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문 Sep 19. 2019

2. 선고

선고

“어디로 가십니까?”

민형에게 중년 남자가 차의 창문을 내리며 물었다. 그는 호방한 웃음을 짓고서 민형의 대답을 기다렸다. 민형은 잠시 망설이더니 남영 지원으로 간다고 짤막이 대답했다.

“아!”

남자가 잘되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러고서는 자신도 같은 방향이니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다. 민형은 늘 그랬듯이 ‘괜찮습니다만, 혼자 가겠습니다.’라고 하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이끌려 그 제안을 승낙했다.

민형이 조수석에 앉자, 남자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는 아무도 없는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가끔 부러진 전봇대가 보이기는 했으나,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방해되는 것은 차 안의 침묵이었다. 민형은 소극적인 성격이라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도 자신 있던 처음과 달리 운전 이후에 민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남영시 중정구 태흥2동에 사시는 김정현 씨 사연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라디오 방송은 그런 분위기에 상관없이 계속 떠들었다. 아나운서는 김정현 씨가 보낸 장문의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대강의 내용은 보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소식을 전할 길이 없어서 보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안타깝지 않습니까. 선생님?”

사연이 끝나고 음악이 흐르자, 남자가 민형에게 말을 걸었다. 민형은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덕분에 다시 차에서는 고요한 분위기가 흐를 뻔했다. 하지만 남자가 갑자기 속사포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는 덕분에, 민형도 조금씩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법원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국가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서 굳이 남영 지원에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었다. 민형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더니 비로소 문장 단위의 대답을 했다.

“직장에 나가는 것이지요.”

“직장이라. 법원이 직장이면 아무래도 판사?”

“그렇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민형이 남자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이겠죠?”

“특별하다면 특별할 겁니다.”

“들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흥미가 생겼습니다.”

“꽤 긴 이야기입니다만.”

그러자 남자는 ‘그렇다면’이라고 중얼거리면서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최후의 시간까지는 아직 꽤 남았으니. 조용히 듣고 가도 괜찮겠지요?”

“그렇게까지 한다면, 저도 거절하기 어렵겠습니다.”

민형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판사입니다.”

판사 이민형. 로스쿨이 생기기 전에 사법시험에 요행히도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기에 그에게 대형로펌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판사의 길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판사로 성공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었다. 수재들이 지원하는 핵심 지역의 법원이 아닌 한적한 남영 지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남영시는 수도권에 있었으나, 그리 눈에 띄는 지역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남영시라는 이름만 알고 있었고, 그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민형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래서 남영시를 선택했다. 아는 사람도 없이, 특별할 것 없는 도시에서 틀어박혀 일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출세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조용히, 하지만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망만이 있었다. 그가 사법시험에 매달리고, 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판사들의 정기 모임에도 잘 참석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그를 미스터 남영이라고 불렀다. 남영시의 존재처럼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름은 그럭저럭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는 내심 그 별명을 마음에 들어 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정립한 것을 확인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판사들이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서류 더미를 그는 좋아했다. 열정적으로 판결문을 작성하고, 갈등을 조정하고, 사건에 대해 알아갔다. 더욱이 그가 판결하는 사건들은 다른 것들에 비해 유독 합리적이어서 그는 남영 지원에 들어오는 변호사들에게 솔로몬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어느 날은 남영지원장이 진지하게 그를 불러 이렇게 물은 적도 있었다.

“자네는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이곳에서 재능을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네.”

“저는 여기에서 만족합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도 손실인데.”

“그래도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싶습니다. 사건에 파묻혀 살면서, 최소한의 인간들과만 접촉하는 저는 이 삶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지원장님. 진지한 관심 감사드립니다만, 저는 여기서 이 정도에서 저의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지원장도 더는 그에게 출세를 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는 듯이, 다음에는 더 한적한 곳으로 가라고 다른 지원을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민형은 지원장의 사려 깊은 제안에 감사해하며, 다음 인사이동 때 그곳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는 그 결정을 통보 받은 날에도 여전히 종이 더미를 헤엄치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영시를 떠난다. 다른 곳으로 간다. 그래도 늘 일을 하고, 혼자서 편하게 살아갈 것이다. 좋은 인생 패턴이다. 그는 확신했다.

