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한의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치료'라고 하니 어딘가 아픈 것 같지만 사실 특별히 아픈 곳이 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진맥을 잘 본다고 소문난 한의원이 있으니 한번 가보자는 엄마의 성화에 그냥 한번 따라가 보았다.
방문 첫날, 정말 입소문이 난 곳이라 그런지 여느 한의원과는 다르게 대기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11시쯤 갔는데 오전 접수는 이미 마감되어서, 어쩔 수 없이 점심을 먹고 다시 오기로 했다. 미리 접수를 해놓고 간 덕에 다행히 오후에는 빨리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원장님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단아한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진료 방식이 조금 독특했다. 보통 병원에 가면 어디가 안 좋아서 왔냐고 묻는 게 일반적인데, 그 원장님은 아무런 질문 없이 진맥을 먼저 하셨다. 한참을 이쪽저쪽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시더니 차트에 그려진 사람 모형에 빨간색 펜으로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진맥이 끝난 후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을 가리키며 내 몸 상태에 대해 하나씩 설명을 해주셨다. 가운데 가슴 부분과 어깨, 목, 머리 쪽에 특히 빨간 표시가 많았다.
"간이 무척 피로한 상태네요. 바쁘거나 힘든 일이 있으세요?"
"아뇨.. 지금은 휴직 상태라 특별히 힘든 건 없는데.."
"아, 그러시군요. 정신적 스트레스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시고 일을 안 해도 간은 피로할 수가 있어요. 간이 피로하면 분비나 배설이 제대로 안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변비나 설사가 생길 수도 있는데.. 요즘 변 상태는 어떠세요?"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약간 설사를 하는 경향이 있기는 해요. 저는 그냥 여름이라 찬걸 많이 먹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간 피로하고도 관련이 있어 보이네요. 그리고 여기 보시는 것처럼 가운데 부분에 기가 막혀있어서 아래쪽으로는 제대로 소통이 안되고 있는 상태예요. 위쪽으로만 치고 올라가니까 이렇게 어깨나 목, 머리가 자주 아플 수 있어요."
"아... 그래서 그런 건가..."
사실 어깨나 목 통증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그런데 원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잠은 잘 주무세요?"
"네.. 뭐 요즘은 많이 자는 편이에요."
"많이 자는 거랑 잘 자는 건 달라요. 수면의 질이 좋아야 자는 동안 몸이 회복되거든요. 그런데 지금 맥은 잘 자는 사람 맥이 아닌데... 혹시 꿈을 많이 꾸거나 자주 깨지는 않아요? 자고 일어나도 개운한 느낌이 없다거나.."
"원래 꿈을 자주 꾸는 편이기는 한데.. 요즘은 많이 잔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혹시 스트레스받거나 신경 쓰는 일이 있어요? 마음이 갈팡질팡한 상태인 거 같은데.."
"아.. 요즘 직장 문제로 조금 신경을 써서 그런가 봐요."
설명이 끝난 후 이야기한 것 외에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지만, 원장님께서 이미 족집게처럼 나의 상태를 다 알아맞혔기 때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와.. 이 집 정말 용하네!) 뭔가 점집에 간 기분이랄까?ㅎㅎ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마냥 신기했다. 진맥만으로 몸 상태를 알아맞히다니.. 뭔가 느껴지나 싶어서 나도 내 손목에 손가락을 짚어보았지만 그냥 맥박이 잘 뛰고 있구나, 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일반인이 원장님과 같은 걸 느낄리가 없다.
진맥이 끝난 후 안내해주는 침대에 가서 누웠더니 먼저 배 위에 뜨끈뜨끈한 찜질팩을 올려주셨다. 가운데 막힌 기운을 풀어주는 침을 한대 놓아주셨고 15분 정도 쉬었다 가면 된다고 하셨다. 멀뚱멀뚱 천장을 보고 누워있으려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심심한데 폰이나 좀 볼까 하고 가방 쪽으로 손을 뻗다가 벽에 붙어있는 글을 보게 되었다.
'침구치료 중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합니다. 침구치료 도중에 주위 분들과 대화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것, 심지어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는 것도 치료효과를 감소시킵니다.'
이럴 수가, 뜨끔했다.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걸 알고 붙여둔 건가.. 폰을 보려던 마음을 접고 뻗었던 손도 다시 제자리로 가져왔다.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으면 되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힘들었다. 괜히 이마도 가려운 것 같고, 화장실도 가고 싶은 것 같고, 분명 15분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나 싶어서 조급증이 났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계속 가다 보니 어느새 그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한낮에 이렇게 편히 누워 쉬다니.. 사치를 부리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느낌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잠이 들 때도 있는데타이머의 알람이 울리면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한 번은 알람 소리에 일어나 잠시 멍하게 앉아있다가 문득 이런 느낌이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였나 떠올려보니 바로 요가할 때였다. 요가를 다니며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그래서 쓰지도 않았던 근육들을 총동원해서 열심히 동작을 따라 했는데, 할 때는 힘들지만 다하고 나면 뿌듯하고 몸이 가벼워서 꽤 오래 다녔다.
하지만 요가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마지막에 하는 '사바사나'였다. 이른바 '송장 자세'라고도 부르는 요가의 마무리 자세로, 편안히 바닥에 누워서 온 몸의 긴장을 풀고 이완하는 것이다. 사바사나를 하기 전 보통 모관운동을 하는데 이는 팔다리를 하늘로 올려 손발을 흔드는 동작이다. 진동을 주듯이 열심히 흔들다가 마지막에 손발을 '툭' 바닥에 떨어뜨리고 나면 곧바로 사바사나 시간이었다.
사바사나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조명도 끄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다. 그 상태로 깊은 호흡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아무런 생각도 없는 평온한 상태가 된다. 손발을 '툭' 떨어뜨림과 동시에 긴장도 '탁' 풀리며 가끔은 까무룩 잠이 들 때도 있었다.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 선생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여러 번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간이 너무 좋아 요가를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돈, 명예도 건강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치료기간 중에는 과음, 피로, 스트레스를 최대한 피하고 바쁘고 힘든 일을 떠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며 꾸준히 치료에 집중하면 매우 뛰어난 치료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사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질병의 많은 부분이 피로와 스트레스, 그로 인한 과음에서 오는 거 아닐까? 육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아마 아픈 사람도 많이 없을 것이다. 그게 힘드니까 다들 한의원에 와서 침을 맞고 누워있는 거겠지만...ㅎㅎ
그렇다면 꼭 한의원에 가지 않고 요가를 다니지 않더라도, 의도적으로 매일 이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긴 시간이 아니더라도 잠깐씩 짬을 내어 '완벽한 쉼의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많은 질병이 치료되지 않을까? 우리는 다들 스트레스도 많고 너무 바쁘게 사니까.
물론 침도 효과가 있겠지만, 한의원에서 누리는 15분의 사치 덕분인지 요즘은 몸도 마음도 한결 편안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