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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위한 은유의 프롤로그】

『아름다운 시간 여행』

  


1> 소요의 여행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사는 일은 모두가 여행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일상의 여행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간으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목적지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확실한 장소가 없이 떠나는 어둠의 여행일지 모른다. 

인간은 어차피 살아가는 일이 여행인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삶의 길을 떠나는 여행은 태어나서 마지막 공간에 이를 때까지 생의 길은 굴곡과 시련을 지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끝 모를 방황이 여정(旅程)으로 설정된다.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길이 아닐까?        

  

시는 언제나 삶의 길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악착(齷齪)한 삶의 괴로움을 버티는 인내의 노래도 있지만, 더러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환희의 가락도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자기의 삶에 대한 한계를 갖고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시인마다 삶의 태도에는 일정한 규격화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시화(詩化)의 길을 걷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표현의 맛을 구가하게 된다. 

이를 시를 읽는 이유는 이런 맛깔스러운 개성의 감상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세계의 지향(志向)에 감동을 보내게 된다.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정서와 전원에서 사는 사람의 정서가 시로 나타내는 표현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환경의 영향이 시로 흡수되는 과정이 표현의 묘미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본질이고 이 자연을 어떻게 육화 하여 표현하는가는 흡수되는 환경의 결과에 따른 시적 표정-

도시는 메마른 상상의 기저가 중심이 된다면, 전원에서는 생산된 시는 물기 있는 상상의 흡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시는 어떤 시일까? 의문이다.      


2> 은유의 길 건너기     


시는 비유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특성은 응축(凝縮)이라는 줄임의 미학일 때, 그 전개의 방식은 산문과는 확연히 달리 가지치기의 군말을 버리고 오로지 줄기만을 위한 표현의 미학은 곧 비유의 방도로 이미지 뼈를 어떻게 산뜻하게 건져 올리는 가의 방법에 시인 재능이 귀속되는 것이다. 늘이고 펴는 일은 산문의 서술(敍述) 기법이라면 시는 이런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함축(含蓄)의 여백을 갖는 일이 우선 시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학은 서양화의 논리의 구축과는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서양화는 칠하고 다시 덧칠하고의 기교에 여백을 갖지 않는 채움의 정치(精緻) 조력을 받아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정신 표현이라면, 시는 이와는 달리 여백과 함축을 방도(方途)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해 주는 고급한 여유를 갖는 비유가 성립된다. 때문에 시는 여타 산문의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지난(至難)한 기교를 갖는 첫째 방도가 비유의 도구를 앞장 세우는 일이다.      

물론 시적 전개의 장치에는 리듬과 이미지, 비유 그리고 상징이나 인유 그리고 패러디 등 다양한 구조적인 내포(內包)가 있을 때 풍윤한 표현의 길이 넓어지는 것에서 고급화의 방도-

시인은 결국 자기 정신의 고급화를 지향하는 예술논의 중심에 자기 정신의 의도(意圖)를 세우는 일이 언어 기교로 나타는 바, 이는 언어운용의 응축이라는 절차가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된다. 언어 감각은 생동감 있고 온화한 내면의 기품이 담담한 것을 풀어내는 기교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본다.  

    

겨울과 봄 사이 봄 눈 녹듯 

메마른 둥지 헤치고 이곳저곳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간지러움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가려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여     


                          <겨울과 봄 사이중에서   


사실 겨울이란 삭막하고 모든 물상이 잠들어 조용한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의 겨울에서 점차 여명의 봄날로 다가들수록 “이곳저곳”이 스멀거리면서 살아나는 신비가 “간지러움”으로 생동감을 부추긴다. 

이런 표현의 묘미는 결국 리얼한 표현의 여운을 대동하면서 시가 갖는 여백의 미학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 글의 비유의 신선함은 마무리에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 시적인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함을 기준자로 한다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은 그야말로 시의 화룡정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어가 된다. 

독목(禿木)의 앙상한 나무들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는 부스럼딱지 같은 여기저기의 “선연한 눈빛”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양- 시인의 가슴을-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보임은 찬탄을 불러온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본다.          


앞산이 서운산이 각혈하는 어느 소리꾼의 

득음인 양 긴 여운을 담아 오늘 아침 초대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산을 안고 오는 각혈을 품으란다.

웅장한 소리꾼의 각혈을 그리란다.     


                  <가을 풍경>


가을의 깊이로 접어드는 풍광의 리얼함이 눈에 보이는 듯 “각혈”하는 소리꾼“의 비유가 강력하고 적절하며 상상의 여정을 초청하는 역할을 다하는 모습에서 아주 심오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각혈은 소리꾼의 길고 멀고 닦은 세월의 흔적이며 수행의 결과물이 완성된다. 

