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rologue [프롤로그]시 바람]
인간사는 세사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 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 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 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이거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 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 하기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 시인에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함을 자극시킨다.
이제노길순의 정신 추구를운위 하는길로 만나러들어가보자.
2.【Dream [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와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 시인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 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 번 두 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내가> 중에서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안 보인다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거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에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나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 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살아가는 일> 중에서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 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 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 (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가지런 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써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 척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찮아
손발이 차가운데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으면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가
잠이 깨면 사라질까 두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내 사랑> 중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에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풍물 유리 바짝 붙어 오르는 넝쿨
구물구물 오르는 벌레들
아슬아슬 유리 벽 오른다.
무아지경 세계
쥘 곳 없는 기행에
촉수 밀어 하냥 오르고
그리곤 헛짚어 위태위태
풍물기행 너무 힘겨워
끝까지 오를 수 있을지
궁금하여 그리워 찾은 그곳
삶의 음계가 마냥 그리워
<풍물기행> 중에서
찻집의 그림을 비유적으로 그려내며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절대, 절명의 상황, 이를 실존주의에서는 한계상황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철학의 이름으로 보인다.
넝쿨이 애벌레처럼 아슬아슬하게 유리 벽을 기어오르는 풍물 찻집의 풍경과 어우러진 상황은 결코 마지막 절망이 아니라 찻집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주변의 여유로움이 아슬아슬하게 설정한 시의 맛이 실감 나게 표현한 내용이 응축되는 듯하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 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에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 문법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더욱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은 이제 끝을 맺어야 할 때인 것 같아 에필로그 한다.
2024.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