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자연 그림의 시}
“시는 자연이다”라는 말은 자연에서 시적 소재를 취한다는 뜻도 있지만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넓은 의미의 자연관은 결국 시와 자연의 등가는 피할 수 없는 정서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자연을 벗어나면 그 어떤 것도 성립될 수 없다.
결국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서는 존재의 근거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공간은 자연에서 비롯되며 미감을 준비하는 절차까지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자연은 곧 인간이고 자연을 표현하는 시는 결국 자연으로 귀속되는 이름인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살아가는 생활을 표현하는 것도, 있으며 또 형이상학적인 생각을 나타내는 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광범위한 전재 위에서 시는 곧 자연을 그리는 일에 불과하다 해와 달 혹은 산과 계곡 또는 바다 강, 나무와 초목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의 이야기는 결국 시의 모두를 이루는 소재이면서 구체적인 이미지로 작동될 때, 시는 자연의 숨소리를 나타내는 수채화 혹은 풍경화의 그림을 그리는 시인 서인숙의 시를 일별 하면 결론이 유도된다.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한적한 정경 혹은 풀꽃들의 향기 또는 노을에 잠긴 추억들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전원 정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시심이자 시인이 영향을 받은 정서의 모두가 그런 느낌을 받으며 전달한다. 도시의 삭막한 혹은 까칠한 흐름이 아니라 여유와 따스한 감수성이 바다, 강, 물살로 흐르는 유장함을 갖는 듯하다.
이제 그런 정서의 숲을 바라보고 맛을 보고 길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2 시심의 표정
1) 언어의 기교와 그림
예술은 각기 특색을 가진 표현을 중심으로 개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음악은 리듬, 미술은 선과 색채라면 문학은 문자로 시인의 마음을 나타낼 때, 주요 관심사에 따라 특색으로 물이 든다. 어떤 시인은 논리적인 인상을 개성으로 나타내고 어떤 시인은 감각적인 재치로 이미지를 형상화, 한다면 서인숙은 재치와 사물의 형상을 혹은 삶의 팽팽함의 언저리를 말랑말랑하게 풀어주는 시로 감수성을 비유로 들며 감싸 안으며 틀고 비튼다.
이는 사물을 투시하는 이미지의 구축 술이 능숙하다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고 또 사물과 정서가 한 몸이 되어 언어의 기교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뜻도 가미될 수 있다. 한번 풀어보기로 한다.
동산 위로 스멀스멀 해가 솟아오르면
지난밤에 잃어버린 그림자 돌아오고
꽃잎에 앉은 이슬 눈동자 속엔 햇빛 아롱거리고
이른 연기 피어오르는 강 마을의 어느 집 식탁 위에
식구 수만큼의 저분이 놓이는 순간 먼 강에서 물새가 피라미를 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이렇듯 세상은 시간 속에서 부활하고
아침은 세상 속에서 부활한다.
<부활의 아침>에서
음식을 예로 들어 흔히 손맛이라 한다. 같은 언어로 표현에는 분명 맛깔스러움이 시인 표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chef(셰프)의 손맛에 따라 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다른 맛을 음미하게 된다면, 언어를 재료로 사용하는 시인에게도 이런 예는 적용될 것이다.
서인숙은 매우 감각적인 비유로 생동감을 부추기는 재주가 뛰어난 듯하다. ‘이슬의 눈동자 속에선’ 햇빛이 아롱거리면서 신비를 재촉하고 아침의 신선감이 인상에 가득해지는 생동의 햇살 따라 ‘물새’와 부활에서 ‘아침’으로의 희망을 발길로 재촉하는 이미지가 산뜻하다. 이는 비유의 생동성을 적절히 구사하는 데서 오는 표현의 차이는 전적으로 시인의 몫으로 돌아간다. 누구에게나 같은 아침의 이미지가 ‘이슬’과 ‘물새’의 먹이와 가족에 저분의 결합에 따라 단란한 정경이 유난스레 신선하다. 더 노골적인 비유의 <일출>은 과감하면서도 익살스러운 감각을 부추긴다.
