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혼주의 역사, 나의 역사
연애일기 번외편: 비혼주의, 흔들리다 (1)
나의 비혼주의 역사, 나의 역사
나는 10대 때부터 확고한 비혼주의자로 살아온 것 같다.
'비혼주의'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는 스스로를 딱히 '비혼주의자'로 명명하지는 않았다.
연애는 취미처럼 계속 해왔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는 말이 더 적절한 듯하다.
'비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고 돌아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비혼주의였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남을 쉽게 판단하기 좋아하는 얕은 사람들은 누군가 '비혼주의자'라고 하면
'가정환경이(보고 자란 부모 사이가) 안 좋았던 것 아니야?' 하고 단순하고 납작하게 추측해서 사람을 재단하려고 한다.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성립이, 살아가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고 납작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한 개인이 매우 입체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런 이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쉽지 않고,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가치도 크게 없다.
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 '평범함'이 어쩌면 갖추기 힘든 조건이라는 것을 자라오며 새삼 깨닫는 날들이 많았다.
내가 어릴 적 나의 부모님은 여느 부모가 그렇듯 때때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여름에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휴가지로 여행을 떠나 단란하게 사진을 많이 찍곤 하던, 두 자녀를 키우며 생계를 꾸리고 젊은 시절을 치열하게 보내던 평범한 부부였다.
또래들에게서 들은 가정사를 종합해 보았을 때, 나의 가족은
지극히 평범한 60년대생 부부와 90년대생 자녀 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유년기,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을 꾸리고 나를 돌보는 일에 주력했다고 한다. 내가 여섯살 때, 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동그랗게 거대해진 엄마의 손을 잡고 같이 산부인과에 다니던 길을 기억한다. (그 때 엄마의 손을 잡고 걸으면 내 머리는 만삭인 엄마의 동그란 배 옆에 있었다. 나는 엄마의 배를 자꾸 쳐다보았다.
그때 엄마가 입던 임부복 원피스의 결과 색감을 기억한다.)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외가 식구들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했고
엄마는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마 외할머니가 동생을 돌보아 주셨을 것이다.
동생이 어린이집 종일반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동생을 케어하는 일은 어린 나의 몫이 되었다. 그때 살던 동네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중에서 내 동생이 가장 어렸다.
열 살인 내가 학교를 마치고 나서 다섯 살인 동생을 데리러 유치원에 가서 동생의 손을 잡고 나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친구들과 함께 놀 때도 나는 항상 어린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 내 친구들은 내 동생을 귀여워했고, 부모님은 집에 안 계시고 돌봐야 할 귀여운 동생이 있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놀다 가는 일이 많았다.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동생과 함께 오후를 다 보내는 일도 많았다. 젊은 여자였던 피아노 원장님은 참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참 맞는 말이고 애틋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이 다니던 미용실 사장님도 기꺼이 나와 내 동생이 미용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 미용실을 운영하던 예쁜 언니가 내 머리를 만져주고, 손님들이 오면 나와 동생은 조용히 둘이서 무언가를 만지작대며 놀고, 예쁜 언니가 나와 내 동생에게 간식을 주고 동생과 눈을 맞추고 놀아주고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퇴근한 엄마가 미용실에 와서 고맙다는 인사치레와 함께 우리를 데리고 나와서
맞은편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에 들어가던 게 기억난다.
저녁에 동생과 둘이서만 집에 있을 때면 엄마가 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이야기이다.
10대 시절에 나는 내 또래 장녀들이 그렇듯
엄마가 자녀를 케어하는 동시에 직장 생활을 하고 살림까지 도맡아 해내는 걸 직접 곁에서 보면서, 도우면서 자랐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어도 장녀가 아닌 입장(형제에게 케어를 받는 입장) 혹은 딸이 아닌 아들이 맞벌이를 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입장은 또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딸과 엄마는 성별이 같으니까.
10대 시절 내내 아빠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가 내가 이렇게 말한다는 걸 알면 서운하시겠지. 하지만 사실이라 어쩔 수 없다.)
부모님이 주말부부이던 시절이 길었고, 아빠가 매일 함께 살 수 있었던 잠깐의 시절엔
아빠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아빠는 늘 지쳐 보였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다.
