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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날개 Jan 09. 2021

[산티아고 순례길] I Will Follow Him~!

[15일] 벨로라도(Belorado) 가는 길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에서 벨로라도까지 23킬로!

벨로라도(Belorado)는 띠론 강변에 위치한 도시다. 이름의 어원은 '아름다움'이다.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과 집들이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곳이다. 1,000년경,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진 불이 온 도시를 휩쓸었다는 전설, 이후 불사조처럼 살아난 도시는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천사의 사과
오늘 해가 장관이다.
에너지가 확장되는 느낌이다.
선물 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 같다.
동트는 장면을 360도로 돌며 사진을 찍는다.
360도 카메라가 있는 게 아니라, 혼자 도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사방팔방으로 기억하고 싶다. 괜히 좋다.  


카메라를 돌리는 순간, 멀리서 한 남자가 걸어온다. 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사과 한 알을 건넨다.

'뭐지?'

멍한 정신으로 그를 보다가 얼른 정신 차리고 감사 인사를 전한다.

“고맙습니다.”

그는 훨훨 나는 새처럼 가벼운 발걸음이다. 멀어지는 모습이 마치 빛을 받은 천사 같더니, 이내 사라진다.   

사과를 건네고 간 천사! 설마 나, 백설공주? 어, 얘기가 꼬이네?

갑자기 행복감이 밀려온다. 마치 초대받은 길이 맞다는 신호 같다.

 

나는 혼자 신이 나서 지그재그 길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주고 간 사과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기우제 댄스를 소심하게 춘다. 고독한 한 마리의 용가리 라고나 할까? 앞뒤로 아무도 없다. 불 뿜는 댄스로 천천히 나아간다. 오늘 하루는 어쩐지 행복할 것만 같다.




너의 웃음 뒤에


한참 걷다 보니, 멀리서 또 한 사람이 걸어온다. 혹시 내 댄스를 봤을까? 일단 도망가고 보자!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를 용케도 쫒아와 들여다본다. 아, 프랑스 청년! 다행이다. 봤어도 상관없는 인물이다. 그는 서부의 총잡이 같은 페도라를 쓰고 있다. 배낭 위에는 그의 겉옷이 풍성하게 얹혀 있다. 대부분 경량 패팅을 가져오는데, 그의 옷은 두껍고 무거워 보인다. 마치 피란 지게에 얹힌 이불 같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인생 피란 중일지 모르겠다. 껑충한 키에 페도라까지 쓴 모습이 일출과 잘 어우러졌다. 묘한 판타지 인물로 탄생한다. 그는 자기가 잘 생긴 줄 모르는 부류다. 눈은 강아지처럼 크고 순하지만, 가끔씩 빙구다. 모르는 영어 단어가 나오면 미스터 빈처럼 눈알을 부라리는 게 매력이다.

 

"서 봐, 일출 배경으로 사진 찍어줄게! 휴대폰 줘 봐!"

"내 휴대폰이 지금 작동이 잘 안 돼! 네 걸로 찍고 나중에 나한테 보내주면 안 돼? "

"음, 그러면 내 휴대폰으로 찍고, 나중에 숙소에서 보내줄게!"

"와츠앱으로 보내줄 수 있어?"

영어를 잘 못하는 그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내가 긴 대화를 한다. 손짓, 발짓, 눈짓, 의성어, 의태어를 다 동원해, 거의 몸으로 말해요, 수준의 퀴즈쇼다. 얼굴에 집중해 얘기를 하다 보니, 감정이 훨씬 더 세밀하다. 물론, 이 대화가 전혀 다른 방향의 대화일 수 있다. 가령, 그는 이런 내용으로 대화했을 수 있다.

"이봐! 가진 거 있으면 다 내놔! 휴대폰을 주시든가!"

"나 돈 없어. 전화비 낼 돈도 없어! 당신이 나한테 돈 좀 보태주면 안 돼?"

"음, 내가 뒤져서 돈 나오면 휴대폰으로 머리 찍는다. 숙소까지 따라갈 거야!"

"무슨 일이야. 나 좀 그냥 보내줄 수 없어?"

 

사실 언어를 안다 한들, 우리가 서로 정확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프랑스 청년의 눈빛이 좋아 웃고, 그는 괜히 신나서 껄렁 댄다. 내 걸음 속도에 맞춰 그는 게으름을 피운다. 먼저 보내야겠다.