“재미없다고 그런 삶.”

그의 몇 안 되는 친구가 말했다. 민형은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추구했고, 그마저도 깊게 이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민형에게도 지기라고 할 만한 친구는 있었다. 판사가 된 이후에 그와는 잘 만나지 못했지만, 만나면 민형답지 않게 꽤 긴 사교 활동을 했다.

“연애도 하지 않고, 취미도 없고, 맨날 밤늦게까지 일만 하다가 집에 들어가는 삶이 재밌다고 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민형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으며 술을 마실 뿐이었다. 이후에도 친구는 그에게 좀 더 재밌는 인생 그리고 활동적인 인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 그렇지. 민형은 추임새를 도중에 넣었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그런 충고를 했다. 민형은 처음에는 꽤 고민했지만 결국 무시하고 말았다. 조언을 받아들여 산악회에도 가입해보고, 학회에도 간혹 참석해 보았으나 모두 민형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런 시도를 할 때 마다 스트레스만 늘어 누워 앓아야만 했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그러면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강행하고는 했다. 이에 놀란 동료 판사들이 그를 만류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덕분에 민형이 병가를 쓴 것은 독감이 심하게 들었던 단 하루가 유일했다. 휴가도 가지 않았고, 아무도 없는 법원 안에서 혼자 서류를 검토하다가 경비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경비는 출근하면 민형이 있고, 퇴근 이후에도 민형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루는 그에게 도대체 언제 집에 가냐고 물었다.

“언젠가 가겠죠.”

웃으면서 민형이 대답했다. 하지만 경비는 그날 이후부터 법원이 폐쇄되는 날까지 민형이 출퇴근 하는 모습을 결코 보지 못했다.

민형의 이런 삶은 아무 문제 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돈은 충분했고, 지위도 있었고, 일도 적성에 잘 맞았다. 인간관계를 좁게 해도 평온하게 산다는 것이 민형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그의 삶을 찾아왔다. 지구가 멸망한다. 민형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것을 자신의 삶에 있어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이런 삶이 좋았고, 아무리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할 때도, 계엄령이 선포될 때도, 거리가 혼란으로 가득 찰 때도 그는 법원 한구석에 앉아 소장을 검토하고 판결문을 쓰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동료 판사인 정 판사는 컴퓨터를 집어 던져 버렸다.

“이제 다 끝났다고!”

하지만 민형은 그 말을 무시하고 종이를 꺼내 수기로 판결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 판사는 질겁을 하면서 법원을 뛰쳐나왔다. 민형은 정 판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상관 쓰지 않고 계속해서 판결문을 작성했다.

“그래서 지금도 법원에 판결문을 작성하러 가십니까?”

남자가 물었다.

“그렇죠. 아직 처리해야 할 사건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받을 사람도, 전달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충분히 압니다.”

그럼에도 법원으로 가는 민형. 계속해서 판결문을 작성하고 선고를 하는 민형. 남자는 자신이 낙천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봤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민형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왜 혼자 있고 싶으신 겁니까?”

“상처만 입을 뿐이니까요.”

민형이 대답했다.

민형도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과는 달리 사교적이어서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하지만 그가 중학교에 올라가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가장 믿었던 친구였던 한 군이 주도해 집단 따돌림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제로 혼자가 되었다. 급식도 혼자 먹고, 과제도 혼자 했으며, 하교도 혼자 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같이 있던 친구들이 한 번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자 민형은 한 군에게 애원도 하고 화도 내봤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급우들은 그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민형은 점차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저항이 아니라 순응해버렸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그러자 한 군을 비롯한 주동자들이 당황해 민형을 향한 따돌림이 잦아들었다. 일부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민형은 이제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혼자 있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생은 오히려 편해졌다. 민형은 그리 생각했다.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남과 접촉해서 얻는 정신적, 신체적 능력의 소모도 줄일 수 있었다. (그가 믿기에는) 그렇게 해서 자신의 건강은 (신체나 정신이나) 모두 맑아지는 듯했다. 그것은 고립을 정당화했고, 더 고립되는 인생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방 안에만 틀어박히는 사람은 되지 않았다. 그는 숨으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 살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의 부모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사람들과 접촉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할 수 있는, 하지만 적당한 돈을 벌 수 있는, 그러면서도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가 판사가 된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제가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게 한 것은 아닌지. 죄송하군요.”

