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목부터 기이하다. 어찌 보면 교조적으로까지 읽힐 수 있는 이 제목과 내용도 예측이 불가능한 포스터 한 장이 전부인 전무후무한 마케팅 방식으로, 이 영화는 상당한 기대감을 자아냈다. "우리가 홍보 안 해도 어차피 너네 다 우리 영화 보러 올 거잖아?"라는 사뭇 거만함마저 느껴지는 이 태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 현지에서도 엄청난 호불호(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대중들 사이에서는 불호 평이 대부분이었다)를 낳았고, 초반의 폭발적인 흥행세에 비해 무지막지한 드랍률로 아쉬운 일본 내 흥행을 거두었다. 그리고 10월 25일 국내에서도 개봉했으며, 일본과 비슷하게 국내 관객들에게도 상당한 당혹스러움을 안겨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봉일에 이 영화를 마주하고 사실 나 또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학생 때부터 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당연하게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을 사랑하던 친구와 함께 관람했는데, 반응은 친구 또한 매한가지였다. 이 친구 왈 "늙으면 이제 그만해야지"라고까지 했다. 그래도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기에, 혼란함을 뒤로하고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날 한 번 더 관람할 일정이 잡혀 있었고. 보기 전 내가 알던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간과, 그의 개인사를 되새겨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이 영화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화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사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 영화는 그 정도가 상당히 심하다. 이후 재관람을 하고 나니 조금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글로써 정리해 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굳이 서두를 달아두자면, 이 영화는 정말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영화고,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마저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본문에 동의하지 못하고 끼워 맞추기 식 억지 해석이라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견해 또한 당연히 존중한다. 그래서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해석임을 전제해 두고 글을 시작한다. 새로운 관점이나 해석, 또는 본문에 대한 반론 등이 있다면 댓글로 의견을 개진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지금껏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좋아해 온 관객들이라면, 그의 작가적 세계관이 어릴 적 겪었던 전쟁과 그의 가족에 관한 경험 등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마히토는 당연히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다. 영화의 시작은 태평양 전쟁 시절 도쿄 대공습으로, 전쟁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다. 이후 펼쳐지는 이세계에서의 경험은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영화적 세계-탑으로 은유되는-라 할 수 있다. 영화의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가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왜가리 아오사기는 스즈키 토시오 본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그는 마찬가지로 큰할아버지 캐릭터가 지금은 고인이 된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같은 스튜디오 지브리 소속 감독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업계의 동기이자 멘토, 경쟁자였다)을 모티브로 했다고 언급했지만, 나는 그뿐만 아니라 토에이 동화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의 직접적 스승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 또한 언급하고 싶다(그 또한 2021년 작고했다). 이렇듯 큰할아버지 캐릭터는 이미 고인이 된 자신의 동료 또는 스승, 멘토, 이 업계에서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미지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 속의 이세계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 세계임과 동시에, 일종의 사후세계로서의 맥락 또한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서 비록 유머러스한 톤으로 묘사되긴 하지만, 사람을 요리해 잡아먹는 앵무새,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와라와라를 양분으로 삼는 펠리컨-흡사 전투기의 비행 모습과 비슷하게 묘사되는-등을 생각하면 이 세계는 꽤 직접적으로 죽음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이미 상당한 고령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은 어느덧 죽음에 대해 초연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미 작고한 동료와 선배들에게 안부를 건넴과 동시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지금까지 만들어 온 영화적 세계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영화 속 여정의 시작은 어머니의 죽음과 새어머니의 실종이다. 어머니와 새어머니는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일종의 도플갱어적 모티브로, 어머니는 본인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경험들과 예술적 토대, 거기서 비롯되는 열정-불의 이미지-에 대응되며, 이세계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새어머니는 이를 찾아 나서는 과정으로서의 목적일 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판타지 같은 모험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은 죽음에 근접한 이 고된 여정에서, 일종의 군국주의 집단으로 묘사되는 앵무새 왕국은 당연하게도 일본 제국군을 상징하며, 동시에 예술적 세계를 파괴하려 하는 자본의 개입, 또는 탑의 세계를 광적으로 추앙하는 팬덤 또는 관객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주인공은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중요할 때는 의지할 수 있는 조력자인 왜가리와, 든든한 멘토인 키리코의 도움을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기어코 자신의 예술적 기반이자 열정-히미, 나츠코-를 지켜낸다.
