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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Aug 27. 2023

'전형적'에서 '평범함'으로

바비(2023)

 사실 영화를 감상한 지는 이미 한 달이 넘었다. 뭔가 국내에서 흥행 추세도 심상찮고, 극장에서 금방 내려갈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개봉일 다음 날에 바로 짬을 내서 관람했다(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 글은 당시 감상 후 모 커뮤니티에 적었던 감상 글을 조금 보완, 수정해 옮겨왔다. 연구에 조교 업무에 논문 준비에 출장에 너무 바쁘게 살아서 브런치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올해 들어서 포스팅한 글이 단 한 개도 없었기에(...) 조금 포스팅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다.


 원래 감독으로서의 그레타 거윅을 정말 좋아하기에, 영화가 궁금하기도 했다. 멈블코어 출신의 배우로 시작해 소규모 아트하우스 영화에 가까웠던 감독 데뷔작 <레이디 버드>(2017)와 비교적 본인의 색채가 남아있을 수 있었던 <작은 아씨들>(2019)을 넘어서, 이번 <바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자본 상업영화에 가까웠기에 그의 톤이 어떻게 유지가 될 지도 궁금했다.



 이 영화의 여성주의적 편향(?)이 화두에 오른 이후, 자연스레 영화의 극단성을 염려하는 의견들 또한 흔히 볼 수 있었다. 뭐 우려야 이해는 갔지만, 그레타 거윅의 전작들을 보면 필요 이상의 교조적인 메시지에 영화가 잡아먹히거나 하는 안일한 영화를 찍는 감독은 아니었지 않나? 내심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뭐 결과적으로 반은 맞고 반은 틀렸었다. <바비>는 정치적 메시지에 내러티브가 잡아먹힌 그런 엉망진창인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뼈대부터 페미니즘과 같은 여성주의적 시각 위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고, 영화 속 거의 모든 요소들이 그러한 맥락에서 활용되고 있다. 다만 이야기가 멀쩡히 전개되다시피 하다가 갑자기 훈계하는 듯 교조적인 톤으로 전환되며 엉망진창으로 나아가는 그런 영화는 아니라는 거다. 대신 이 영화는 맨 첫 장면과 내레이션부터 대놓고 우리는 '페미니즘'의 이야기를 할 것이라며 쐐기를 박고 시작한다. 이후로도 '가부장제' 같은 단어들이 정말 심심치 않게 계속 등장하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영화의 극단성에 대해 자연스레 염려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한쪽으로만 심하게 치우친, 편향되고 극단적인 영화일까? 내가 보기엔 아니다. 영화를 감상한 분들이라면 모두가 웃었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한 장면 이후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아무리 봐도 극단적으로 인권 운동에 경도된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풍자 대상은 영화 속 주인공인 '바비'와 주 무대인 '바비랜드' 그 자체로 동치되어 묘사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플롯은 일종의 '미러링'이다. 바비랜드 속에서 바비(여성)들은 모두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인 것인 양 행동한다(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반면 켄(남성)들은 바비가 바라보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게도 현실 세계에서 모든 것이 남성들에게만 종속되고,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성 중심 사회의 끝판왕을 달리는 현실세계가 등장한다. 과장된 톤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여아용 완구를 제작하는 회사의 최고 임원들마저 모두 멍청한 남성들뿐인 묘사는 현실의 모습이 떠올라 쉽사리 웃을 수 없기도 하다. 이후 가부장제, 남성성 등에 경도되어 마초성을 자랑하는 켄의 모습은 흡사 조던 피터슨이나 벤 샤피로 같은 자들을 추종하는 대안우파 인셀들의 모습을 패러디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영화에서 묘사되는 남성들은 죄다 멍청하고 우스꽝스럽게 과장해서 그려진다(아마 이 포인트에서 한국의 남성 관객들은 발끈하겠지). 그러나 이건 여성 캐릭터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영화는 바비랜드 속 바비(여성)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로 멍청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건 장난감 속 세계의 법칙을 실사영화로 구현하면서 생기는 이질감-따라지지 않는 우유를 마시고, 물이 나오지 않는 샤워부스에서 샤워를 하는 등-과 결부되어서, 일종의 메타-유머로서 기능하는 영리한 장치이기도 하다. 바비들은 주체적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거대한 장난감 세계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바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켄들 또한 마찬가지다. 유일한 예외는 주인공 바비(마고 로비 분)와 그와 함께하는 두 명의 모녀일 텐데, 이는 그들이 영화의 플롯 상에서 세계의 법칙을 깨부수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비약을 좀 덧대어서 이야기하자면, 작중의 바비랜드는 일종의 '페미니즘적 세계관'이며, 작중의 현실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남성 중심 세계'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지금이 무슨 남성 우월 사회냐, 말도 안 된다"라며 태클을 걸 사람도 있겠다만 그 논의는 당장은 제쳐두도록 하자. 이 영화의 포인트는 바비랜드, 현실세계 모두 딱히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거다. 영화는 바비랜드를 현실의 남성 중심적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반전(미러링)시킨 세계로 묘사하나, 그 안에서 독립된 자아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켄들에게도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두 세계가 엮이기 시작하면서 모순을 드러내고, 주인공 일행에 의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전복되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는 가부장제를 무너트리고 바비(여성)들의 왕국을 세우는, 뻔하고 도식적인 이야기로 끝내지 않는다. 대신 바비들 뿐만 아니라 켄들 또한 자신으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며, 우리가 매번 너희를 배척할 필요는 없었다며 사과한다. 이건 단순히 남성들을 멍청하게 그리고 여성들이 연대해서 이기는, 그런 도식적이고 나이브한 영화가 아니다(내 가치관이랑은 관계없이, 나는 그런 식의 표현방식은 안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을 옭아매고 있던 커다란 법칙들-어쩌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의 이야기이자, typically(전형적인)이 ordinary(평범한)으로 바뀔 때 생겨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바비>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놀랍게도 워너브라더스의 사상 최대 흥행작이 되는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고, 여성 감독 단독 작품 중 처음으로 흥행 수익이 10억 불을 돌파한 작품이다(<겨울왕국>, <캡틴 마블> 등은 전부 공동 감독이었다). 뭐 굳이 이런 걸로 성별 나눠서 따지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만, 박스오피스 10억 불 돌파 영화가 20편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 여성 감독 영화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이한 지점은, 이 영화가 아시아 권역에서 별다른 흥행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바비>의 폭발적인 흥행은 절대다수가 북미, 멕시코 등 라틴 문화권, 유럽 등지에서 견인하고 있다. 나름 전 세계적으로 규모 있는 영화 시장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의 흥행은 60만 명에 채 미치지 못한다. 그레타 거윅은 그렇다 치더라도, 라이언 고슬링이나 마고 로비라는 배우의 이름값을 생각한다면 의아한 흥행이다. 그리고 이 추세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권역에서도 비슷하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지만, 동아시아 문화권 특유의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비롯된 거부감이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주된 요인은 바비 인형에 대한 추억과 공감대가 없는 문화권이라는 것과, 서양식 블랙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서 때문이겠지만.


