 여기서부터는 순위와 무관하다.


스크림 (Scream, 2022) - 타일러 질렛, 멧 베티넬리

지옥의 화원 (地獄の花園, 2021) - 세키 카즈아키

외계+인 1부 (2022) - 최동훈

멘 (Men, 2022) - 알렉스 가랜드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2022) - S. S. 라자몰리

늑대사냥 (2022) - 김홍선

X (2022) & 펄 (Pearl, 2022) - 티 웨스트

더 메뉴 (The Menu, 2022) - 마크 미로드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Glass Onion: A Knives Out Mystery, 2022) - 라이언 존슨


<스크림(2022)> 오랜만에 돌아온 스크림 프랜차이즈의 속편. 전작의 등장인물들을 훌륭하게 활용하면서, 장르와 영화산업 전반에 대한 메타적 접근은 여전히 유효하다. 1, 2편의 아성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3, 4편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속편. 이 정도 퀄리티로 계속 이어나가 준다면 팬으로서 환영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나는 라스트 제다이가 좋다(영화를 본다면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지옥의 화원> 일본식 학원 폭력물(이런 걸 친피라 물이라고 하나?) 장르의 클리셰 범벅인 영화지만, 특기할만한 점은 등장인물들이 전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이며 배경이 학교가 아니라 회사라는 거다. 일본의 OL, 그러니까 여직원들이 서로 맞짱 뜨듯이 치고받고 싸우는 유쾌한 폭력 코미디. 단순히 성별을 바꾸고 배경을 옮겼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뻔하고 식상하기 그지없던 이야기에 보는 맛이 생긴다. 나가노 메이와 히로세 아리스의 매력 또한 필견. 이런 장르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의외로 많은 웃음을 주어서 나도 놀랐다.


<외계+인 1부> 아마도 이 영화는 최동훈 감독 최대의 실패작으로 남겠지. 분명 만듦새가 좋은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렇게까지 신랄한 혹평을 들어가면서 망할 영화였나? 하면 쉬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대사가 오글거린다, 연출이 유치하다, 각본이 조악하다, 전부 동의하는 비판이지만 최동훈 영화는 원래 그랬다. <타짜>의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대사도 겁나 오글거리고 연출은 유치하기 그지없다. 다들 원래 이 사람 영화는 이런 거 알고 보러 가는 거 아녔어? 2부가 나오면 재평가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난 재밌게 봄.


<멘> 알렉스 가랜드는 로버트 에거스, 아리 애스터와 함께 눈여겨보고 있는 현세대 장르 루키 감독 중 한 명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비범한 영화를 들고 나왔는데, 후반부에 펼쳐지는 그 지옥도의 비주얼은 너무나도 괴기해서 텍스트로 옮길 수가 없을 정도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의 연쇄, 그리고 너네들은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않을) 거라는 그런 체념의 시선이 영화 내내 짙게 배어있다. 역시 장르를 잘 다루는 감독은 이야기의 깊이부터 남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


<RRR: 라이즈 로어 리볼트> 트위터에서 입소문 탄 걸 보고 대체 이게 뭐야? 하면서 넷플릭스에서 틀었다. 3시간 후딱 지나갔다. 원래 인도 영화 특유의 감성을 나름 선호하는 편이긴 한데, 이 정도로 대자본을 투자하니 상당히 볼만한 물건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과장된 전개의 연속이지만, 영국에 핍박받던 인도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어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영국인들을 죄다 일차원적인 악역으로 묘사하는 것이, 어째 한국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을 다루는 묘사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 묘한 웃음 포인트. 스펙터클한 액션도 쉬지 않고 나오고 후끈하게 벗은 근육질 몸매를 원 없이 볼 수 있으니, 시원한 영화가 땡길 때 한번 틀어보길 권한다.


<늑대사냥> 김홍선 감독의 전작인 <변신>은 중반부까지의 압도적인 미장센과 흥미진진한 설정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결말을 보여주는 졸작이었다. 극장에서 꽤 화내면서 관람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렇지만 그때도 이 감독이 장르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고 느꼈다. 이번 영화는 더욱 비범하다. 뻔한 고어 장르 밀실 살인게임 영화인가 싶더니, 중반부부터 급격한 플롯에 변화를 주면서 영화의 중심이 옮겨간다. 이 전환 과정에서 영화는 너무나도 뻔뻔해, 관객은 이상하게 느끼는 내가 잘못된 건가? 하고 착각할 정도다. 여전히 내용은 부족함이 많았지만, 캐릭터의 활용 방식이나 이 우직한 뻔뻔함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 이 정도의 장르물은 정말 귀하다. 앞으로도 이런 영화 계속 찍어주셨으면.