"나 좀 쉬었다가 갈게! 먼저 가!"

"나도 쉴래!"

"넌, 더 많이 가서 쉬어!"

"왜?"

"넌, 더 많이 걸을 수 있잖아. 나는 여기서 발 좀 햇볕에 쬐고 갈게!"


그는 혼나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떠났다. 발이 아팠다. 어제 숙소에 도착해서 쉬지 못한 탓이리라. 내 걸음에 맞춰 그의 행보가 느려질 게 뻔하다. 어차피 일행도 아닌데, 부담 줄 필요 없다. 프랑스 청년은 사람이 그리운지, 심심해서인지, 사람 곁에 있는 걸 좋아했다. 느릿느릿, 도무지 부지런하거나, 힘이 느껴질 만한 구석이 없다. 숙소에서 나보다 더 느리게 뭉그적거렸을 것이다. 반수면 상태인 몰골이 말해줬다.





세미는 오늘 솔과 함께 벨로라도로 간다. 버스로 가니, 이른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벨로라도'가 아침부터 나를 욕망으로 이끌었다. 세미는 대만 사람이라 내 뜻을 전하는데 한계가 있었는데, 때마침 한국 처자가 잘 나타났다. 나는 숨겨왔던 한국어 욕망을 터뜨렸다.

"솔, 오늘 기분이 '벨로라도','벨로라도'에 잘 도착해야 해! 도착해서 '벨로라도'가 '벨로라도', 신나게 놀자!"

솔은 '끄응!' 소리를 내다가 '풋!' 하고 웃었다. 이 늙은 언니가 말 같지 않은 말을 샤먼의 주술처럼 내뿜고 있었으니, 어디까지 참아야 하나 생각했겠지! 세미가 뭔 말이냐고 물었지만, 솔과 나는 좀 심각한 표정으로 코만 들이켰다. 어쨌든 나의 한국어 살풀이는 최고점에 다다랐다.

"솔, 내 대사가 '벨로라도', 욕하지 말기! 정말 벨로라도!"


부장님 때문에 산티아고를 걸는 친구일지 모른다. 여기서 또 다른 부장님을 만날 줄 몰랐겠지! 어쩌면 처지를 비관하는 건 아닐까, 어딜 가도 피할 수 없는 악재 정도로? 하지만 솔은 다행히 피아노 선생님이다. 부장님을 만날 기회가 없다 했다. 대신 이런 원장이 있었다면, 그 원장을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겠지! 솔! 귀여운 친구! 30대 솔과 최종으로 합의한 호칭이 '언니'라서 좋다. 행여 '늙은'이라는 형용사는 망각의 숲으로 내던지길!





달콤한 그 향기

Grañón에 들어선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도 길게 뻗어 있다. 마치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하다. 길 끝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사람들이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다. 멀리, 누군가 내게 손짓을 한다. 누굴까?

“안녕하세요!"

한국말이다. 누구지?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한국 사람 같아서 인사를 한 건가? 궁금해도 속도를 낼 수 없다. 가까워지면 보일 테지! 아, 아는 얼굴이다. 로스 알코스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다. 복잡한 야외 테이블에서 합석의 기회를 줬던 고마운 사람들! 나는 깡충깡충 뛰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몇 개의 돌계단을 오르자, 큰 나무 아래로 쉴 공간들이 나타났다. 중심에는 바가 있었다. 휴양지 바닷가에나 있을 법한 자유가 담겼다. 간단한 차와 빵이 주 메뉴다. 맛과 가격이 훌륭하다는 오렌지 주스를 사람들은 딱히 자리를 잡지 않고도 즐기고 있었다.


어? 한국인 부부 옆에 프랑스 청년도 있다. 얼마나 천천히 걸었으면 나한테 따라 잡히나? 그는 큰 나무 아래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 부부와 거의 얼싸안다시피 인사를 했다. 프랑스 청년이 그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 타이르 듯 쉿! 조용하라며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냈다. 나이 먹은 남자 앞에서는 진지한 표정이다. 혼나는 건가? 돈을 꾸는 건가? 내가 한국인 부부와 깔깔 대며 웃는 동안, 그가 '수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뭐지? 이 멋짐 어쩌지?