숨겨둔
태양을 내어놓고
이 신성한 동녘 아침에
바다는
눈부시게 흥건한
생리를 한다
아~
바다는 열아홉 살
황홀한 숫처녀이다.
<일출>에서
단순한 이미지의 결합 – 바다 - ‘일출의 아침’을 시간으로 정하고 19살 처녀의 생리로 붉음을 강조하는 이미지가 ‘황홀한/생리’로 정리될 때, 호기심과 부끄러움이 결합하여 아침의 붉은 해의 형상을 뒤로 감추어지게 하는 수법에서 능숙하게 숫처녀의 신비감을 전달하는 기교는 단순하면서도 겹치는 생각의 강을 건너게 한다. 분명 묘사적 설명의 리얼리티와 비교의 간명함에서 살아나는 사고의 숲에는 온갖 사물의 생생 성의 움직임과 의미와 시간을 결합하는 재주가 유난함을 강조하게 된다.
서인숙의 시는 이런 점에서 살아있는 묘사로 지칭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 같다는 뜻이다.
감각성과 사실성의 결합이 비유로 맛을 살리는 재주는 확실히 언어의 성질을 잘 알고 있을 때, 언어 운용의 능숙 성이 발휘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시인의 언어는 살아있는 혹은 살아나게 하는 표현 기교라고 정리될 수 있겠다.
2) 정서의 고향
시는 시인 마음의 길을 보여주는 그림과 기교이다. 때문에, 어떤 정서가 많게 빈도로 출몰하는가는 결국 시인 정서의 깊이와 닿아 있는 생각의 줄기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안성 장날> <8월의 금광 호수> <엄마의 등>을 읽으면 시인의 정신 무대, – 공간의 장소가 안성으로 고착화, 된다. 여기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점차 안성천과 바우덕이 축제와 그 주변의 산으로 이동하는 기법으로 정서를 엮어 나간다. 그렇다면 정신의 중심을 이룬 추억의 공간인 안성은 부모님이 자라난 인연이 시인의 정신을 일으켜 세운 공간이었고 삶의 표정을 구체적으로 엮어지는 본질이 되는 것이다.
금광 호수의
푸른 8월이 정겹던
아련한 그곳에서 토박이로 자란
소녀는 풀잎처럼 얼굴이 맑았다.
<8월의 금광 호수>에서
유추하지만 서인숙의 안성은 ‘소녀의 마음’에 ‘아련한 그곳’이고 ‘토박이로 자란’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 오버 랩 된다. 금광 호수의 물이 흐르는 8월의 녹음 사이에서 바람은 생기롭게 다가서 들었을 것이고 추억을 쌓아 갔던 어린 소녀의 마음에는 푸른 시절의 아름다움이 각인의 깊이로 사고의 층에 고여 있는 물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풀잎처럼’의 나풀거림과 생기발랄한 ‘얼굴이 맑았다’는 결합에서 복합적인 비유의 생기가 신선하기 때문이다. 마치 티 없이 푸른 호수의 정갈함이고 관조에의 신비가 오랫동안 떠나지 않는 인상을 배가한다.
추억의 줄기를 따라 안성에서의 자화상이 소녀와 부모님으로 옮아 가면 포커스는 더욱 따스함에 초점이 선명하다.
엄마가 내준 등의 아득한 따스함 때문에
나는 펄펄 날리는 눈발들을 아늑하게 보면서
그날 금광 호수 위 살얼음 위로는 맑은 눈이
오래오래 내리고 있었다.