<X> & <펄> A24에서 제작한 이 두 편의 영화는, 오롯이 배우 미아 고스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나 <펄>은 더욱 그렇다. <X>는 포르노를 찍기 위해 시골 외딴 농장에 방문한 주인공 일행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슬래셔 물인데, 가히 <경계선>의 슬래셔 버전이라 할 만하다(알리 압바시의 그 영화 맞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섹스 씬이 등장한다. <X>의 프리퀄인 <펄>은 배우 미아 고스를 중심으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형식 그 자체를 풍자한다. 배우와 캐릭터의 기괴함과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산뜻한 분위기의 미스매치가 자아내는 기이함이 인상적이다.


<더 메뉴> 사실 당연히 눈알 스파게티나 손가락 파스타 정도는 기대했는데, 정말 평범한 표현 수위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영화에서 풍자하는 이야기 또한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특히나 어느새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본질을 잊지 않았냐고 되묻는데, 이 영화에서 음식의 '맛'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듯이, 영화라는 문화예술의 본질이 '재미' 그 자체라고만 항변하는 것 같아 동의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의 구조나 감각적인 연출, 노골적이고 도식적인 구조의 풍자와 사회비판은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감성이었다. 이런 영화는 매번 봐도 질리지 않는 맛이 있어.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 전작만큼의 각본의 세련됨은 없지만, 여전히 시리즈의 정체성인 특유의 노골적인 사회풍자와 비판은 유효하다. 일론 머스크를 대놓고 조롱하는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가 인상적. 다만 추리 요소는 줄어들고 사건 발생 상황의 세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게 약간의 단점. 그래도 재미는 여전하기에 크리스마스 연휴용 영화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방향성의 변화는 어쩌면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


그 외 주목할 만한 영화들

탑 (2022) - 홍상수

인생은 아름다워 (2022) - 최국희

헌트 (2022) - 이정재

킹메이커 (2022) - 변성현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 (Good Luck To You, Leo Grande, 2022) - 소피 하이드

파리, 13구 (Paris, 13th District, 2021) - 자크 오디아르

나이트메어 앨리 (Nightmare Alley, 2021) - 기예르모 델 토로

더 배트맨 (The Batman, 2022) - 맷 리브스

리코리쉬 피자 (Licorice Pizza, 2022) - 폴 토마스 앤더슨

어나더 라운드 (Druk, 2020) - 토마스 빈터베르

아바타: 물의 길 (Avatar: The Way of Water, 2022) - 제임스 카메론



TV 시리즈 베스트 10

올해는 TV 시리즈도 나름 많이 감상했기에 번외로 꼽아보았다.

TV 드라마는 시청할 수 있는 플랫폼, 일본 애니메이션은 제작사를 표기했다.


1. 베터 콜 사울 (Better Call Saul, 2015~2022) 시즌 6 - Netflix

2. 더 보이즈 (The Boys, 2019~2022) 시즌 3 - Amazon Prime Video

3. 피스메이커 (Peacemaker, 2022) - HBOmax

4. 86 -에이티식스- (86-エイティシックス-, 2021, 2022) - A-1 Pictures

5. 세브란스: 단절 (Severance, 2022) - Apple TV+

6. 설강화: snowdrop (Snowdrop, 2021~2022) - JTBC, Disney+

7. 글리치 (GLITCH, 2022) - Netflix

8. 진격의 거인 Final Season (進撃の巨人 The Final Season, 2020~2023) part 2 - Netflix, MAPPA

9. 외톨이 THE ROCK! (ぼっち・ざ・ろっく!, 2022) - CLOVER WORKS

10. 서머타임 렌더 (サマータイムレンダ, 2022) - Disney+, OLM



 이번 일 년 동안 약 130여 편가량의 영화를 관람했다. 되돌이켜 보면, 올 한 해는 작년에 비해서 인상적인 영화들의 수는 떨어졌던 것 같다. 그래도 <헤어질 결심>이나 <놉>, <엘비스>처럼 수없이 관람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게 된 영화를 발견했다는 게 소득이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같이 영화를 향유할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 내년에는 또 어떤 영화들이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지, 기대에 부푼 연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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