 여전히 영화에 거부감을 가질 분들이 많을 줄로 알지만, 나는 그래도 한 번쯤 감상해 보시라고 추천하고 싶다. 안 그래도 어제 VOD가 풀리기도 했고. 물론 <바비>는 분명히 페미니즘 영화이고 여성 영화다. 그러나 나이브하게 도식적으로 접근하는 안일하고 편협한 영화는 아니다. 또한 영화가 남성 캐릭터들을 멍청하게 묘사하긴 하나, 딱히 여성 캐릭터라고 다르지도 않으며(솔직히 이런 묘사 하나하나 가지고 일일이 태클 걸고 불편해하는 거 정말 피곤하지 않나? 우리 다 좀만 너그러워지자.) 그건 감독이나 제작사가 남성을 혐오해서 때문이라기보다는,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필요한 과장이고, 장난감 세계의 법칙을 현실 세계로 끌어오면서 생기는 괴리감을 메타적으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냈기 때문에 가깝다. 영화 속 표현들을 그냥 장르적인 과장이라고 이해하고 크게 불편해하지 않으며 본다면, 의외로 유머의 타율이 훌륭하고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이야기에 깊이가 있는 영화로 다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올 초에 봤던 한국 영화 <킬링 로맨스>가 생각났는데, 그런 막 나가는 뻔뻔한 뮤지컬 감성에 그레타 거윅의 세련된 연출과 유명 가수들의 음악이 덧대어진 상당히 인상적인 영화로 다가왔다. 이제는 명실상부 흥행 감독이 된 그레타 거윅의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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