야근을 하면서도 육아와 살림까지 병행하던 엄마는 언제나 지친 아빠를 위해 더 노력했다.
나의 학교 알림장을 보고 챙기는 것도, 나의 담임교사와 직접 상담하러 가지는 못하지만 죄송하다고 전화를 드리고 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일도 엄마의 몫이었다.
(나는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어쨌든 엄마의 몫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사랑했다. 어떻게든 더 좋은 것을 주려고 노력했다.
동생이 더 자라서 내가 케어할 필요가 없어지고, 부모님이 경제적, 시간적으로 더 여유로워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공부를 해서 멀리 있는 기숙사 학교로 떠났다.
내가 명문고등학교에 입학해서 3년 간 멀리서 생활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은 기쁜 동시에 못내 아쉬웠을 거라고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 부모가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게 되었던 때부터 나는 10대 후반의 사춘기 시절에 접어들었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집을 떠나 곁에서 멀어지기까지 했으니 부모님 마음이 어땠을지, 그 땐 몰랐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가늠이 된다.
동생에 대한 책임감, 엄마에 대한 부채감(이 부분은 많은 장녀들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렸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힘들어한다는 것을. 엄마는 언제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서 내가 잘하지 않으면, 엄마를 기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반장이 되고, 1등이 되고, 성실하고 똑똑하고 문제없는, 학교에서 칭찬받는 아이로 살았다. 나는 엄마의 자랑거리였고, 엄마가 그것에 기대어 버텼다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 상장이나 임명장, 100점 맞은 시험지를 내밀 때 엄마의 환한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언제나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아이인 나를 엄마가 병원에 데려갔을 때 의사선생님이 하던 말을 기억한다. "애가 너무 착해서 그래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 말의 의미도 알았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에 짓눌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나는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내 삶을 살고 싶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집을 떠나 지내며 비로소 본연의 자아를 형성한 나는
대학 시절에 부모님과 많이 다퉜다.
학창 시절 동안 누구나 그렇듯 나도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고, 남자친구가 있던 적도 있었고
첫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애절한 짝사랑도 해보았고,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도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나는 이런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 나는 몇 살 때 결혼하고 싶어, 나는 나중에 딸을 낳고 싶어, " 같은 말을 할 때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었어도
다른 걸 꿈꾸고 있었다.
나는 평범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 평범함을 이룩하는 것이 많은 이들의 꿈이자 이루기 힘든 꿈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평범하게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살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해보고 살았다.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고 지향하는 바가 너무도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가 시인이 되고 싶었다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가 음악을 하고 싶었다가 배우가 되고 싶었다가, 그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가 했다.
딱히 결혼에 부정적이었다기보다 내 머릿속은 온통 하고 싶은 일로, 되고 싶은 것들로 가득해서 다른 생각이 자리할 틈이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내가 꿈꾸던 것에는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되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생 때였을까, 대학생 때였을까. 문득 궁금해져서 엄마에게 물은 기억이 난다. "엄마는 뭐가 되고 싶었어? 뭘 하고 싶었어?
결혼하고 일 그만 두기 전에, 나 낳기 전에, 하고 싶은 거 없었어?"
엄마는 유아교육과를 전공했고
마당과 정원이 딸린 커다란 유치원 건물을 지어서
원장님이 되어 그곳을 운영하고 싶었다고 했다.
많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을 꾸려서 운영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나처럼.
하지만 나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으니
꿈꾼 적은 없지만, 가장 큰 꿈을 이룬 거 아니겠냐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엄마가 언제든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했고, 엄마는 그럴까, 하고 웃었다.
엄마는 멋있는 사람이고 동시에 존경할만한 커리어우먼이다.
결혼하기 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서 커리어를 쌓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두고 나를 낳아 키우고
다시 일을 해야 했을 때는 경력이 단절되어 작은 회사에 고생하며 다니던 엄마는
결국 가족 사업에 참여해서 작은 기업을 일구고 현재까지 기업을 이끌고 있다.
우리 아빠 또한 멋있는 사람이다. 아빠는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아빠로부터 문화적인 자원을 많이 물려받았다.
가장으로서 아빠가 짊어져야 했던 무게 또한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사업을 하고 실패도 하고 좌절도 하고 다시 딛고 일어나는 과정을 겪는 동안에
우리 아빠도 젊었다. 지금 아빠에게 묻기는 너무 늦었을까? 아빠의 꿈은 뭐였는지.
