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드라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 As you like it》에서,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생을 연극(드라마)에 비유했다. 그의 말마따나 한 사람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또한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인생은 드라마와 달리 통제와 계산이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인생은 무한 변수의 이합집산이다. 드라마의 인과관계처럼 명징하지 않다. 이 행동이 이 결과를, 저 행동이 저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인생은 나의 의지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로 얽히고설켜 있다. 수많은 경우의 수가 수시로 갈등과 충돌을 하고 그 결과 값으로 내가 있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인생은 느닷없는 사건과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다.
사실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뭐 대수로울 것도 없다. 말 그대로 드라마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통속적이고, 어떤 이야기는 결말이 너무 뻔하고, 어떤 이야기는 허무맹랑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그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나이고, 그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나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때때로 내 인생의 드라마를 불러오기도 한다. 내가 드라마를 끊을 수 없는 이유다.
《미생》의 동시대에 대한 지독한 리얼리즘이, 《눈이 부시게》의 대단하지 않은 날들의 대단함이, 《옷소매 붉은 끝동》의 불완전한 환상이 주는 달콤함이, 《그해 우리는》의 말랑거리는 로맨스가,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90년대 말의 첫사랑이, 《서른, 아홉》의 우정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와 맞닿아있다.
장르 불문하고 드라마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는 나의 것에 대한 천착穿鑿을 한다. 서사에 앞서 인물의 감정을 파고드는 모더니티를 읽으며 나를 마주하고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를 돌아본다. 드라마 속 인물 간의 갈등과 충돌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를 통해 나는 내 정적인 인간관계를 동적으로 시뮬레이션해본다. 아마도 이런 취향은 직장인 극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또 다른 나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점점 쉽지 않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부담스럽다. 그렇다 보니 내 현재 상황-아픔과 고통은 물론이고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가까운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댈 곳 없어 불안했던 하루하루를, 막연하지만 위로가 되어줄, 내 속내를 함부로 밖으로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그립고 그립다. 드라마는 직접 얘기하지 않아도 이런 내 요란함을 묵묵히 받아준다. 요즘 수목드라마 《서른, 아홉》이 그렇다.
지하철 플랫폼 이쪽과 저쪽에서 췌장암 4기인 시한부 정찬영과 그녀를 마주 보고 있는 차미도의 모습에서, 현재 겪고 있는 아픔과 고통을 나누는 대사에서,
찬영 : “미조야, 나 겁나, 무서워!”
미도 : “나도”
울컥하고 위로를 받는다.
“겨우, 겨우 서른아홉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생과 사에 깊은 괴로움을 만나기엔 채 여물지 않은 겨우 서른 끝자락이었다.”
미조의 내레이션에 마음이 무너진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내게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감사한다. 내가 시한부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내가 차미조라면?’, ‘찬영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대체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까?’, ‘내가 정찬영이라면?’, ‘내가 시한부를 선고받았다면?’, ‘남은 이들에게 뭘 해주고 가야 할까?’......
가슴 뭉클한 플랫폼의 장면과 미조의 내레이션은 오랫동안 곁에 두고 펼쳐볼 만큼의 묵직함을 준다. 그리고 묻는다. ‘내게도 차미조 같은 친구가 있을까?’, ‘나는 내 친구에게 차미조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어느 날 문득 마주하게 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차미조와 정찬영의 two-shot이, 대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위로한다. 예사롭게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