프랑스 청년의 진중하면서도 장난스러운 표정이 내게 훅 들어왔다. 이런 사람들은 나와 코드가 잘 맞는다. 수다의 기본기가 탄탄하다. 애석하게도 이런 콘텐츠가 그만,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프랑스 남자의 눈빛이 갑자기 로맨틱해졌다. 아니,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어쩐지 프랑스 남자만의 향기랄까? 음, 스멜~! 이 스멜, 어쩐지 오렌지 향기 같다.  

“오렌지 주스 맛있어요. 여기서 직접 짜주는데, 싸고 신선해요.”"

 아, 환상 깨기 전문가다. 한국인 부부가 가리킨 곳은 바였다. 오렌지 향기의 진원지!

“드셨어요?”

“네, 아까부터 마시고 쉬는 중이에요. 이제 가려고요.”

짧지만 즐거운 수다였다. 한국인 부부를 먼저 보내고, 나는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바에서 주문을 마치고 오는데, 눈 앞에 햄버거 처자가 떠억 하니 나타났다. 아, 결국 마주치게 된 사람! 비록 빵과 커피지만 햄버거의 한을 풀게 됐다. 프랑스 청년도 어느새 내 뒤쪽 테이블에 앉았다. 진작 앉을 것이지, 왜 여태 다리 아프게 서서 얘기했을까? 그에게 주스 한 잔을 건네고 싶었지만, 동행이 있었기에 오지랖을 접었다. 햄버거 처자가 역시 서둘러 일어섰다. 화장실에서 근본적인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나를 남겨두고!


마주하던 남자가 잠시 자리를 뜨자, 프랑스 청년이 내게 두꺼운 책을 보여줬다. 자신과 수다 떠는 남자가 프랑스 작가란다. 책을 줬는데, 좋지만 무겁다며 찡그렸다. 나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대작가의 책이라도 배낭에 넣고 다닐 물건은 아닐세! 그나저나 저 작가는 대단한걸? 자신의 책을 순례길에 가지고 올 생각을 하다니! 그 열정에 박수를! 프랑스 작가가 자리로 돌아오자, 프랑스 청년은 다시 경청 모드였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살짝 자리에서 떴다.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보니, 그라뇽은 운치 있는 마을이었다. 원래 산티아고 사무실 일정 대로라면 어제 하루 묵고 갔을 마을이다. 하지만 나헤라에서 28 킬로 넘는 거리를 하루에 어찌 가겠는가. 일찍부터 접길 잘했다. 많은 사람들이 로스 아르코스 부터 얼마 구간을 거리를 조절하며 걸어야 했다. 순례자 사무실에서 받은 일정표대로 가는 건 무리였다. 차라리 순례자 협회나 까미노 앱의 일정을 참조하는 게 나았다. 아무리 탄력이 붙었어도 20킬로 기준이 무난하다. 그라뇽에 묵으면 먹을거리들이 많다는데, 아침에는 해줄 수 있는 식당을 찾기 힘들 것이다.  미련 없이 가야지, 갈수록 먹고살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른다. 순례길을 걸어도 살이 안 빠지는 비밀이 바로 이거였다. 걸어도 걸어도 먹을거리가 천지다. 걷는 동안 살이 빠져도 도착하면 회복된다는 설을 체험 중이다.    


<알아두면 좋아요>

그라뇽은 언덕 위에 세워진 성벽의 보호로 중세에 호황을 누렸다. 여름 동안, 마을은 순례자들로 생동감이 넘친다. 그라뇽의 대표적 먹을거리는 전통 음식인 그라뇽식 감자요리(Patatas a lo Grañon)와 마늘 수프(Sopa de Ajo), 그라뇽식 순대(Morcilla de Grañon)가 있다. 8월의 마지막 주에는 감사 축제(Fiesta de Gracias)가 열리는데, 이 기간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라뇽식 감자요리를 준비해서 모두 함께 먹는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예술가로 사는 건


나는 아무리 날고뛰어도 뒷사람들에게 꼬리가 잡힌다. 프랑스 청년이 어느새 바짝 따라붙었다. 그 작가는 어디에 두고 혼자만 터벅 대며 온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그에게 소리쳤다.

“멋진 포즈 해봐~!”

