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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Nov 01. 2022

CCTV 작동 중입니다

혼자 근무하는 1인 약국이라서 좋은 점도 있지만 당연히 불편한 점도 있다.


한 달 정도 근무해본 결과 가장 불편한 점 두 가지를 꼽아보자면,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울 때 약국을 봐줄 사람이 없으니 번거롭지만 매번 문을 잠가야 된다는 것, 나를 대신하거나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모든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다행히 할 만은 하다.




그런데 어제 고민스러운 일이 생겼다. 내가 조제를 하기 위해 조제실로 들어간 틈을 타서,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약국 오픈 준비를 도와주면서 실제로 이 부분을 염려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누나가 조제하러 들어갔을 때 몰래 물건을 훔쳐가거나 그러면 어떡해? 직원 없으니까 봐줄 사람 없잖아."

"괜찮아. 그래서 CCTV도 설치했잖아.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물건을 훔쳐가고 그러겠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을 너무 몰랐다.


그렇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약국 일이 바쁘면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제는 여유가 좀 있어서 새로 주문해야 될 건 없는지 재고도 확인할 겸, 여기저기 매대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며칠 전에 들어와서 진열만 해놓고 아직 한 번도 판매하지 않은 크림 하나가 없는 것이었다. 분명 10개였는데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물건을 판매할 사람은 나뿐인데 판 기억은 전혀 없었다.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이상하네... 판 기억이 없는데.. 왜 하나가 없지?" (혼잣말, 1인 약국을 하면 혼잣말을 많이 하게 된다..)


혼자 중얼거리며 다른 쪽도 둘러보다가 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망고, 파인애플, 복숭아, 블루베리, 레몬 이렇게 다섯 가지 맛이 있는 포도당 캔디가 있다. 다른 맛은 그래도 하나 둘 나가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팔리지 않아 걱정하던 망고 맛이 하나 비어있는 것이었다.


제일 왼쪽의 망고맛이 하나 없어짐...


"뭐지? 진짜 이상한데.."(또 혼잣말)


뭔가 이상함을 인지한 나는 CCTV를 돌려보기로 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설치한 CCTV지만, 되도록이면 '돌려볼 일' 자체가 생기는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픈한 지 한 달 만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설마 하는 마음으로 녹화된 영상을 돌려보던 중 문제의 장면을 발견했다. 범인은 점심때쯤 다이어트 약을 처방받아 온 40대 여성이었다.


평범하게 처방전을 접수하고 잠시 서 있다가, 내가 처방전을 들고 조제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매대 위에 있는 크림 하나를 빼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라니... 놀라웠다. 훔치기로 마음먹고 온 사람처럼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리고 잠시 대기의자에 앉아 있더니 이번에는 아래쪽 매대에서 약을 하나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한참을 보더니 그건 내려놓고, 그 옆에 있던 포도당 캔디를 하나 빼서 가방으로 넣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하...."


영상을 확인하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다음에는 일어나서 뒤쪽에 진열된 허리 보호대를 보기 시작했다. 보호대를 빼서 살펴보던 중 내가 조제된 약을 들고 나오자, 사이즈를 어떤 걸로 해야 될지 물어보더니 같이 사갔다. 나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세상 친절하게 약 설명도 해주고 보호대 착용법도 알려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몇 시간 후에 다시 와서 보호대를 환불해갔다. 집에 갔더니 동생이 이미 사 와서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런가 보다 하고 웃는 얼굴로 환불을 해줬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조금 더 늦게 나왔다면 그것도 몰래 가져갈 생각이었던 거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내가 나와서 엉겁결에 사갔, 그래서 환불을 하러 왔을지도.. 확실하지도 않은데 사람을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미 그전의 행동을 봤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런 쪽으로 향했다.


혹시 모르니 CCTV 영상을 저장해놓았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마칠 때쯤 약국으로 온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더니 'CCTV 작동 중입니다'라는 문구를 붙여놓으라고 했다. 지금 당장 직원을 구할 수는 없으니 그런 문구라도 있으면 조심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사실 이런 걸 붙인다고 크게 효과가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달리 해결책이 없으니 일단 붙여놓았다. 부디 스스로의 양심을 속이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며...


부디 효과가 있기를..ㅠ




그 여자분은 약을 2주분 받아갔는데 2주 후에 다시 올진 모르겠다. 만약 온다면 CCTV를 확인했다고 말하고 가져간 물건 가격을 결제하도록 할 생각이다. 혹시 오지 않으면 그냥 마음이 아픈 사람에게 기부했다는 생각으로 넘겨야겠다.


사실 어제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화도 나고 속상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인류애 자체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혼자 머릿속 복잡했는데,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후련하다.


이런 게 바로 글쓰기의 순기능 아니겠는가.


초보 약국장은 이렇게 또 브런치의 도움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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