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아 만나기』
시를 만나는 일은 아름다우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는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고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마음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그렇다는 것일 것이다.
시인은 사물과 온갖 우주를 심안으로 떠오르게 하는 삼라만상을 헌신할 때 비유로 나타나는 얼굴에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고 시를 보는 독자는 시인과 또 다른 정서의 상승효과를 경험하면서 시인이 그린 세계 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정서의 상승이라는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은 시가 갖는 가치의 개념으로 진전한다.
한 사람의 시인이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일정하고 단순한 언어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일면 그로 인하여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창조에 힘이 부여되기에-
시에 대한 유사 이래 인간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시의 가치는 이렇게 고귀하고 책임을 느끼는 임무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다.
물론 시를 감득(感得)하는 독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독자도 있지만 정서의 차이는 밝은 얼굴과 찡그린 얼굴의 차이는 크다. 순수하고 밝은 표정은 인간사를 아름답게 만드는 얼굴과 찡그린 얼굴을 대하는 독자들과는 반대일 것이다.
김선영 詩 - 그의 모습은 본 일도 없으며 다만 청탁 원고만이 전부이지만 그녀의 시에는 시니어라는 지긋한 경계에서 다가오는 순수하고 깨끗한 강물이 흐르기도 하고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연상되며 여성의 시가 그렇듯 그리움, 사랑, 혹은 추상적인 정서가 흔한데 비해 현실성의 사물에서 느끼는 감수성이 많은 양상을 보인다.
생의 비유 혹은 식물 정서의 다양성 그리고 차(茶)에 대한 깊이의 음향을 추적하는 섬세함,
외국 여행에서 느끼는 삶의 고달픔을 보는 연민(憐憫)의 눈빛 등이 의식을 채우고 있는 정서에 목록을 본다면 더욱 알 듯도 하지만 나른한 감수성의 퇴락한 언어의 되풀이보다는 감각의 정서가 우월한 것도 독특한 특징에 속하는 부분일 것 같다.
이제 시에서 풍겨 나오는 바람의 향기를 접하는 길목에서 그에 본모습을 들여다보자
『2. 동서의 감각적인 정서』
김선영의 시에 특징이라 한다면 동서의 감각적 정서가 언어의 조화미를 연출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이는 사물과 사물을 결합하는 조화(調和)에서 비유의 언어가 살아남을 의미 한다.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의 결합의 조건은 시인의 재능이다.
이를 촉매제로 이용하는 방법은 비유이거나 상징 혹은 이미지 결합을 주도하는 시심(詩心)의 운용적 재능 -
여기서 시의 맛은 달라지는 것이다.
즉 같은 재료로도 음식의 맛은 주도자의 재능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연출할 수 있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일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은 판연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한 편의 시를 만난다.
둥실 떠 있는 달
살짝 바가지로 떠다가 장독대 위
정화수(井華水)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 간짓대로 돌려 따
달 위에 얹어 촛불 꽂아 불 밝혀
임 기다리면
이 밤 익지 않아도 좋겠네.
이 밤 석류처럼 익어
터지지 않아도 좋겠다네
<달을 떠서> 중에서
시란 궁극적으로 언어의 그림이다.
여기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달을 둥근 바가지로 떠다가 정화수에 띄어놓고 “풋별” 서너 개를 장대로 따는 묘미는 동심(童心)으로 돌아가는 추억의 깊이에 이른다.
이는 순수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기교이면서 “촛불”을 밝히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방안의 풍겨이 동화적인 세계로 흘러간다.
이는 무르익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지된 정밀(靜謐)의 속삭임을 연상된다.
다시 말해서 출렁이고 요란함이 아니라 넘침이 없고 고요한 관조(觀照)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의 고요-
그런 고요의 나라에 도달하는 감수성이 아닌가 보게 되는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계추를 잡아당겨
미끄러져 질펀한 진흙 펄에 주저앉는
거나하게 취해버린 반나절
번쩍 일어나 앉아 늦은 대여섯 시의
끈적이면 달라붙는 다디단 엿가락
신음의 소리 요란하다.
<낮잠> 중에서
나른하고 낮잠의 깊이에 빠진 경험에서의 익살스러운 실눈으로 시계를 응시하다 “미끄러져 의” 긴 졸음에 깊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다시 “취해버린/나절”의 오수(午睡)에서의 대여섯 시의 시계 손가락을 바라보고 “다디단 엿가락” 같은 비유의 졸음이 익살스럽게 그렸다. 「골다공증」은 나이에 따라 뼈에서 나오는 신음의 소리가 공간을 자극하는 아픔이다. 슬픈 소리의 방문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막상 자기에게 닥치면 지난날 할머니의 신음의 소리가 일치되는 서글픔이 된다. 병환을 앓으시던 소리/점점/뼈마디로 읽어낼 때/ 열 아흐레 날/ 야위어 가는 달빛/ “사묵/사묵”스미는 것이다.