아까 찍은 사진이 역광이 짙어 그림자 수준이다. 그가 알아듣고, 모델 같은 포즈를 취했다. 마치 뮤지컬 배우라도 된 듯 액션이 크다. 아름다운 풍광과 하나가 된 모습, 어쩐지 서부영화에 나옴직한 분위기다. 그의 멋진 모자가 한몫했다. 그는 이제 적극적인 몸짓으로 모델이 된다. 이제야 잠이 깬 게 분명하다. 교장 선생님 훈화에서 벗어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군!

“나도 찍어 줄게!”

나 역시 열심히 포즈를 취했지만, 실패다. 그의 사진 스킬은 훌륭하나, 실루엣이 마음에 안 든다. 필터 후유증이다. 실체를 마주하는 건 씁쓸하다. 한숨을 내쉬자, 그가 다시 찍어주겠단다. 다다다다다! 연사로 총을 쐈다. 나름 빠른 손놀림이다. 선별된 다섯 컷을 내게 내민다. 음, 마음에 든다. 역광으로 막 찍고, 그나마 괜찮은 그림자 인간을 남겼다. 이상하게 다다다다 연사 동안 내 가슴에 구멍이 난 건가? 속이 허하다. 내 눈치를 살피다가 두 걸음 먼저 움직이는 미스터 빈! 이럴 때는 눈치가 빠르네? 생존 가능성 있음!


아침 햇살이 길게 뻗었다. 저 멀리 길가에 있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조금만 더 빨리 걸으면 나보다 일찍 출발한 이들의 뒤통수도 볼 수 있겠다. 속도를 내볼까 하던 참이었다. 프랑스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나는 사진 찍는 게 좋아.”

그제야 프랑스 청년이 뭐하는 사람인지 들었다.


그는 순례길에 오르기 전, 마드리드 고급 식당에서 매니저로 일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사진작가’다. 오늘 자기 찍은 사진을 나중에 왓츠앱으로 보내달라고 몇 번을 얘기한다. 사진만 찍었지, 자기를 찍은 적은 별로 없단다. 그와 대화를 하면서 나는 내내 웃었다. 영어 단어를 까먹을 때면 "읍푸~!" 하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통에 내가 얼마나 대놓고 웃었는지! 네 걸음 가다가 웃고, 다섯 걸음 가다가 웃고,  키키키 웃는 내 앞에서 그는 계속 미스터 빈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 영어 못 해. 사진 찍고 먹고살 수 없어. 돈 벌어야 해. 식당에서 일 해.”

“음식을 네가 만들어?”

“아니, 난 요리사가 아니라 매니저야.”

“왜 요리를 안 배웠어? 배우면 좋았을 텐데!”

뭐가 좋았을까? 순례길에서 근사한 요리를 얻어먹었을 텐데, 하는 나의 속마음?

내 얘기에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 난 사진을 찍을 거라니까! 요리를 배울 필요가 없어!”

그가 과장된 표정으로, 여태 뭘 들었냐는 듯, 장난 섞인 얼굴로 씩씩 대더니, 이내 진지해졌다.

"나는 가난해. 예술가들은 가난해. 사진을 찍으려면 돈이 필요해. 그래서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생각하고 있어."

"그래, 예술가들은 가난해. 그래도 인생은 풍성해! 떠오르는 해를 봐! 축복이야!"

정말 그럴까? 나도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으면서!

그가 눈을 껌뻑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진작가로 살 거야."

“훌륭한 생각이야!”




나는 그의 웃음 뒤에 섞인 슬픔을 보았다. 그래서 오늘 그를 찍어주고 싶었나 보다. 그의 영혼이 온전히 하늘과 맞닿을 수 있기를, 온전히 길 위에 스며들 수 있기를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예술가의 삶이 하늘과 땅과 하나로 연결된 한 장의 사진으로 담길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사진작가가 꿈이라면서도 변변한 카메라도 없었다. 휴대폰으로도 풍경을 담지 않았다.


"왜 사진 안 찍어? 오늘 일출 멋지잖아."

"많이 본 건데, 뭘!"

그가 휴대폰에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멋진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는 돼야 찍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음, 이런 풍경이 여기서는 흔한 거였구나!

“정말 사진 잘 찍네?"

그런데 왜 나는 그따위로 찍었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대화가 꼬이겠지?

"이 길을 걷고 나면 더 멋진 길이 열릴 거야.”

손가락으로 걷는 모양을 하고 문이 열리는 마임을 했더니, 그가 알아들었는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꼭 멋진 사진작가가 되길 바랄게!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길 기도할게! 나는 그의 소망에 내 바람도 살포시 얹었다. 굿 럭이다. 나의 미스터 빈!