<엄마의 등>에서
상상으로 떠나는 추억은 시공을 초월할 때, 아름다움으로 포장된 느낌을 부추긴다. 시인은 과거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체험의 깊이에 빠져 있고 거기서 엄마의 따스한 등의 체온을 그리움으로 저장하고 살아온 감동이 가시지 않나 보다.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고 마음이기에 엄동설한의 눈밭에서도 가슴 따듯해지는 체험의 이름이 아름답다. 깔끔하고 순수하고 또 정갈한 맛을 부추김이 언어의 탄력에서 시의 깊이에 미감을 입힌다. 마치 동양화 속을 거니는 착각을 갖는 것은, 시가 갖는 위의(威儀)에 이른, 생각을 준다. 이는 시인의 언어 사용이 원숙함을 더하는 재능으로 돌리고 싶다.
3) 사물 관찰법 혹은 전원 정서
글을 쓰는 일은 사물과 나와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우선한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일체화(ldentity)의 도달할 때, 비로소 시적 비유는 성공하는 것이다.
시인의 언어 운용의 미학은 사물을 가장 적합하게 비유하는 점에서 모파상의 ‘일물 일어설’의(해가 진 뒤 다시 일어선다는 뜻) 근간에 시가 도달하는 것 같은 위안을 준다.
이는 그에 정서의 대부분이 식물 정서이거나 전원에서 바라본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더불어 이면(裡面)을 통찰하는 안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깊이 생각하고 친근함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무생물인 사물도 살아나는 물활적인 기교가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철학적인 중심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휠 더린 이 말한 바 “예술가는 제비와 같이 자유롭다” 그렇기에 있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샘물이 솟구치듯 삽상한 경지를 답사할 수 있고 또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성주의 역할을, 수행하는 언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지금쯤 땅속 깊은 곳에서
부활을 위한 아픔으로
가슴 뜨겁게 뒤척일 터이지만
나는 우둔하여 그 화려한 고통
아직 알 리가 없으니
꼬들꼬들한 꽃망울 맺힐
어느 따스한 봄날 그때서나 알까
<겨울나무 곁에서>에서
정지태의 독목(禿木)인 겨울나무의 꼿꼿한 자세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시심이 드러난다. 죽어있다고 믿는 혹은 움직임이 없다고 바라보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물의 속에 움직이고 소리치는 감각을 동원한 시인의 마음에서 나무의 부활을 예견하는 점은 통찰의 안목이 발동될 때, 비로소 물활적인 에너지를 느끼는 시인의 정서 감각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모습 그 자체로 바라보는 직선의 사고가 아니라 이면을 관찰하는 결과물에서 생명의 모습을 인지하는 점이 시인의 시가 살아 움직이는 능동 상태를 연출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거나 현란한 것이 아니라 은근미를 감추는 미학이 그의 특색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붉은 감이 몇 개 달린
감나무 가지 틈을 지나
하늘로 가는 저녁연기의 길이
아스라이 가파르다.
<저녁연기>에서
황혼이 오면 저녁연기가 오르고 바삐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골목은 연기로 길을 내는 풍경은 도시에서 만나는 풍광은 아닐 것이다.
여유롭고 다정하고 친근감이 연기를 따라가는 ‘감나무 가지 틈을 지나/하늘로 가는 모양’은 도시적인 사고에서는 접근이 어려운 고담함의 무게가 있다.
이런 풍경은 어떻게 시로 접촉될 수 있을까? 왜냐하면 시골에서 산다고 모두 전원의 멋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정서의 지향점이 있을 때, 그런 감수성을 발동하는 에너지의 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골의 낮은 산을 끼고 고층 아파트의 위용은 시골의 정서와는 사뭇 다르다. 문제는 환경의 적응에 따른 취향의 문제로 좁아질 것 같다. 날로 시골 또한 아파트의 키는 높아지고 거기서 편하다는 안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은 현상에서 시인의 정서는 스미듯 정감을 주는 요소가 까칠하지 않고 순박성을 담는 시어에서 특색을 발견할 수가 있다.
