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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딜김 Aug 21. 2020

거짓을 덧대어야 진실이 된다

<빅 피쉬>와 <이미지 인문학 1>으로 생각한 것

때로는 거짓이 진실보다 더 진실같은 진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책이자 영화인 <빅 피쉬>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달리의 그림과도 같은 모순이다.


<빅 피쉬>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고의적으로 흐린다. 관객(혹은 독자)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어디까지가 아버지의 실제 경험인지, 혹은 어디부터가 아버지의 상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과장, 비현실적인 등장인물, 드라마틱한 전개는 아버지의 일대기라기보다는 환상이라고 믿게 만든다.


상상과 현실의 봉합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이미지 인문학1>에서는 이를 '파타피직스'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 선 변증법은 상상, 혹은 현실의 분리된 영역 중 그 어느 곳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며 현실과 가상을 봉합한다.


반면 파타포에서는 가상과 현실이 분리되지 않고 중첩된다. 흔히 체스는 전쟁의 은유라 말한다. 하지만 가상의 체스판과 현실의 전쟁터는 분명히 구별된다. 파타포에서는 이 경계가 사라진다. (중략) 이처럼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것, 전형적인 파타피지컬 상황이다. (<이미지 인문학 1> p.126)


가장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종종 이성적인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드러낸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 꾸는 꿈이 이성에 억압되었던 무의식을 발현하는 통로가 되듯, 존재의 진실은 이성과는 반대되는 창구를 통해 드러난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 꿈과 같은 장치다. 아버지의 꿈은 현실과 상상을 봉합하며 숨은 의도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파타피직스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자면, <빅 피쉬>의 환상적인 이야기는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 혹은 사실적인 것에 대한 찬양에 대한 반기라고도 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정신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멀리하게 하라"라고 권한다. 근대문명은 이렇게 이성적 사유를 위해 상상력을 억압해왔다. 나가티니는 스톤헨지 밑에 슬쩍 벤틀리를 심어놓음으로써 이 이성중심주의를 전복시킨다. "현재 내 접근방법은 중립지대의 반어적 상태에 있다. 지금 우리 문화의 부정적인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사실 아니면 허구, 선 아니면 악, 참 아니면 거짓, 흑 아니면 백, 옳음 아니면 틀림(.....)이어야 한다는 태도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회색지대나 중립지대에 있을지도 모르는 창조적 노력 속의 마술과 가능성에 아무런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 "회색지대"나 "중립지대"를 앞에서 '파타피직스'라 불렀음을 기억하자. (<이미지 인문학 1> p.295)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보자면, <빅 피쉬>의 아버지의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여겼다가 맨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환상을 만드는 주체로써 변화하게 된다. 이성적인 것만을 좇다가 마지막에야 비로소 비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깨닫는 존재가 된다. 이 과정은, 파타피직스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유사하다. 객관주의의 함정을 지적하며, '부정합의 정합'을 통해 이성적 인간이라는 환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파타피직스와 궤를 같이 한다.


<이미지 인문학 1>은 '몽타주의 미학'을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추상적으로 변해 그저 외관을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의 본질이 드러나지 않기에 진정한 현실은 오직 몽타주로만, 즉 가시적 현실을 해체하여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만 드러낼 수 있다(p.217)"며, 현실의 단순한 재현은 되려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일부 예술가들의 입장을 논한다. 현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빅 피쉬>의 아버지의 이야기가 실제의 경험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버지는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환상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을 뿐이다. 모순을 통해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만약, 아버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더라면, 아버지의 진심은 끝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큰 물고기와 같은 삶을 꿈꾸며 모든 순간을 여정이라고 여겼던 그는 거짓을 덧댄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꿈꾸던 자신이 되었다.


누군가의 환상은 그 사람의 내면을 투사하는 장치다. 비이성적인 것 속에 아버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 즉 자신의 진심이 담겨 있었던 것처럼. 이전부터 나는 항상 나의 꿈이 상상력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 왔는데, 그 이유를 대라 하면 그것을 명확하게 언어로 설명하긴 힘들었다. 이제는 조금은 그 이유를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상을 하지 않는다는 건 무뎌진다는 뜻이고, 더 이상 상상으로 투사할 나만의 내면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며 매 순간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팀 버튼의 <빅 피쉬>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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