 




누구?


Redecilla del Camino에 들어섰다. 커피라도 한잔 할까 싶었는데, 마을이 텅 빈 듯하다. 프랑스 청년이 땅에 떨어진 오이를 주워 식수대에 씻었다. 누군가 오이를 씻고 배낭에 넣다가 흘린 게 분명했다. 그가 씻은 오이를 내게 잘라준다. 오다가 주웠어야? 이 멘트에 어울리는 비주얼은 이게 아니잖아? 사실, 나는 오이와 토마토는 샐러드에나 넣어 먹지, 굳이 따로 먹지 않는다. 그래서 마다했다. 오이를 아작 씹으며 그가 마을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있다. 길을 찾는 중일 게다. 그는 좀 더 자유롭게 걸어야 한다. 나를 신경 쓴다고 더뎌져서는 안 된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소리쳤다.

"쉬다가 와! 나 먼저 가고 있을게!"

그가 안내판을 보다가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멈추지 않은 빨간 구두를 신은 사람처럼 그와 멀어지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나, 빨간 구두의 주인공? 앗! 그러고 보니, 내 등산화가 비슷한 벽돌색이다.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프랑스 청년이 좋은데, 왜 그를 떠나오는 거지? 그와 얘기를 나누며 걷는 이 길이 좋았는데, 왜 멈추지 않고 가고 있는 거야? 지금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왜 빨리 걷는 걸까?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무의식적으로 그와 동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있는 건가? 사실, 그가 내 걸음 속도에 맞춰 걷는 건 그의 의지인데, 왜 내가 미안해하는 건가? 그래, 나는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행여 그에게 짐이 되는 시간이 올까 봐 미리부터 피하는 것인 게지! 아니, 어쩌면 슬픈지 모르겠다.

가난한 예술가를 보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그를 일찍부터 떠나오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도울 수 없다. 내 슬픔을 온전히 떨쳐 내지 못한 길, 어쩌면 이 슬픔마저 그에게 전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를 떠나오고 싶은 것이구나! 얼씨구! 누가 보면 프랑스 청년이 사귀자고 한 줄 알겠다. 오다가 주운 오이 속에 실가락지라도 숨겨 놨을까 봐? 음, 어쨌든 안 돼! 그도, 나도, 단단하게 이 길을 걸어야 해!


마을을 다 벗어나지 못했는데, 차도로 합류하는 길에서 프랑스 청년과 다시 만났다. 다리가 길어서 가능한 속도다. 그는 조금 삐친 얼굴이다. 사실 내가 잘못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렇게 떠나오다니! 의리가 없는 거다. 나는 애써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왜 안 쉬었어?”

“카페도 없어. 어디에서 쉬어?”

그는 더 이상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났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중이다. 나의 미스터 빈이 웃지 않는다. 그가 걸음을 멈춘다.

“수, 네 뒤에 사람들이 있어. 더 있으면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있어.”

"어떤 남자?"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야?’라고 물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내 뒤로 중년 부인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남자는 뭐야? 단지 걸음을 멈추지 않은 것 때문에 저리 화가 났어?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내 느린 걸음으로 너의 순례길이 방해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말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제 더 멀어진 미스터 빈의 뒷모습, 이제 나는 따라잡을 수 없다. 지금 소리쳐서 붙잡아야 하나? 영어도, 프랑스어도, 스페인어도, 한국어도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지? 그간 어떻게 대화를 했지? 갑자기 그와 함께 했던 시공간이 사라지고, 다른 시공간으로 튕겨져 나온 느낌이다. 여기가 어디이고, 지금이 몇 시인지, 그는 또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지? 낯선 순간, 낯선 길에서 낯선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본다.

그래, 물 흐르는 대로 가자. 오해는 오해대로, 이해는 이해대로! 초연해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도대체 누가 온다는 거야? 그의 손가락은 중년 부인들을 지나 훨씬 뒤를 가리켰다. 누가 온다는 거야? 그는 이미 마을을 벗어나 내 시야에 사라지고 없었다.