남자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전혀요.”

민형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좀 더 괜찮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남자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차는 다시 출발했고, 곧 남영 지원 앞으로 도착했다.

“이제 가셔야겠군요.”

“정말 아쉽습니다.”

민형은 진심으로 이야기했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던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가. 아마 최근이라면 (비록 운석 충돌 예고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이 중년 남성뿐이었다. 하지만 민형은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내려야만 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디서 가시는지 물어보질 못했네요.”

“저는 저를 애타게 기다리는 김정현 씨를 만나러 갑니다.”

“아, 그럼 선생님께서 그...”

남자는 대답 없이 크게 웃을 뿐이었다. 민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웃다가 민형은 남자에게 매우 감사하다고 말하고서 차에서 내렸다. 남자의 차가 저 멀리 떠나는 것을 지켜본 민형은 그제야 법원 입구로 향했다.

법원 문은 폐쇄되어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혼란기 때 난장판을 벌이던 사람들이 다 파괴해서 문은 없어지고야 말았다. 민형은 깨진 유리를 피해 조심히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는 부서진 사무기기들과 알 수 없는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익숙한 상황이었기에 민형은 아무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정 판사의 사무실 앞을 지날 때는 얼굴을 찌푸려야만 했다.

“거기를 조금 더….”

알 수 없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대도 역시 남자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말은 한 사람만 했다. 다른 남자는 오직 신음만 뱉을 뿐이었다. 민형은 기물 파괴자들이 법원으로 들어왔을 때보다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민형은 한숨을 짧게 쉬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도 로비와 마찬가지로 심히 어질러져 있었다. 꽃병은 깨져 있었고, 책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난리 속에서도 자료는 무사했다.

민형은 수기로 써서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사건 문서를 살펴보았다. 책상 한쪽에는 자료가, 다른 쪽에는 빈 A4 용지가 놓였다. 민형은 처음에 자료 구석에 필기하더니, 곧 A4 용지에 옮겨 적으면서 쟁점을 정리했다.

그런 작업을 3시간 정도 하고 나자 자료와 A4 용지의 양이 거의 같아졌다. 그러자 민형은 A4 용지에 있는 내용을 검토하고 다시 그것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 작업도 다 끝났을 때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켰다. 민형이 법원에 도착한 지 7시간 되던 때였다.

“이제 판결문 작성하고, 선고에 들어가면 얼추 맞겠군.”

민형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신경 쓰이는 소음이 들렸지만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민형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A4 용지에 판결문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간혹 손이 저려 와 위아래로 크게 흔드는 것을 빼면 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판결문도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 민형이 작업에 들어간 지 4시간 만에 사건 자료와 동일한 양의 높이의 종이 더미가 하나 더 만들어졌다.

그제야 민형이 작업을 멈추었다. 그는 판결문에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가 찾는 법복은 옷걸이에 없었다. 평소에 그곳에 두었고, 기물 파괴자들이 왔을 때도 법복은 도난당한 적이 없었다. 분명 어제 출근했을 때까지도, 법복은 그 자리에 있었다.

“좀 살살….”

그 순간 민형은 듣지 못했던, 정확하게는 애써 무시했던, 소리를 다시 들어야만 했다. 이번에도 한 남자만 말을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바뀌어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법복을 가져가서 거사를 치르는 듯했다. 민형은 어쩔 수 없다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결국 옆에 있는 정 판사의 법복을 가져다 입는 수밖에 없었다.

“판사님께서 입정하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아무도 없는 법정 안에서 판사의 입정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앉아 주십시오.”

민형이 앉자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민형이 말했다. 뒤이어 민형은 선고 이유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 사안에 관하여….”

민형은 계속해서 판결문을 읽었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고를 마칩니다. 판결에 이의가 있으시면…”

첫 번째 선고를 마치고 민형은 서기석 쪽으로 판결문을 던졌다. 서기석에는 서너 개의 서류 봉투가 떨어졌다.

“판사님께서 퇴정하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다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법정에 가득 울렸다. 민형은 퇴정했다. 그러나 30분 뒤에 다시 법정 안에서는 ‘판사님께서 입정하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는 말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면 민형이 다시 들어오고, 목소리는 사람들을 착석시켰다.

