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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Nov 19. 2022

그녀가 왔다

도난 사건의 결말

얼마 전 약국에서 물건을 훔쳐갔던 40대 여성에 대한 글을 썼다. 화도 나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썼던 글인데, 많은 분들께서 위로와 조언을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다들 감사합니다!)


일일이 답글을 달지는 못했지만 댓글 중에는 다른 가게도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신고를 하라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화가 나서 신고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차분하게 다시 생각해보니 훔쳐간 물건의 금액도 크지 않고,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생각을 바꿨다. 게다가 신고를 하려면 진술서를 쓰기 위해 경찰서에 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공익도 중요하지만 나의 정신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방문 때 그러지 말라고 좋게 이야기하고 가져간 물건 값을 결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 글의 조회수가 무려 7만을 돌파했다.


7만이라니...


조회수가 높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 당사자도 내 글을 읽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진과 구체적인 정황이 나와 있으니 본인 이야기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약국에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딱 2주가 되는 날까지 계속 신경 쓰면서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갔다.




그런데 2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나 마음을 비우려고 할 때쯤, 그녀가 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처방전을 들고 온 것이다. 정작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아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야..) 애써 침착하게 처방전을 받아 전산 프로그램에 입력을 하고 조제실로 들어갔다.


그 사건 이후로 조제실에 새로운 아이템을 비치했다. 태블릿에 어플을 설치하여 CCTV 화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태블릿의 새로운 용도!


원래는 드로잉을 배우고 싶어서 샀던 태블릿인데 약국 오픈 이후 여유가 없어서 집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가져왔다. 뜻밖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유용하게 쓰면 그만이지.


CCTV 화면을 보면서 약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녀는 내가 들어가자 잠시 서 있더니 매대 위에 있던 10포짜리 유산균에 손을 뻗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봉지를 본인 주머니 속에 넣으려는 순간, 장면을 포착한 나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가져가려고 했던 유산균..


"저기요. 안에 CCTV 있거든요. 방금 가져가신 거 내려놓으세요."


내가 나오자 당황한 그녀는 미처 넣지 못한 유산균 봉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내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서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저번에 오셨을 때도 물건 가져가셨죠?"

"네? 뭘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발 뼘이다. (일단 모른 척해보는 건가?)


"여기 위에 있던 크림이랑 포도당 캔디 가져가셨잖아요. CCTV 영상 확인했고 저장도 해놨어요. 아실만한 분이 그러시면 안되죠. 따로 신고는 안 할 테니까 저번에 가져가신 것도 오늘 약값이랑 같이 계산하세요."


그녀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제야 순순히 대답했다.


"네.. 선생님 죄송해요."


나는 다시 조제실로 들어가 약을 지었고 CCTV로 보이는 그녀도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을 다 짓고 가져 나오니 포도당 캔디를 하나 꺼내 같이 계산해달라고 했다.(가져가서 먹어보니 괜찮았나 보다.) 저번에 가져간 물건 값까지 같이 계산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선생님 수고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경우에 부끄러워서 제대로 말도 못 할 텐데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도벽이 있는 걸까, 신고를 했어야 하나, 신고를 한다고 도벽이 고쳐질까, 이제 다음에는 우리 약국에 안 오려나...




이렇게 도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그녀 덕분에 7만 조회수를 얻었지만 입술 포진도 같이 얻었다. 약국 오픈 준비로 정말 힘들고 바쁠 때도 포진은 안 생겼는데, 이번 일로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은 것 같다.


약을 발랐더니 다행히 심해지지는 않고 일주일 만에 가라앉기는 했지만 부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녀도 이번 일로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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