<알아두면 좋아요>

레데시아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는 까미노 때문에 발달한 전형적 마을이다. 중세 프랑크 왕국의 중요한 점령지로 언제나 많은 순례객들로 붐볐다. 마을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두 개나 있고, 8월에는 순례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진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몰라


Castildelgado를 지나가는데, 성당 근처 작은 집 앞에 작은 의자가 있다. 나는 배낭을 멘 채 잠시 기대어 앉았다. 사람이 없다. 마을들이 다 텅 빈 듯 조용하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 사과 천사다. 훨씬 앞서 걸어간 그가 어떻게 뒤에서 나타났지? 그를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 아까는 미처 건네지 못한 인사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

“안녕하세요. 사과 정말 고마웠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어디에서 쉬다가 오시나요? 오다가 카페를 못 봤는데?”

“나는 길에서 쉬어요.”

“아, 그래요? 못 봤는데?”

그가 웃었다. 착한 웃음이다. 미스터 빈이 말한 사람이 이 사람인가? 이 사람이랑 걸어오라는 거야? 그가 내게 사과를 준 걸 알았던 거야? 아, 내가 자랑했지! 그런데 앞서 간 이 천사가 뒤에서 오리란 건 어찌 알았지?


그가 내 옆 의자에 앉더니 들고 있던 봉지를 뒤적인다. 그 안에 빵과 과자, 과일이 가득하다. 왜 이런 큰 봉지를 들고 다니지?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봤던 큰 봉지다. 그가 내게 묻는다.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어요? 빵 먹을래요? 치즈도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 배낭에도 간식 많아요.”

그가 뭔가를 말하려다가 머뭇거렸다. 좀 이상했다. 혹시 순례자가 아닌가? 배낭 대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배낭을 동키로 보냈다고 해도 기본 물품 없이 간식만 저리 잔뜩 가지고 다녀? 이 사람, 아무래도, 그러니까, 순례길에서 흔히들 말하는, 그러니까, 괴짜구나! 그래, 순례자들 중에 괴짜가 많다더니! 순례자 본연의 모습으로 걷는 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내 이런 생각과 달리 그는 얌전한 표정으로 말한다.

“사람들이 저한테 간식을 많이 줘요.”

아, 이 사람은 그냥 마을에 사는 사람이구나! 순례자들이 무거워서 간식을 이곳에 두고 가나 보네? 아니면  알베르게에서 일하나? 물품을 두고 오듯 간식도 무거워서 두고 올 수 있지! 그는 봉지를 펼친 채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하다. 그리고 불현듯!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 뭔가를 말해야지 결심할 듯한데! 순간, 나는 겁을 먹었다. 혹시 이 사람이 강도면 어쩌지? 하는 생각! 둘러보니, 마을에 사람이 전혀 안 보인다. 지나가는 순례자들도 없다. 그가 내 돈을 뺏으면 속수무책인데?  분명, 아까는 천사 같던 사람이었는데, 왜 갑자기 눈빛이 저리 번쩍이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천사와 악마의 싸움!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결국 그는 천사의 모습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고 길을 떠났다. 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저 사람, 왜 머뭇거려? 진지한 눈빛은 뭐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미안했다. 내가 멍청한 생각을 했다. 한 순간에 천사를 악마로 둔갑시키다니! 에이쒸, 미스터 빈 때문에도 미안한데, 사과 아저씨 때문에 또 미안해지네. 나는 다다다다 뛰었다. 그를 찾기 위해서인가? 없다. 걸음이 빠른 거야? 왜 안 보여? 나는 숨을 헉헉 고르며 걸었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그리고 미스터 빈도 내가 안 버렸어. 최종에는 걔가 날 버린 거잖아! 아, 이러니, 뿌듯하다. 합리화는 정신 건강에 이로운 장치야. 랄랄라라~! 가만, 그나저나 미스터 빈 걔 웃긴다? 누가 언제 동행 구한댔어? 왜 갑자기 오지랖? 내가 자기 말 듣고 그 남자랑 동행해야 해? 나참, 흠! 웃겨! 흥칫뿡! 근데, 나, 왜 이러고 있는 걸까요? 미래의 어느 날, 사과 천사와 마주치게 될 걸 예감한 걸까? 이건 다 미스터 빈 때문이다. 왜 의식적으로 그와 나를 연결시켜서, 내 속성을 보게 했냐! 그래야만 속이 시원했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사과 천사 앞에서 섰는지, 어떤 연극을 한 바탕하게 됐는지, 미래의 어느 날, 나는 너를 떠올렸다. 미스터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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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틸델가도(Castildelgado)의  원래 이름은 비야뿐(Villapun)이었다. 16세기, 주교 돈 곤살로 힐 델가도를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바꿨다. 비옥한 땅과 강가의 검정 버드나무 숲 사이에 자리 잡은 곳으로 화려한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순례자 병원은 몇 백 년 동안 이곳을 지난 순례자들을 치료했다. 8월에 성 아구에다를 기리는 행사가 펼쳐진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영화 속으로


Castildelgado에서 Villamayor de rioja로 가는 길에 익숙한 장소가 보였다. 어? 영화에서 본 장소잖아!