4) 사랑 표현법
사랑의 길이와 넓이는 무한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까운 것에서, 멀리 혹은 형이상학적인 명상의 높이에 이를 때, 아가페적인 승화의 길이 이어진다. 동양의 사랑법과 서양의 사랑의 차이는 직접적인 표현이 서양이라면 동양은 감추고 살짝 내보이는 은근함에서 감추는 미학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전면에 놓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뒤로 감추면서 대상을 앞세우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고려 가요의 <가시리>의 사랑법- 말리고 막아서는 사랑이 아니라 설리 보내고 빨리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은근함에서 구속이 담긴 사랑 또는 김소월의 사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겉 표현과는 달리 죽을 만큼 혹은 처절하게 슬픔의 이유를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절제의 미학을 의미한다. 이 절제는 어쩌면 전통의 이별 양식인지 모른다. 더불어 서 시인은 이런 마음의 줄기를 간직한 인상을 준다.
말간 이슬이 창을 여는 새벽이 오면
눈빛 청아한 당신을 볼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시간 가뿐히 밀어 올리는 아침
은빛 햇살로 오는 당신이 있어
행복 가득합니다.
-중략-
지금 나는 당신의 심장 안에다
영원히 상하지 아니할 사랑을 수놓습니다.
<당신이 있어 참 좋습니다.>에서
사랑을 수놓는다는 것의 이미지는 정성일 것이다. 그 정성은 곧 사랑의 마음이 표백될 때, 비로소 한 땀 한 땀의 길이 열리는 것과 사랑의 마음은 비례한다. 그것도 대상의 마음에 수를 놓으려는 정성은 ‘말간 이슬’과 ‘은빛 햇살’ 그리고 블라우스 구겨진 깃을 세워주는 상대의 마음이 서로 통할 때, 사랑의 진수에 이르게 될 것 같다.
사랑이 일방일 때는 짝사랑이 되지만 서로가 호응할 때는 빛이 탄생한다. 그것도 화려함을 꾸미는 눈부시게 빛이 아니라 달빛처럼 스미는 사랑법이 서 시인의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 그런 사랑이다.
아침이 돌아오면 그대를 향한 내 사랑만큼
눈의 사랑도 깊이 쌓일 것이다.
<눈에 두고 떠난 사랑>에서
상징은 이미지를 선명하게 수식하는 기능이 있다. 눈의 차가움이 아니라 포근히 쌓인 깊이에 따스함을 끌어오는 비유에서 서 시인의 사랑은 요란한 이미지의 숲이 아니라 단아하고 검소한 미소의 길이 열리는 사랑법- 그런 사랑의 뜻이 온화하다. 그리하여 시인의 소망은 ‘그대의 마음 따라질까 두렵기에/긴 날 그저 그대 곁에/조용히 머무르렵니다’ <애상>과 ‘인생의 여정/전반전 마치고/후반전에 들어선/지금 그 사랑에 스며들어/그 길 그윽하게 걷고 싶다’<다시 사랑의 길 걷고 싶다>에 진솔성이 시인의 마음에 사랑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전반전을 지난 관조의 사랑 혹은 깊이를 알아 출렁이지 않는 안온한 사랑, 그윽하고도 담담한 사랑- 마치, 고가에서 말하는 고가(古家)의 세월을 건너온 고상과 위엄을 갖추었지만 따스함이 묻은 사랑을 이끌려는 서 시인의 후 반전의 명상적인 길에 햇살이 빛나는 듯하다.
3. 에필로그-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
시는 정신의 그림이다.
무슨 색깔이 주조를 이룰 것인가는, 시인의 개성이 나타내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고의 유형은 다르게 표현을 이끌어 간다. 서 시인도 첫 번째 시집은 특색은 정적이면서 안정감의 정서가 숲을 이루면서 달빛이나 가을의 따스함 혹은 구절초의 향기처럼 요란함을 배제하고 그만의 개성이 속삭임으로 다가든다.
박꽃이나 달밤의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깊은 인상을 끌고 가는 매력이 있다. 마치 ‘그리운 이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메시지도 단아하며 수수하면서도 친근 미가 넘치는 자연의 미를 가공하지 않고 혹은 조미료를 치지 않는 깨끗한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는 서 시인의 정신 질감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논지를 마치려 한다.
2025. 10.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