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의 둘째 아들 결혼식에 갔다. 숲 향기 가득한 가을 정원의 웨딩, 하늘이 푸르다. 선하게 살아온 친구가 받은 상장 같은 가을날이다. 그녀의 큰 아들 내외가 나란히 앉아 키보드로 발랄한 축하 음악을 연주한다. 쏟아지는 환호. 정원의 다른 쪽에서 음식 냄새가 날아온다. 지리산 흑돼지 수육에 떡갈비, 메밀 부침개와 온갖 나물까지. 그래, 잔치란 바로 이런 것이지! 하객으로 함께 온 친구들과 자리 잡고 앉아 막걸리로 축배를 든다.
두어 달에 한 번은 만나는 사이인 그녀들,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20대에 학연과 직장 관계가 섞인 인
연으로 평생을 함께 가는 경조사클럽이 발족할 줄이야.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40 여년에 걸쳐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동안 운명의 결사체로 진화한 건가.
다음 날 옛 직장 선배의 모친상 공지가 단체 톡방에 뜬다. 한 선배와 장례식장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고 출발한다. 혼자 조문 가는 건 좀 뻘쭘해서다. 조문을 마치자 80대 선배들이 손짓으로 우리를 부른다. 함께 육개장에 밥을 말아 먹는다. 술을 덜 마시게 된, 아니 마시지 못하게 된 선배들이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20대 초짜 시절, 이 선배들에게 “일 똑바로 하라”고 닦달을 얼마나 당했던지. 때로 부당한 일처리로 공동의 기피대상이던 상사도 있다. 서로 간에 날선 대화의 기억이 남아있는 동료들도 눈에 띈다. 그들 중 일부와 때로 적의에 가까운 경쟁 심리를 지녔던 적도 있었지. 하는 짓마다 밉상이던 후배 하나가 멀리서 고개를 꾸벅한다.
이제 그들은 한없이 다정하고 잘 웃는다. 나이 60이 넘은 후 모두 다 동갑이라도 된 것처럼. 그러고 보니 한때 호랑이였던 선배들의 꾸지람도 이젠 되새김하며 웃어대는 추억일 뿐. 때로 낯을 붉히기도 했던 불편한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졌다. 게다가 그들의 질타 섞인 지도편달에 힘입어 어리숙했던 내가 성장하지 않았던가.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돌이켜 보면 30대, 40대 무렵, 조문을 가는 건 주로 의무감이었다.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한 활동이라고나 할까. 부고 회람이 돌면 친소관계나 앞으로의 인맥 관리 차원에서 머리를 굴리며 조의금 액수를 정하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조금 적극적으로 조문을 간다. 그곳에 옛 인연들이, 젊은 날들을 함께 한 동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떠들던 20세기 후반의 날들을 공유하는 기억 공동체.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이 있다.
사실 그들은 20대의 풋풋했던 나를 기억해주는 귀인들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유난히도 역동적인 민주화를 동시에 겪느라, 삭신이 고달팠던 20세기 말의 시공간을 함께 살아낸 동지들이기도 하다.
장례식장 조문객의 신분으로 다시 만난 우리는 서로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이미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어진 나이. 더구나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 죽음은 우리의 평등한 미래다.
누군가가 말한다. “무시무시한 더위 다음에 이렇게나 좋은 가을이 오다니! 살아있는 건 좋은 거야.”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 “내년 봄에 김밥 싸가지고 벚꽃놀이 갑시다.” 한 후배의 긴급 제안에 다들 기뻐한다. 죽음 앞에 더 선명해진, 살아있는 오늘의 행복한 무게를 느끼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과 “지금 이 순간을 누리라”는 말은 결국 같은 뜻인 모양이다.
많이 외로울 나이듦의 여정에 길동무로 거듭난 우리들.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실감할수록, 우리는 서로 더 애틋해지고 있다. 또 한 번의 벚꽃을 보는 새 봄까지 서로 건강을 다짐하며 장례식장을 나온다. 이 경조사클럽 활동도 쭉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