한 가정을 행복하고 든든하게 일구어 살아가는 게 아빠의 꿈이었을까?
작은 지역에서 태어나 수재 소리를 들으며 도시로 나와 공부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아빠는
젊은 날 스스로 품었던 많은 가능성과 꿈들을 포기하지는 않았나?
아빠는 아빠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현재 엄마와 함께 가업을 이끌고 있다.
나와 내 동생은 엄마, 아빠가 각자의 꿈을 뒤로 하고 젊은 날을 모두 바쳐 이룰 만한 꿈이고 성과였다.
둘 다 문제없이, 사고 친 적 한 번 없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부모를 보며 종종 생각한다.
그들은 운이 좋았다고.
부모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자녀가, 누군가의 자식인 모든 인간이
부모가 원하는 대로, 혹은 무탈하게 잘 자라지는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고 싶은 것 같다. 모든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지 않는다.
혹은 원하는 대로 자라는 과정에서 나처럼 상처를 입기도 한다. 부모가 의도한 상처가 아니지만, 나는 언제나 책임감과 부채감,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압박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런 흔적은 삶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종종 생각한다.
부모가 자신의 젊은 날을 바쳐 우리를 일궈낸 만큼, 우리는 잘 살아야 한다고.
나의 부모가 나를 키워내기 위해 포기한 것들의 무게를 나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삶이기도 하다.
누구도 스스로 태어나기로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가 낳기로 선택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삶이 주어진 것은 축복이지만, 자식을 낳기로 선택한 이 또한 그만큼의 책임을 져야 한다.
(길에서 태어난 고양이를 입양해 기르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매일 한다.
내가 책임지기로 선택해서 데려 온 아이니까 최선을 다해 키우고,
내가 할 수 있는 희생을 모두 감내해야 한다고.)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나의 부모님처럼 해낼 자신도, 부모님처럼 운이 좋을 자신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비혼주의는 어느 정도 그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비혼주의가 흔들린 지금에 와서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전제, 확실한 합의가 있다면 나는 언제든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인 나의 직간접적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남자는 결혼을 원할 때 아이를 갖는 것까지 당연하게 생각한다.)
나 또한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나는 대체로 부족함 없이 자랐고, 가지고 싶은 것을 대부분 다 가졌으며, 지금도 내 부모를 사랑한다.
나와 동생이 모두 독립해서 따로 사는 지금, 부모님은 다른 부부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필드에 다니고
종종 멋진 사진을 찍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고
둘이서 도란도란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여전히 서로의 사소한 습관들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하다. 10년을 애틋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30년을 살고도 아직도 저렇게 사소한 걸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그러면서도 여전히 서로 아끼는 모습이.
최근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런 게 함께 사는 거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비혼주의를 단일한 이유로
납작하게 치부하고 싶은 이들에겐 유감이지만
좋은 부모 밑에서 화목한 가정의 평범함을 누리며,
그리고 현재에 와서는 평범함 그 이상을 누리고 받으며 살아온 이도 비혼주의자가 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부모가 무엇을 희생하며 이 모든 것을 이룩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유년시절과 내 생을 돌아보았을 때, 살아가는 일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나처럼 연애를 지속하는 이들도 비혼주의자로 살 수 있다. 결말을 바라보며 연애를 하지 않거나
연애의 결말이 반드시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 사랑의 목표를 결혼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이 어쩌면 사랑의 과정은 될 수 있지만 결코 도달점이 될 수는 없다. 결혼을 한 시점부터 사랑은 더 거대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부모의 역사, 나의 가족의 역사, 나의 역사를 돌아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내 세대의 많은 여성들이 비혼주의자로 사는 것은
한마디로 설명 가능한, 단순하고 납작하거나 단일한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며
각자의 역사와 다양한 간접 경험, 상황과 신념을 비롯한 가지각색의 이유들이 있을 거라고.
그리고 각자의 그 이유는 누군가의 비혼주의를 납작한 것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역사를 거쳐오며 나는 비혼주의자로 살았다.
그리고 나의 오랜 신념을 흔들리게 하는 사람을 만났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