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마음에 드는 약국 자리를 찾지 못해 조금씩 지쳐가고 있던 8월의 어느 날, 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딱 8월까지만 약국 자리를 찾아보고 만약 마땅한 곳이 없다면 9월부터는 다시 근무약사로 일하자고요.
계속 쉬면서 약국 자리를 알아보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빨리 뭔가 해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처럼 무작정 노력한다고 개국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마지막 결정적인 이유 한 가지는, 쉬는 동안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실업급여가 7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물론 퇴직금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이미 많이 줄어든 상태였고,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어요. 그래서 가족들과 강릉으로 휴가도 다녀오고, 친한 친구와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다시 일하기 전에 열심히 놀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을 비우고 나니 약국 자리를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크게 애쓰지도 않았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어요.
일단 제가 계약한 약국 자리는 신규입니다. 개국의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기존 약국을 인수받는 방법과 신규 약국을 오픈하는 방법, 이 중 저는 후자인 거죠. 이미 병원은 진료를 하고 있는데 같은 건물에 약국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처방전을 받은 환자들은 조금 걸어서 근처의 다른 약국으로 가고 있었어요.
병원이 있는 건물의 1층에는 3개의 상가 자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어있고 그 자리에 '약국 임대'라고 붙어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발견한 건 아니고 엄마가 우연히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그걸 보셨어요. 개국병에 걸린 딸 때문에 엄마도 약국 자리만 눈에 들어온 거겠죠?ㅎㅎ
적혀있는 번호로 연락을 해서 만났더니 건물주가 직접 임대하는 자리였습니다. 병원이 개원한 지 얼마 안 되었고 건수도 적어서 좀 더 있다가 약국을 구할까 했는데, 환자들이 불편해해서 생각을 바꾸셨다고 했어요. 병원은 가정의학과였고 유동인구도 좀 있는 곳이었습니다. 평수도 11~12평 정도 되어서 혼자 하기엔 괜찮아 보였고 비교적 새 건물이라 좋았습니다.
다른 조건은 괜찮아 보였지만 신규 약국의 경우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월세입니다. 신규는 병원이든 약국이든 자리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이죠. 자리를 잡을 때까지 꿋꿋이 버티기 위해서는 고정 비용이 적게 나가야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건물주 분이 처음 제시한 월세는 생각보다 많이 비싸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차츰 처방전이 많이 나올 거라고는 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리고 월세를 조금 조정해주실 수 있냐고 여쭤보았습니다. 건물주 분도 빨리 약국이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이라 그런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건물주 분은 저를 많이 배려한 새로운 월세 조건을 제시하셨어요. 여기서 자세한 조건을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한번 해볼 만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전 처음 임대차 계약서라는 것을 쓰고 그 자리에서 보증금의 1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입금했습니다. 뭔가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보통 신규인 경우 병원과 약국이 함께 오픈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사실 이런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잘 찾아보면 있기는 있더라고요. 예전에 제가 잠깐 아르바이트했던 약국도 그랬다고 들었거든요. 같은 건물에 내과가 먼저 들어오고 1층에 약국 임대가 나와서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하셨습니다.
브로커 없이 건물주가 직접 약국 임대를 하는 경우에는 매물 사이트에도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그 도시에 사는 사람만 아는 자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 본인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개국을 하고 싶다면,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자주 돌아다니며 새로 개원한 병원은 없는지 약국 임대가 붙은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운 좋게 약국 자리를 찾아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브로커가 없었기 때문에 컨설팅 비용도 들지 않았고, 건물주와 직접 계약을 했기 때문에 별도로 병원에 지원금도 지불하지 않았어요. 다만 신규라서 만만치 않은 인테리어 비용이 들어가고,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알아보고 진행해야 된다는 막막함이 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번에 이야기한 것처럼 정말 '될 일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무슨 일을 하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될 일은 된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여기서부터는 개국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한 소소한 팁입니다.
계약 과정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계약금, 중도금, 잔금의 순서로 이어지는데요. 계약금은 보통 10%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중도금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혹시 마음이 바뀌면 계약금을 포기하고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지만, 중도금을 내면 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봅니다. 잔금까지 치르면 그때부터 권리가 생기고 인테리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금액이 그리 크지 않아서 계약서를 쓰는 날 계약금을 입금하고, 얼마 후 바로 잔금을 치렀습니다.
*계약 전 확인 사항
1. 등기부등본 확인
2. 1종 근린생활시설, 불법 건축물 여부 확인 (정부 24에서 건축물대장을 통해 확인 가능)
3. 해당 장소에 약국 개설 가능 여부 확인 (보건소 의약과 담당자와 통화하기)
*계약 시 특약
신규 약국일 경우 가능하면 약국 독점 조항을 넣으면 좋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그 건물에 약국은 더 이상 넣지 않겠다는 조항인데요. 요즘에는 층약국도 많이 생기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필요한 조건입니다. 상가의 각 호실 주인이 다른 경우에는 이 특약을 넣기 어렵지만 건물주가 한 명인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특약을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