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반드시 오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유행어
‘제4차산업혁명.’ 이 단어만큼 최근 한국 사회를 장악한 단어는 없다.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에는 ‘제4차산업혁명’, ‘인공지능’이라는 단어가 붙은 책이 상위권에 오르고 있으며,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스펙에 ‘코딩’을 추가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정치권에서도 혁신을 이야기할 때 심심치 않게 해당 단어들을 써먹고 있는 형국이다. 이제 그 내용을 우리가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미래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새로운 산업혁명은 유행어로 사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제4차 산업혁명이 왔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아니면 애초에 잘못된 개념인가. 이 주제에 대하여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미래상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 하나는 분명하다. 우리는 이 단어에 대해 극단적인 두 개의 미래상을 그리고는 한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대량 실업 사태가 일어나며, 기계가 사회를 장악하는 디스토피아와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풍요롭게 사는 유토피아. 무엇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전망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확실한 사실은 가까운 미래에 기술혁명이 도래한다는 것에 있다. 인류는 새로운 기술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시리나, 빅스비와 같은 인공지능 비서를 지금도 호출할 수 있지 않은가? 기술이 받아들여지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최선은 혼란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4차산업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예측했다면,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있다.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인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회주의 유토피아?
누군가는 이런 기술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기술로 인류는 비로소 완전한 계획경제에 근접할 수 있고 생산력의 증대로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것 가져가는’ 마르크스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칠레 사회주의 정부였던 아옌데 정부 하에서의 ‘사이버신 계획’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확실히 기술의 발달은 사회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기반을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더 많이 대체하여 진정한 노동해방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정밀한 경제 예측을 통해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을 획기적으로 제거시킬지도 모른다. 20세기 사회주의는 그런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로 무너졌을지 모르지만, 21세기에 시작될 새로운 사회주의는 정말로 다를지도 모른다.
기술은 좌파에게 장밋빛 미래를 던져 준다. 그런 점들을 생각해보면 사회주의는 벌써 실현된 것 같다는 환상이 들 정도로 강한 확신을 준다. 유토피아는 결국 기술의 발달로 오는가? 마르크스의 예언은 결국 현세에 도래하는가? 하지만 우리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단순히 기술의 발달로 저절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기술의 발달, 경제의 부흥이 유토피아를 이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1930년 발표한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이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100년 뒤를 전망한다. 그는 100년 뒤에 우리의 살림살이가 8배나 더 나아질 것이므로, 하루 노동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루 3시간. 주 5일을 기준으로 하면 15시간이며, 일주일 내내 노동을 한다고 해도 21시간이다. 하지만 이 말은 2020년대가 찾아온 지금 ‘이상한 소리’로 여겨질 정도로 틀려버리고 말았다. 현재 한국의 노동시간은 최저 40시간, 최대 52시간인 현실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1930년과 2020년을 비교해보자. 산업도 더 커졌고, 기술은 당시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시간은 케인즈의 예상과 달리 아직도 하루 8시간이 표준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술 자체가 발전할 것이라는 사실은 합리적인 미래 예측이지만, 그것이 획기적인 유토피아를 불러올 수 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반드시’ 온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다.
자본주의는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오히려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해가며 유지될지도 모른다. 사회주의 유토피아보다는 자본주의 산업혁명이 테마만 바뀐 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생각해보자. 자본주의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바꾸어가며 존재해왔다. 19세기의 자본주의와 21세기의 자본주의가 완벽하게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여전히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며 자신들의 부를 증식시키지만, 착취의 형태는 19세기의 산업혁명 때와는 다르다.
위기는 많았다. 사회주의가 등장했고, 대공황이 찾아왔다. 하지만 몇 가지의 수정을 거쳐 이 체제는 생존했고 지금도 우리 눈 앞에 있다. 제4차산업혁명이 도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자본주의는 대안을 찾은 것 같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보자. 기본소득은 아무 조건 없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기본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소득을 지급하는 정책이다. 광범위한 대상으로 그것도 꽤나 큰돈을 준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좌퍼적’인 어떤 것으로 통하지만 세계적으로는 반드시 기본소득이 좌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나태해진 사람들 덕분에 사회가 급격히 붕괴될 것 같지만, 역으로 대량실업으로 인해 노동자가 상실할 구매력을 보충해줘 자본주의를 지탱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반드시 유럽 등에서 우파 정당이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에 걸맞게 모든 복지를 기본소득을 대체하고 국가의 효율화를 꿈꿀 수도 있다. 기본소득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자만 꿈꾸는 것이 아니다. 좌파 일각에서 소망하는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방안은 역으로 자본주의에게도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결국 어떤 정책으로, 기술의 혁명으로 사회주의는 간단하게 도래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그 모순의 심화 속에서도 자동으로 붕괴될 가능이 낮다. 애초에 ‘제4차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나왔는가? 자본가들과 그의 옹호자들이 가득한 ‘세계경제포럼’ 아니었던가. 물론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스스로 무덤을 파고는 하지만, 그것이 ‘제4차산업혁명’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황급한 추론이다. 만일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도래하기를 바란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기술혁명에 대한 낙관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갑자기 올 수 있지만, 자동으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에 대한 낙관, 특정 정책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버리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물건을 공유하는 공유경제가 아니라,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화로. 구매력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아니라, 수준 높은 무상복지로. 그것들을 한 번에 급격히 실현시키거든, 점진적으로 구현하든 사회주의자는 모든 상황에 대비해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것이 제4차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좌파의 유일한 태도여야 한다. 그람시의 말대로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자. 미래를 꿈꾸되, 현실의 변화를 보자. 그때서야 비로소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향한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