같은 통증으로 창틈으로 “사묵 사묵”이라는 의태어의 묘미는 심각한 아픔이 오히려 친근감으로 접근한다.
이는 시심을 풀어내는 언어 운용의 재치로 돌릴 때 김선영의 시는 그만의 표현을 자극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은 안도의 시심으로 보인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위해 심각한 발성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자신에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철하고 냉엄한 모습으로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다.
어설픈 언어 꿰서 웃음 앞에
물구나무섰던 그날처럼 뚝 떨어진
시어 하나 줍지 못해
시간 위를 뒹굴 때 기억 저 너머
유년의 멋쩍은 미소 마음 밭에 찰랑댄다.
<언어 미달> 중에서
시인이 선택하는 시어 한마디는 시인의 평생을 투척하는 에너지를 소유한다.
시어는 곧 생애의 호흡이 들어있기 때문에 시어는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길을 만드는 것이다
“뚝 떨어진 시어 하나”를 줍기 위해 김선영의 시의 길은 얼마나 감수성의 깊이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인가 의 여부가 가로 놓인다.
“유년의” 미소가 찰랑이는 공간을 찾아 나그네의 모습으로 시의 성문을 찾아가는 모습이 평안은 주는 것은 사실일 것 같다.
『3. 나(ego)와 삼라만상』
우리가 불교와 인연이 되어 불심을 가지면 인연을 나타내는 영원의 개념은 원(圓)으로 나타난다.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渟),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결정은 공 즉 색(空卽色)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땅 위에 한 방울의 물이 증발하면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되고,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무거우면 구름은 비가 되어 땅 위에 보이는 것으로 변한다.
이는 현대 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법칙이 되기도 하고-
불경이나 노자의 철학은 이런 개념을 포괄하고 있음을 카프라나 쥬커브는 증명하고 있다.
원(圓 )- 이는 인간이 영원을 지향하여 만든 위대한 기호의 개념이라는 뜻이다.
세상 돌고 돌아 굴렁쇠처럼 달려왔다.
아침은 점심을 저녁을 밤을 향해
굴렁쇠를 굴리며 떠날 것이다.
굴렁쇠 안에 지구가 있고
궤적을 쫓던 혼이 이탈해 다른 궤도를 그려댄다.
내가 도는 것인지 지구가 도는 건지
레일 따라가다가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 여미며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돌고 돌아 도는지
<돌고 돌아> 중에서
우주는 돌고 있다. 나 또한 일상이 돌게 되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장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 곧 삶의 의미(意味)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인생사가 아니던가?
그 말 『도랑 사구 안 작은 우주』 은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걸음을 걸을지라도 나를 만나는 일은 결코, 없기에 실망으로 점철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임무가 존재의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더욱 값진 시가 아닐지는?
늦은 봄날에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날마다 나를 찾는 일상을
찾아 헤매지만 나는 없다.
숨바꼭질만 하다 말고
또 나는 나를 찾아 숨바꼭질
-중략-
<늦은 봄날에> 중에서
마치 봄을 찾아 들판을 방황했지만 끝내 봄을 못 찾고 집에 들어와 정원에 핀 꽃을 보고 봄을 찾았다는 예처럼 나를 찾는 일은 일상-
날마다 헤매는 일이지만 나를 만나는 일은 항상 궤적을 달리 하면서 숨바꼭질한다.
그렇다면 나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인간의 숙제인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명제나 모든 철학은 나로 돌아오는 회귀의 말을 설파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닌 오로지 참고 사항일 뿐 정답은 바로 나 자신에 의해 터득되는 길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찾는 일상을” 반복하면서 결국은 숨바꼭질 속에 이방인과 조우(遭遇)에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정말 나를 찾는 일은 허상인가, 이런 의문은 결국 허망으로 끝나는 게임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찾는 일은 끝없는 삶의 궤적의 연관이 있고 또 수시로 변하는 현재는 곧 과거로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정지할 수 없는 나의 찾음은 마침내 체념으로 내려놓는 그 장소에 있을 뿐 어디에도 나의 모습은 액자 속으로 다가오지 않는 일생일 뿐이다. 그러나 나를 찾는 일은 반복적으로 계속될 때, 자아(ego)의 모습을 정립하는 방법이 나타난다고 가르치는 철학-
시는 노래하는 일이 의무(義務)이다.
『4. 질곡에 삶, 곡예의 삶』
사는 일은 중심의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버리면 안 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 뿐, 기쁨이란 찰나(札剌)이고 행복이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돈, 명예, 감투로 해결하는 일이 아니며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지해 헤쳐 나가는 일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 대처하는 삶의 진수이기 때문이다.
설사 빙벽(氷壁)을 스스로 오른다 해도 훼방의 이름 -
비와 눈보라 혹은 강풍에 오르던 길도 허방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극은 누구나 경험할 수가 있다.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미끄러운 바닥의 구물구물 애벌레
아슬하게 유리 벽 슬금 기어오른다.
