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플러스 <무빙>
*드라마 <무빙>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디즈니 플러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무빙>. 작년 <카지노>만 약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뿐, 그 외 모든 한국 오리지널 콘텐츠에서 죽 쑤고 있던 디즈니 플러스에게는 플랫폼의 사활이 걸린 콘텐츠였다. 원작 웹툰 또한 연재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그 작가인 강풀은 한국 웹툰 산업의 기반을 다진 명실상부 스타 작가다. 그런 그가 직접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고 한다. 거기에 650억의 대자본이 투입된 20부작이라니, 최근에는 보기 힘든 방대한 분량이다. 1-7화를 한 번에 공개한 이후로 매주 2화씩 공개하는 독특한 공개 방식도 의아했는데, 여러모로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자 기대작이라 할 수 있었다.
드라마 <무빙>은 필요 이상으로 각 캐릭터의 서사에 공을 들여 느긋하게 보여준다. 두 시간짜리 영화나 편당 한 시간 남짓 하는 드라마마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유튜브 요약본으로 소비하는 현시대 관객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상당히 대담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슈퍼히어로 장르에 기대하던 스펙터클이나 박진감 넘치는 전개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마블 영화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같은 이런 장르의 시청자들이 궁금해할 법한 과학적인 설정놀음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은 ‘어쩌다 보니 그런 능력이 있는 것’ 일뿐이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초능력이 아니니까.
1-7화에서 봉석과 희수, 강훈의 자식 세대 이야기가 나오고 8-15화에 걸쳐 부모 세대의 과거 이야기를 다루자,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부모와 자식들, 그리고 남북의 요원들이 벌이는 피 튀기는 싸움과 액션, 거기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원작에 비해 스펙터클한 비주얼을 보여주긴 하나, 여전히 화려한 액션보다는 각 인물들의 과거와 감정, 그리고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과 인간적인 정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끝까지 슴슴하다.
화려한 액션 대신-물론, 11화나 18~20화에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하지만- 그보다 드라마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 그 자체'와 '가족'이다. 냉철한 안기부 요원 김두식과 이미현이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 조폭의 히트맨으로 지내던 장주원이 황지희를 만나 과거를 청산하고 가정을 이루는 과정, 이재만이 이강훈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서로를 잃고 헤어지는 과정의 슬픔과 애절함,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와 집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무빙>의 등장인물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이전에 한 명의 평범한 시민이자 부모이며 자식이다. 그리고 <무빙>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런 평범한 시민들이 슬픔과 아픔을 겪고 고통받는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을 주목한다. 장주원과 김두식과 이미현은 국정원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구조의 희생양이 되어 가족들이 고통받고, 이는 자식 세대로까지 이어진다. 이재만이 전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청계천 재개발 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며, 김두식이 감금된 원인은 남북 분단 현실에서 비롯된 이념적 갈등 때문이었고, 장주원과 장희수가 전학을 가게 되었던 것은 학교폭력과 이를 방관하고 방조하는 시스템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애절할 수밖에 없으며, 드라마는 이 사연들을 구구절절 상세하게 시간을 들여 묘사한다. 여기서 시선은 더 확장되어 악인으로만 보였던 북한의 특수부대 능력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장희수와 김봉석, 이강훈을 죽일 것처럼 괴롭히던 그들 또한 사실 북한 체제의 희생양이었다고. 한창 극이 절정에 달할 18-20화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남발되는 플래시백은 시청자들의 몰입을 깨트려 반감마저 불러일으키지만, 이 드라마는 극의 절정을 일정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사연을 들려줄 필요가 있었던 거다. 왜냐면 그들 또한 한 명의 인간이고 자식이고 지킬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드라마는 초능력 액션 장르, 슈퍼히어로물이기 이전에 가족과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순진하리만치 따스한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었던 거다.
솔직히 말해서, <무빙>에서 구구절절 펼쳐지는 각각의 사연은 상당히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다. 초반 5~10분만 봐도 그 뒤의 이야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식상한 드라마가 대체 왜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 훌륭한 액션, 매력적인 캐릭터, 화려한 캐스팅, 섬세한 연출 모두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드라마 전반에 깔려 있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하고 애정 어린 시선 때문일 것이다. <오징어 게임>처럼 이 사회의 어둡고 암울하며 폭력적인 면들만 보여주던 자극적인 드라마가 범람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작금의 사회에서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런 따뜻한 감성을 지닌 드라마를 모두가 그리워하고 있던 것 아닐까?
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는 부모의 자식을 향한 희생정신과 무한한 사랑을 예찬하는, 올드한 K-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진부하면서도 더 한국 사람들 마음에 와닿는 면이 확실하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나도 한국 사람이라는 걸까... 그래서 이 말은 비판보다는 칭찬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무빙>은 근 두 달간 온 가족이서 매주 수요일을 목 빠지게 기다리며 애청한 드라마였다.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가뭄에 단비 같던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 근 3-4년간 본 한국 드라마 중 가장 재밌고 완성도도 훌륭한 드라마였다고 평한다. 아직 감상하지 않은 분이 있다면, 추석 연휴 때 부모님과 함께 정주행 하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