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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Mar 16. 2023

[연재소설]형광 점퍼의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 두개

장승배기역 보통 카페

"그냥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네?"


뜨거운 아메리카노라고 한다는게 그냥 아메리카노라고 해버렸다. 주문을 받은 직원은 낮타임 근무 직원이었는데 인정을 받아서인지 최근 저녁타임까지 근무 시간을 늘렸다. 둥글둥글 서글서글한 인상이라 어떨 땐 저 직원이 주문을 받았으면 생각할 때가 있다.


다행히 구석자리가 남아있었다. 가방을 풀자니 들릴락 말락 한 한숨이 비집고 나온다. 집에 돌아가 저녁 먹을 시간까지 있는다고 하더라도 4시간이다. 가방에 챙겨 온 교재들은 며칠 동안 공부해야 할 분량이다. 그럼 어떤가? 어깨가 감당한다면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가방 가득 책을 넣어 다닐 것 같다.


"사장님! 저는 뜨아에 얼음 두 개 아시죠? 그리고 벨은 필요 없어요! 커피 나오면 그냥 여기 두시면 돼요. 화장실 다녀올 거거든요, 어 인영아, 그래서 말해봐. 어디까지 말했지?"


주황 형광색의 트레이닝복 차림에 큰 목소리. 일부러 기억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 있다면 기억날 것 같은 인상의 여자였다. 늘 그렇게 뭐가 바쁜지 들어올 때는 통화중인건지 늘 수화기를 얼굴에 대고 있었다. 커피를 주문할 때는 꼭 현금으로 계산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늘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 두 개 넣어 달란다.


"음, 그러니까 여기 커피 물 양 보다 조금 적게 주시고요, 얼음, 얼음은 1개 아니고 3개 아니고 2개. 2개만 넣어 주세요! 제가 오늘 커피를 못 마셔서 좀 진하게 먹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 바로 마시고 싶어서요, 뜨거운 건 못 먹겠더라고~ 어떨 땐 입천장이 그냥 홀라당~"


"아, 네네~ 그렇게 드릴게요"


보통은 이렇게 순조롭게 지나갔지만, 어떤 날은


"아니~ 분명히 제가 물을 적게 달라고 했는데... 일한 지 얼마 안 되셨나? 전 이렇게 마시면 잠이 안 깨서.."

"아 고객님 그러면 제가 이건 버리고 다시 만들어 드릴까요?^^"


"아니~ 그러면 이 아까운 커피를 버려야 하잖아~ 그럼 낭비고... 나는 물을 적게 마시고... 이를 어쩐다..."

"다시 만들어 드리..“


"음 오늘은 그냥 마실게요~ 대신! 다음에는 꼭. 물을 여기 이 글자만큼만 주세요, 아셨죠? 그리고 얼음 몇 개?"

"두.. 두 개요?^^"


"어, 진수야,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다른 주문 건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유독 저 형광 점퍼 여자의 목소리는 귀에 쏙쏙 꽂힌다. 물 적게, 얼음 두 개가 무슨 주문처럼 외워질 정도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특이점이 하나 있다.


"몰라, 맨날 커피 주문하고 화장실 가더라~ 젤 바뻐 보여? 물은 꼭 여기까지만 줘. 그리고 얼음은 두개만. 더 넣거나 덜 넣으면 화내. 한소리 듣지 않으려면 잘 기억해 둬"

"네~ 알겠습니다"


형광 점퍼의 주문을 위한 직원 간의 엄숙한 오티 현장을 들은 것이다. 형광 점퍼를 나만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커피를 주문할때면 늘 화장실 가고 싶어지는 건지, 어쩌다 그런 루틴이 생긴건지 궁금할 정도다. 뒤에 주문하는 사람들이 다 들을텐데 자신의 화장실 갈 예정을 밝히는 형광 점퍼가 그렇게 당당해 보일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있어도 우물쭈물하다 늘 중간을 고르는 나와는 참 다른 성격같다.


형광 점퍼는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은 혼자 오는데, 혼자 와서 통화를 하고 메모지에 뭘 막 적는 등 업무를 보다가 두어 시간이 지나면 음료 1잔 더 주문 한다는 점이다.

"레몬차 한잔 줘요~ 내가 하루에 커피 두 잔은 못 마시거든.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네, 청귤레몬티로 드릴게요"


일종의 의리에서 나오는 주문일까? 나도 3시간을 넘기면 추가 음료를 주문해야 할까? 나만 모르는 것 같은 세상의 세세한 룰 같은 걸 누군가 친절히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마음에 드는 단골 카페가 많지도 않지만, 그쪽도 나를 단골이라 여기는 카페도 잘 없지만, 어쨌든 자주 가는 카페에는 나처럼 종종 출몰하는 손님들이 있고, 그 손님들은 서로를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특정 부분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 같은 게 있다. 이를테면 나는 맨 왼쪽, 창가를 바라보는 1인 자리를 사수하는 편이고, 형광 점퍼는 맨 오른쪽 둥근 테이블을 사수한다는 그런 룰?


오늘도 오늘치의 그냥 아메리카노와 오늘치의 공부, 그 공부를 마쳤을 때 주어지는 오늘치 딴짓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계획만 세웠을 뿐인데 시간은 어느 덧 5시에서 6시로 향해간다. 집에 갈사람들은 갈 채비를 하고 볼일을 더 볼 사람들은 남아있는 시간, 창 너머 햇살이 손바닥만큼 남았다. 여기는 장승배기역 보통 카페다. -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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