서두르지 않고 우쭐거리지도 않으며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
움켜쥘 곳 없는 음력
촉수로 더듬어 뱃살 붙여 밀어 올린다.
헛짚어 휘우듬 거리는 위태한 상황
어느 우연의 바람에 등 떠밀릴 수 있까?
<담쟁이넝쿨> 중에서
절망의 상태, 담쟁이는 유리 벽 같은 의지할 곳 없는 곳을 기어오르는 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이를 실존주의에서는 한계 상황(grandsituaation)이라 설정하고 마지막 한계 앞에서 인간의 특징을 포착하는 철학의 이름으로 말했다.
비유를 하자면 쥐가 마지막에 몰리면 돌아서서 고양이와 한판 싸움을 하자는 특징이 절망의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일 것이다.
애벌레처럼 담쟁이는 유리 벽을 기어오르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결코 절망의 마지막이라는 두려움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소망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만들게 된다.
시인은 “찻집에 느린 걸음으로 오르는 넝쿨” “돌아갈 수 없는 길” /슬슬 숨 고르며 느린 삶의 음계/를 가야 하는 선택은 때로 운명의 방향을 잘못 잡아 고행의 여로가 연속될 때, 두려움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몫으로 다가올 때도 그 길은 오로지 숙명의 숙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비정한 순간이다.
내일을 당기어 오늘을 엮듯
실오라기 당겨가며 뜨개질을 한다.
그물을 짜는 어부로 앉아한 사슬 한 사슬
가느다란 시간들은 바쁘게 주우면
코바늘에 걸리는 팽팽한 삶의 무게
-중략-
<뜨개질> 중에서
여성적인 비유로 섬세하게 삶의 무게를 풀어 나간다. 베자기와 같은 일-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삶의 하루하루가 한 올 한 올의 조직으로 직조(織造)되는 이치-
완성의 길에 도달하면 비로소 의복을 만드는 재료로 완성된다. 뜨개질 또한 한 땀 한 땀이 모아져서 “팽팽한 삶의 무게, ” 사는 일은 공짜가 없고 오로지 모든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성실성이 투자될 때 삶의 가치는 소중한 자기 가치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남긴다.
『5. 에너지 공급』
시인이란 자기가 살아온 환경에서 시적 에너지공급원을 설정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오면서 접촉한 대상이 시의 주요 재료로 설정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시골에서 살고 있다면 시골 관념적인 면이 지배하면서 전원에서의 생활 그 옛날 살던 고향의 향수에 젖어 식물 정서가 앞서며 강이나 꽃이나 주요 모티브로 나타나면서 이미지 군으로 자리하는 것도 환경적인 요소가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고향의 강』 『호수의 적요』 『시골 풍경』 등은 김선영의 시적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겹쳐지면서 현실을 압도하는 시간에 오버랩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렇기에 시간의 순서가 한몫으로 접근이 되는 듯하다.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가야 할 길 달라도
어느 정점에서 잠시 풀꽃 같은 인연으로
하얀 토끼풀 엮어서 걸어주며 투명한 웃음
-중략-
꽃잎 흐드러져 마음 비 내리는 날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들꽃> 중에서
지구상의 풀이 향기로 변화하여 사랑이 내포된 의미로 상승한다. 이 향기는 고귀함을 나타내고 숭고한 가치로 사랑의 옷을 입을 때, 꽃의 가치는 지상의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가슴에 접어둔 너의 향기”를 만지는 것으로 지상의 이미지와 천상의 이미지와 하나로 결합될 때, 궁극의 조화미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가슴에 접어든 너의 향기 만져보리라” 꽃이 그리운 사람의 가슴에 향기로 만져보리라는 소망-
향기와 시심이 결합하려는 깊은 뜻을 우회적으로 강조하는 기교이다. 그리운 사람에게 향기로 남고 싶은 정서는 모성애적인 발상이지만 세상을 감싸고 싶은 정서가 고귀함으로 포장되는 상상의 나래가 아닐까 싶다.
『6. 나가면서』
김선영의 시는 향기가 있고 그 향기는 일과성이 아니라 상승의 기류를 타면서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법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적 감각은 더욱 순발력이 있는 깊이로 이끌고 갈 때 독자는 감동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포장할 뿐만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삼라만상의 중심이고 개체는 전체를 이루는 본질이라는 점에서 김선영의 시는 “나(ego)” 는 개체의 가치에서 숭고함을 의미하고 시인의 고귀한 정신을 투사(投射)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식물 정서나 강의 이미지는 시인에게 영향을 준 추억들의 집합인 것 같고 이는 향기로 시의 넓이를 고정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 모티브의 중요한 점인 듯하다.
이 모든 논지를 요약한다면 김선영의 시는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 지향점을 갖고 있으며 현실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한 시인 감각적이면서 강인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그만의 자리를 확보한 시인이라 하겠다.
2024.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