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 것
‘그래서, 무슨 내용이었을까?’
영화가 끝난 후, 같이 본 사람과 나눈 이야기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뉘앙스인지조차 잘 모르겠는,
이야기의 맥락, 엄마의 방, 큰아버지의 의지와 같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좋아하던, 혹은 자주 봤던 류의 영화가 아니기에 더 그런가 싶기도 하고.
원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가장 최근에 재미있게 본 영화는 탑건:매버릭.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라따뚜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
행복한 끝이 정해진 것을 좋아한다. 내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담긴 취향이려나?
뭐, 대부분의 한국사람이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하니, 어쩌면 학습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영화가 끝나고 밥을 먹으면서 몇 가지 해석영상을 찾아봤는데, 듣고 나서야 좀 고개가 끄덕여지는 정도.
뭔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 것 같다고 결론지었다.
내부적으로 진행했던 영화 시사회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으시죠?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말과 영화의 내용이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떠오른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줄기 중 하나를 언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러니한 우리의 인생, 순간순간 이성적이고자 하지만 결국 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선택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오묘하고도, 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들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왜가리,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뿐만 아니라 바다, 돌, 철문까지
모든 것들에 의미가 담겨있다고 해석영상들은 이야기한다.
큰아버지가 건네는 13개의 돌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3개의 작품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요소들에 모두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 경이롭고 어지럽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 있는 굉장히 사소하고도 많은 물건들이 꽤나 의미 있다는 생각도 든다.
차키에 달린 쿼카 키링은 나를 닮았다는 이유로 선물 받았고, 같이 달려있는 가죽 키링은 연인과 함께 직접 만들었다.
어떠한 이유로 내 입맛에 맞았는지 모를 간식들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항상 내 곁에 있다.
화장대에 올려진 디올 블루밍부케 향수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냄새를 맡기 위해 가져왔고, 15년이 지났다.
쿼카 키링은 나고, 가죽 키링은 연인이고, 간식은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고, 향수는 엄마다.
이것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있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중심에는 내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직렬이고 또 어떻게 보면 병렬이다.
이것들은 결국 오늘의 나를 이루었지만, 이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긴 어려울 수 있다.
아버지의 방위사업으로 먹고산 전쟁을 싫어하는 주인공이 왜가리를 만나지만,
아버지와, 아버지 사업과, 왜가리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진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 싶다.
하지만 결국에는 나를 이루고, 다듬고,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한 의미 있는 요소들이라는 것에는 같은 색깔을 띤다.
이 독립적이면서도 독립적이지 않으며,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인생이 된다.
매일매일 세포가 떨어지고 또 새로 생기듯, 인생과, 자아와, 가치관들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생겼다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진다.
그래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고 하는가 보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가장 압축해서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사랑‘, 그중에서도 특히 연인과의 사랑인 것 같다.
T 90%의 남자도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사고, 편도 40분 거리에 있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배차간격이 25분이나 되는 버스를 타고 간다.
F 90%의 여자도 그가 생각하는 ‘이성적 판단’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서운함 한 귀퉁이는 접어두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본다.
비효율과 스트레스가 뒤섞인 인간관계의 끝, 납득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인 것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발버둥이 모여 사랑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
완벽히 이해되는 사랑이 없듯, 완벽히 이해되는 인생도 없는 듯하다.
나조차도 오늘의 내가 어제 한 ‘일찍 자겠다는 결심’을 왜 이렇게까지 지키지 못하는지 의문이다.
특별히 심각할 일 없었던 지난주 수요일, 불안에 잠식당해 찌그러진 미간을 펴지 못했던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 상태로 꾸역꾸역 수영하러 갔더니 한결 나아진 내 상태도 원리를 알 수 없다.
출근하기 전에는 홈프로텍터를 꿈꾸다가도, 막상 출근하면 닥친 일을 완벽히 해내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매거진 ‘엄마 둘, 아빠 둘’의 [7.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엄마, 아빠가 이혼했으니까.
왜 엄마, 아빠가 이혼을 했지? 둘이 갈등을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그럴 거면 둘이 왜 결혼했지? 왜 나를 낳았지?
왜? 왜? 왜 그랬지?
근데 엄마, 아빠가 이럴 줄 알고 시작했나?
왜 그랬냐는 질문을 던지는 게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자꾸 왜, 왜 거리고 있지?
왜가 필요한 때가 있지만, 불필요한 때도 있는 것 같다.
왜가 불필요한 곳은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이 인생의 아이러니 영역인 것 같다.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 한들, 어쨌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어떻게 살지를 결정해야 한다.
수수께끼를 풀어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면 풀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 때는 그저 수수께끼 그 자체로 있게 두는 것이 나은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과학과 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수많은 것들이 그렇다.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 객관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결정과 판단에 경험과 주관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경험이 주관적인 선택으로부터 비롯되며, 모든 선택은 뇌와 심장의 일치 혹은 협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데이터는 소량의, 혹은 다량의 기분과, 감, 아이러니가 들어있는데, 이것이 객관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훨씬 더 객관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순간순간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감독의 말과, 그리고 이 영화를 떠올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