민형은 이런 식으로 수십 번 법정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서기석에 쌓인 서류 봉투는 그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몇 개는 결국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판사는 계속 선고를 이어갔다.

“선고를 마칩니다. 판결에 이의가 있으시면….”

민형이 이 말을 14번째 반복하던 순간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역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판사님께서 퇴정하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민형은 그 말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켰다.

“판사님께서 퇴정하십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다시 그 목소리가 법정 안에서 울려 퍼졌다. 민형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판사님께서 퇴정…”

“이제 그만 하죠.”

민형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목소리에 응대했다. 그제야 목소리가 멈추었다. 법정은 다시 고요로 가득 찼다. 그러자 민형은 의자를 뒤로 빼고 기지개를 켰다.

“이제 정말로 끝났군.”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끝났어.”

눈을 감으며 민형이 반복해서 말했다.

“언제나 혼자였어.”

그는 출근길에 만난 남성을 생각했다. 그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을 겪으러 간다. 그의 분위기에 감화되어 그때는 웃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보니 비교당하는, 우울한 일이었다. 그것을 지금에서야 생각하니 민형은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어땠던가. 그 남자에 비하면 얼마나 좁았는가.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상했다. 그 사건 이후로 늘 혼자였다. 가끔 만나는 친구 정도는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깊게 사귀지는 않았다. 혼자 살기 위한 적당한 숨통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완벽하게 혼자 사는 인생을 만들었다. 적당한 돈, 번듯한 직업, 숨통을 틔워주게 할 친구들.

그 모든 것이 만들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천국에 왔다고 생각했다. 방해할 사람도 없다. 오히려 인정까지 받는 그런 삶. 그러나 그것을 그것이 자리 잡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신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지구가 멸망하는 것은 확정되었다.

민형이 그런 상황에 맞서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지구의 멸망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 일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계속 법원에 나왔다.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를 위협할 때도, 식량이 떨어져서 굶어 기력이 없었을 때도 그는 법복을 입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처리해야 할 사건도 다 떨어졌다. 다른 판사의 사건 기록을 가져왔음에도, 그가 처리할 것은 방금 다 사라졌다. 정말로 이제 할 일이 없어졌다. 일이 있다는 이유로 그가 일구어낸 삶이 아직 건재하다고 속일 수 있는 것도 끝났다. 그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두려운 현실. 모든 삶이 무너진 현실. 이제 민형이 할 수 있는 일은 종말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억울했지만, 삶이란 원래 그랬다. 사교적이었던 민형이 혼자가 되고. 장래 희망에 넣지도 않았던 판사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 그의 장래 희망은 외교관이었다) 갑자기 인생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으니, 끝나는 것도 예고 없이 충분히 찾아올 수 있었다.

민형은 처음에 ‘운석이 떨어지고 지구가 멸망합니다.’라는 멘트를 들었을 때부터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성으로는 이미 모든 것에 초월했다. 감정은 그것이 조금 느렸을 뿐이었다. 감정을 위해 민형은 열심히 일했고, 이제 감정도 현실을 경험해야 했다.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민형이 생각이 잠겨있던 중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로 이제는 현실에 있군. 민형이 중얼거렸다. 신음은 민형이 법원에 출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들렸다. 간혹 격한 말을 쏟아내며 욕정을 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민형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것이 판사의 입정과 퇴정을 알리는 소리라고 멋대로 생각해서 들었다. 신음은 웅성거리는 방청객의 소리라고 규정되었다. 민형은 그 정도로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는 것은 그 노력도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민형은 계속해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간혹 남자들의 목소리와 입퇴정 소리가 섞여 들렸지만, 최대한 넘겨왔다.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민형은 그들의 목소리를 처음에 들었을 때처럼 다시 한숨을 짤막이 쉬었다. 그러고서는 법복의 소매를 걷었다. 그의 눈에 연약한 팔뚝이 보였다. 잠시 그 팔뚝을 응시하던 민형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곧 법정에서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민형은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선고를 마칩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긴 잠에 빠졌다. 법정 안에는 남자들의 교성만이 울려 퍼졌다.

- Fin.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1. 유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