또 다른 가설을 세워보자. 이제 큰할아버지를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라고 가정해 본다. 역시나 탑은 지금까지 쌓아온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세계를 넘겨주려 하는 마히토는 누구에게 대응될 수 있을까. 지브리 스튜디오의 사정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아쟈키 고로(본작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가 떠오를 테다. 미야자키 고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나 재능과는 관계없이 애니메이션 감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스즈키 토시오를 왜가리에 대응시킨다면(실제로 미야자키 고로에게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으라 부추긴 것은 스즈키 토시오이다), 영화 속에서 마히토를 탑으로 인도하는 왜가리의 행보와도 일치한다. 미야자키 고로가 낙하산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 데뷔작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2006)은 원작자와 미야자키 하야오, 평론가, 대중들에게 상당히 혹독한 평을 받았다. 사견으로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라고 보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에 가지던 기대치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쨌든 그 이후 미야자키 고로는 상당한 억울함과 스트레스를 토로했고, 최근작 <아야와 마녀>(2020)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신은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정형화된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영화 속에서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세계를 이어받길 거부했고,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나가는 길을 선택한다. 이건 지금까지 일궈왔던 지브리 스튜디오 세계의 붕괴, 또는 재구축과도 같다(3D 애니메이션인 <아야와 마녀>와 기존 지브리 애니메이션 사이의 이질감은 엄청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식의 삶을 통제하고 가둬왔던, 아버지로서의 자기반성적 맥락 또한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인 '악의'와 '거짓말'이라는 메타포, 돌멩이와 같은 오브제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제 이 요소들에 포커스를 맞춰서 영화를 다시 재구성해본다. 영화의 초반부, 현실 세계에서 마히토는 돌멩이를 주워다 자신의 머리에 직접 상처를 낸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학교에서 괴롭힘 당했다 거짓말한다. 단순히 애정결핍처럼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지만, 후반부에서 마히토는 이를 자신의 ‘악의’라 칭한다. 대체 이 '악의'는 무엇인가. 왜가리가 지속해서 언급하는 '거짓말'은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투기 공장 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전투기를 동경하며 자랐으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환경보호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전쟁무기에 대한 동경과 반전주의라는 모순을 지닌 개인에 대한 고민은 전작 <바람이 분다>(2013)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나 있으며, 이번 영화에서는 이 모순을 자신의 영화적 세계 전체로 한층 더 확장한다. 이 연장선상에서, 실제 우리의 현실 세계는 전쟁과 폭력, 악의가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다(영화 속 초반부의 불타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도쿄). 그러나 지금까지 지브리 스튜디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속 세계는 이러한 현실의 ‘악의’를 마주하기를 피해왔다. 그의 영화들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거의 모든 인물들이 순수하고 선한 마음과 의도를 갖고 행동하고는 했으며, 이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연령과 성별, 세대를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끈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내면세계 또한 실제로 그러할까. 그는 자신이 태생부터 지니고 있는 모순을 똑바로 마주하기를 피해왔다. 그래서 그의 영화 속 세계는 선의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작 <바람이 분다>에서 자신이 지닌 이 모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만치 낭만적으로 전쟁 시기를 묘사한 그 영화는 어찌 보면 솔직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관객들에게 다분히 오해 또는 오독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충분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들을 어떤 면에서는 악의가 없는 거짓된 세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은, 영화의 결말부에서 지금까지 일궈왔던 영화 속 세계를 무너트리는 전개를 선택한다. 비록 현실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불바다가 되겠지만, 자신은 소중한 동료들과 함께할 테니 괜찮다고. 그 안에서 가지고 나온 돌멩이처럼, 계속해서 작품을 만들고 힘차게 살아갈 것이라고.
이러한 세 가지의 맥락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데다가 의도적으로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따라가고 주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감독 본인마저도 이들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은 상태로 영화를 만들어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플롯은 기존 지브리답지 않게 투박하다. 별다른 전조 없이 뜬금없게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들과 추상적 공간, 모호한 메타포와 오브제들이 얽히고설켜 있으며, 그 안에서 서사적인 유기성은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영화는 감독의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솔직하고 진솔한, '날 것' 그대로의 영화다.
어쨌든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삶과 예술적 세계를 되돌아본 감독은 '내 삶과 예술은 이러했다'라고 영화로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제 제목으로 돌아와,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