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목사에게 커밍아웃한 이야기
성소수자에게 있어 커밍아웃이란 엄청난 용기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또한, 아무리 간단하게 하더라도, 그것을 했다는 것 자체로도 성소수자의 기억 속에 오래 남고는 한다. 그만큼 드문 일이며, 중요한 일이다. 그런 커밍아웃 경험 중에서도 특히나 기억에 남는 일이 나에게 하나 있다. 많고 많은 커밍아웃 스토리 중에서 그것을 먼저 떠오른다는 것은, 강렬한 인상을 끼쳤다는 소리겠다. 그 경험은 군대에서 시작한다. 당시 나는 믿을만한 ‘병사’에게만 커밍아웃을 했다. 간부한테는 단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부대관리훈령의 동성애자 관리 조항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아웃팅 금지, 커밍아웃 사실 누설 금지 등) 군대란 그런 면에서 참으로 믿기 힘든 조직 아니었던가? 더욱이 관심병사인 내가 간부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사실은 나를 둘러싼 군대라는 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간부에게 하는 커밍아웃은 나를 죽음으로 몰면 몰았지, 전혀 긍정적인 현상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나는 군대에 있는 간부에게 커밍아웃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 대상은 군종’목사’다. 기독교계에 성소수자에 우호적인 성직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군대에서 (그것도 한국에서는 군형법의 그 조항이 있지 않던가) 어쩌면 가장 난리를 칠지도 모르는 목사에게 커밍아웃했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나는 왜 하필 군종목사님에게 커밍아웃을 했을까. 사정을 좀 자세히 말할 필요가 있다. 한참 미국 대선이 한창이던 시기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 부대의 군종 목사는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목사였는데, 그동안 보던 군종목사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내가 있는 부대는 1급 격오지 중에서도 격오지로 통하는 지역이었는데, 이곳을 자원해서 왔다고 한다. 선교라는 소명을 위해서 왔다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목사 안수를 받고 맨 처음으로, 그것도 군부대를 그렇게 선택에서 왔다고 생각해봐라. 처음에는 얼마 못 가서 의지가 꺾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초심은 의욕적이더라도 결국 좌절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군종목사님은 내가 부대를 떠날 때까지 의욕적이었다. 병사들과 어울리기 위해 보드게임을 잔뜩 구매하기도 하고, 와플을 구우면서 사람들을 교회로 유도하기도 했다. 사람을 편견 없이 다루기도 했다. 그런 점 때문에 관심병사였던 나는 그를 부대에서 몇 되지 않는 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입원했을 때도 큰 역할을 했다. 그때의 나는 정신이 나간 상태였는데, 그가 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항상 그에게 고마움과 더 나아지지 않는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동시에 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목사라고 해도 그건 나에게 무리였다. 군종실에는 그가 읽던 기독교 잡지가 있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라는 잡지였다. 나는 개신교인이 아니었지만, 미국 대선을 다루던 기사가 있어 그것을 한 번 훑어봤다. 거기에는 동성애에 대한 확고한 입장,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것을 죄라고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목사님에게 절대로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A 대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움츠러들었다. 신체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감에 지배당했다. 두려움에 몸이 떨리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주제였다. 그런 나는 힘겹게 군종실에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그는 나의 걱정에 관해 물었고,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있는 군종실에서 커밍아웃을 했다. 그러고서 부디 사실을 밖에 알려주지 말라고 애원했다. 목사님의 반응은 전환치료를 주선하는 것도 아니었고, 나를 훈계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동성애자인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나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절대밖에 노출하지 않겠노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의 태도에서 비로소 편견을 집어 던지고 그를 믿게 되었다. 이후 그의 책장에는 책이 몇 권 늘었다. 그는 나에게 그것을 직접 소개해주었다. 텀블벅에서 동성애자 군인의 수기를 출판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샀다고 했다. 그는 나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행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결코 자신의 의견이나 감상을 꺼내지도 않았다. 사소한 말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 나라는 게이를 배려하는 조치로서는 최고였다. 나는 그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하고 군대를 떠났다. 그래서 그가 동성애에 대해 견해를 바꿨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군대 안에서든 밖에서든 성소수자를 만난다면, 그 성소수자가 목사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그는 이해하려 했고,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이 험난한, 성소수자에게 특히 그런 세상에서, 그 정도로도 목사라는 직업은 나에게 충분히 위안을 줄 수 있었다. 목사님은 아마 오늘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를 읽을 것이다. 히브리어 직역 성경을 보면서 공부할 것이다. 보수적인 교리서를 보며 설교를 준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는 그런 사실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교회에 있는 다른 혐오 세력들과는 다른 접근법을, 그리고 예수가 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 교회가 소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산다. 교회에 여전히 혐오는 넘쳐나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오늘도 그 목사님을 생각하며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