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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May 21. 2022

연애일기 10. 청춘사업(외할머니의 질문들)

 "청춘사업을 해야 돼. 젊은 사람들이 청춘사업을 안 하면 못써."

연애일기 10. 청춘사업(외할머니의 질문들)

멋쟁이 외할머니의 말들, 푸르던 날에 한옥 카페에서 많이 웃으며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다. 청춘사업을 논하던 외할머니의 중요한 질문들,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어르신들의 말에서 통찰력을 느낄 때마다 감탄한다. 어버이날에는 반드시 효도를 하자. 얻는 것이 생긴다.  


    어버이날 주말에 본가에 내려가서 엄마, 이모, 사촌동생과 함께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뵈었다. 항상 유쾌하고 인자하시며 재밌는 말을 잘하시는 우리 할머니.(평소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구분해서 지칭하는 상황 외에는 항상 외할머니를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금부터 따로 '외'자를 붙이지 않고 '할머니'로 쓰겠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뵈어 참 좋았다. 날이 좋아서 우리는 넓고 탁 트인 한옥 카페에 갔다. 남자친구가 부모님께 달아드리라고 사준 카네이션 중 하나를 할머니께 달아드렸다.(나의 부모님은 꽃을 달고 다니는 건 왠지 멋쩍다며-할머니 할아버지 같다며-할머니들께 달아드리자고 제안하셨다. 할머니들이 너무 좋아하셨기 때문에 탁월한 선택이었다. 직접 챙기지 못했는데 남자친구 덕에 조부모님께도 효도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이쁜 것을 가지고 왔디야, 하는 할머니께 우리 엄마는 "지 남자친구가 사줬대요, 어버이날이라고." 하며 너스레를 떨며 자랑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했다. 할머니는 "남자친구가 있어?"하고 물으시고는 (남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하자)"그래, 청춘사업이 중요한 거여. 젊은 사람들이 청춘사업을 안 하면 못써." 라고 하셨다. 우리는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청춘사업이란 연애를 뜻하는 말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의 연애를 '청춘사업'이라고 부르는 걸 직접적으로 처음 들어봐서 재밌었다. "저 청춘사업 열심히 해요, 할머니." 하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래야지. 열심히 잘해야지." 하시고서 남자친구에 관해 딱 세 가지를 물으셨다.


 1)"성격은 괜찮냐? 다정하고 너를 아껴주는지가 중요해."(다정하고 나를 아껴줌. 성격 괜찮음. 합격.)

 2)"직장은 다니고? 멀쩡한 데 다녀?"(멀쩡한 직장 다님. 합격.)

 3)"잘 생겼냐?"(언니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어요, 하는 사촌동생의 증언에 할머니의 기대치가 높아졌을 것 같아 살짝 걱정했지만, 사진을 보여드리니 번듯하게 잘생겼네, 하심. 합격.)

    남자친구가 나를 아껴준다는 말에 "남자가 너를 존중하고 아끼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야, 다른 것보다 그게 제일로 중요해."하고 진중한 얼굴로 말씀하시던 우리 할머니. 어르신들의 말을 들으며 삶에 대한 통찰력을 느낄 때마다 나는 경탄한다. 뼈에 새겨야 할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나온다. 할머니 말이 정말 맞다. 나를 존중하고 아끼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아끼는 것이 청춘사업의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

    직장이 멀쩡하다는 것은 성실성과 기본적인 경제 능력을 뒷받침하는 증거이기에 할머니의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의 두 번째로 등장했다. 할머니는 "집안이 좋냐?(=돈이 많냐?)"같은 여느 어른들의 단골 질문은 하지 않으시고 직장은 다니는지, 직장이 멀쩡한지를 물으셨다. 손녀의 교제 상대가 아주 기본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지를 확인하신 것이다. 어르신들의 말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담고 있다.

    세 번째 질문이 "잘 생겼냐?"('잘'과 '생겼냐' 사이에 잠깐의 쉼, 억양의 차이가 있었으므로 우리가 말하는 '잘생겼다(=핸섬하다)' 보다도 '멀쩡히 생겼냐'를 물으신 것으로 파악됨)였던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격이 괜찮고 나를 아껴주고 다정한 남자라면, 그리고 멀쩡한 직장을 다닌다면, 할머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다음의 요건은 '잘 생겼는지'이다. 이것이 바로 어르신의 통찰력이다. 남녀노소 불문, 잘 생긴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 할머니의 이러한 질문은 잘 생긴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던 풍조는 거짓된 것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여든을 앞둔 우리 할머니도 잘 생긴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대답 대신 남자친구의 사진을 보여주자 할머니는 "번듯하게 생겼네, 이런 잘생긴 아들내미는 어디서 났을꼬." 라고 하셨고 우리는 또 다 함께 웃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바람을 쐬며 차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좋은 계절의 좋은 시간이었다. 화단에는 여기저기 꽃들이 피어있었고 아이들은 너른 정원에서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우리는 모여 앉아 할머니의 이야기들을 즐겁게 들었다. 할머니는 나의 남자친구에 대해 질문하신 후로도 청춘사업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셨다. 주변 분들의 자녀들이나 손주들의 청춘사업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도 물으셨다. 나는 웃으며 "아직 모르겠어요, 00언니 결혼하면 저도 할게요.(00언니는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언니이며 그 언니가 결혼하지 않는 한 나는 어르신들의 질문에 언니를 방패 삼아 너스레를 떨며 답할 수 있다)"하고 평소에 하던 대로 답을 드렸다. 내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더라도 내가 '청춘사업'을 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할머니는 만족하신 것 같았다. 할머니 덕분에 많이 웃은 봄날의 오후였다. 사랑을 하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배워가는 유익한 시간이기도 했다. 어버이날에는 반드시 효도를 하자. 5월에는 바람을 많이 쐬고 맛있는 차를 마시며 함께 웃자.


화단에 피어있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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