득음(得音)으로 이어지는 길이면서 소리꾼의 존재가 빛나는 이름으로 환치되는 상상이 마무리되는 뜻 일게다.

완성의 표정을 시인에게 그리라고 하는 초청장에서 과정의 깊이를 상상하면서 각혈을 시인이 직접 표현하라는 것은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기에 시의 맛깔이 나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함축의 묘미를 여백의 무궁한 깊이를 제공하여 재능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즐겁다.    

 

<2> 의미의 전개와 플라톤의 변증법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실물과 접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구조를 통해 그리지만 시는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으로 전해진다. 의미는 곧 소설의 구조와 상통하지만 시의 의미는 결코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추고 숙이면서 드러내는 은근미의 속살을 보여주는 이름이어야 한다. 

우회하지만 결코 멀리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쉽게 또는 가까운 곳에서 비유의 의상(衣裳)을 걸치고 화려하게 혹은 고담(枯淡)한 정서의 깊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신선미가 전재되어야 한다. 

시어의 선택에 어려움은 이런 조건들이 결코 정석이 없는 시인만의 뇌수(腦髓)에서 발원하는 맑음이어야 한다. 



이는 미적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표현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숨은 기교가 발휘되는 특성을 뜻한다. 

결국 의미는 감동의 일차적인 관문이고 이 관문을 지나면서 삽상(颯爽)한 기운을 대동하는 데서 의미의 신선감은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온몸으로 밤을 노래하는 너

홀연히 들어 날 아득한 세상

별자리로 이끌며 새벽을 낳는가

왜 그리 호젓한 음악을 틀어 놓는가

무엇이 안타까워 무엇이 외로워

이슬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너

함께 노래를 부르자꾸나     


                    <한 밤의 귀뚜라미 노래> 중에서    


‘온몸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 과정을 지나면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이 자기화가 되기 때문에 신기한 ‘새벽을 낳는가’라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여백이 담긴다. 이는 시적인 안정감 즉 시인의 정서 균형이 평형을 유지하는 건강성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예술의 미학에서 이른바 개념에 알맞게 이룩된 형태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정한 사물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시에는 비유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때,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역할이 수행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이런 자기표현의 그림이 비유와 상상의 결합으로 형태화 되는 과정이 수립되는 결말이 감동으로 정리된다는 뜻이다  

        

<3> 갈증과 물의 변증법     


시는 자연의 이치와 등가(等價)를 이룰 때, 합리성을 갖는바, 세상의 진리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라는 의미는 상식과 같고 이 상식은 인간이 정한 오랜 도덕적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의 진리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갚고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자체가 절대의 논리에 갇힌 존재가 아니고 때에 따라 변하는 일이 당연지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갈증에는 물이 필요하고 목마름을 채우면 이내 또 다른 공간의 욕망이 발동될 때,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또 다른 영역의 변화가 진행형이 된다.           



그렇다면 갈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구가 일어나고 갈증은 물의 부족을 요구하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존재 자체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체는 순환의 기운이 있고 이런 요구에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갈증의 농도가 도(度)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둠이 태풍처럼 몰려와 거대한 몸 짓으로 


위협하지만 지극히 작은 촛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빛의 그림자일 뿐

헛것에 넋 나가 탕진한 젊음이다.

어떻게 살아갈 할 것인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붙잡고 습한 음지 

굼벵이처럼 붙잡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숨죽여 견뎌온 어둠의 시간들

닿지 못할 먼- 별 꿈꾸며 

뜬눈으로 밤새는 목마른 동물이다. 
 

                  <어둠의 빛중에서


어둠은 빛을 낳는 모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지극히 작은 촛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어둠이 포장되었기 때문에 빛을 향하는 행동이 다음 단계의 진전을 예약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벗어나려는 의지의 물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상징인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별을 꿈꾸는 ‘목마른 동물’로 갈증의 늪을 벗어나는 길이 보인다. 고난의 상징인 얼음장의 아래로는 소리로 환생하는 흐름에서 절망을 탈출하는 시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듯하다.

이는 곧 춘 봄을 암사 하는 것 같다.     


<4>산뜻한 자연의 시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시인의 정서가 감수성의 표정이라 하겠다. 

어떤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가는 그의 삶이 뒷받침될 때, 시의 표정으로 말하게 된다. 

시는 순수의 정서가 온화하고 질박(質朴)하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로 포착되는 심성의 이유도 있지만 청량한 자연의 요소가 바탕을 이루면서 더불어 시인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풍광이 한몫 거드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겠다.      

생동하는 은유의 숲 속을 거니는 신선미와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 약동이 의미를 생산하고, 물의 요소가 많은 것도 자연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시심의 흥취(興趣)라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풍경을 만들면서 여기에 소리의 개입이라는 시를 찾고 사는 독특한 득의(得意)로움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에필로그 한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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