 <더 웨이>라는 산티아고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장소! 볏짚이 건물처럼 높게 쌓인 곳인데, 순례자들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관련 영화가 귀하다. 영화 속 아버지는 아들의 못다 한 순례를 완성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영화가 잔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순례길을 걸어보니, 그게 최선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무협이 나올 것도 아니고, SF가 자리할 것도 없다. 그저 소소한 이야기만큼 로맨스도 잔잔하게 펼쳐지는 길이었으니! 인생 역시 잔잔한 파도처럼 희로애락인데, 우리는 그 정도의 파도에도 휘청인다.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고통 속에서 길을 걸고 있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애써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젊은이들은 도전의 길인 듯 활기차 보였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있었다. 중년과 노년은 말해 무엇하리, 삶을 돌아보고 이제 남은 길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걷는다고 쉽게 찾아질 길이겠는가!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인생의 축소판처럼, 집약적으로 '나'를 조명해준다. 산티아고로 가는 800킬로의 여정은 인생 축약 프로젝트로 '나'를 들여다보는 게임이기도 하다. 내가 인생을 살아온 패턴을 발견하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모든 것은 '나'로 시작해 '나'로 끝나는 연극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회한


Villamayor de rioja를 지날 때였다. 점심을 야외에 앉아 먹을까 싶었다. 배낭 무게를 줄이려면 간식부터 해결해야 했다. 성당 앞에도 벤치가 있었지만 그늘이 필요했다. 한 카페 앞을 지나다가 BBC 영국 아저씨를 보았다. 그와 친했다면 카페로 들어가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간식 짐을 줄이는 게 먼저였다. 영국 아저씨는 이미 커피를 다 마신 눈치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나왔다. 몇 걸음 더 걸어서 그늘진 예쁜 집 앞 벤치에 앉았다. 간단히 살라미와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 메디가 보인다. 영국 아저씨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어? 영국 아저씨가 메디랑 같이 있었구나! 메디가 있었다면 안에 있다고 말해주지! 그러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을 텐데! 왜 내게 메디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까? 그는 메디와 봉사활동 얘기를 자주 했다. 그 시간을 뺏을 가봐 그랬나? 저 영국 아저씨도 참, 사람 욕심이 많은가 보다.


메디가 나를 보자 달려와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나간 것도 몰랐던 눈치였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다 먹으면 같이 가자고 했다. 내 옆에 앉아서 기다리겠다는데 영국 아저씨가 먼저 가자고 눈짓했다. 그래, 나도 영국 아저씨와 함께 가느니 메디를 보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메디는 하는 수 없이 먼저 떠나겠다며 일어났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아가씨다. 애교도 만점이다. 그녀가 아쉬워하며 내게 인사를 건네고 몇 발자국 걷다가 갑자기 내게 소리쳤다.

“와우! 지금 너무 예뻐요. 사진 찍어주고 싶어요! 배경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배경이랑 잘 어울린다고? 사실, 이 집이 동화에나 나오는 예쁜 집이다. 내가 나중에 타샤 할머니처럼 늙으면 이런 집을 짓고 살아야지 싶은 집! 음, 메디가 그걸 알아보네? 그런데, 내가 아까 미스터 빈한테 했던, 배경과 잘 어울린다며 사진 찍어주겠다던 그 짓을 메디가 똑같이 하고 있다. 아, 조금만 잘하면 나도 천사가 될 수 있겠는데, 메디 같은 천사 미소는 지을 수 없단 말이야! 다시 태어나야 가능? 애석하게도 인정!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까지 푹 눌러썼다. 서양 친구들은 그저 맨 얼굴로 돌아다니는데, 우리는 그랬다간 섬마을 선생님이 된다. 어찌나 동양인 피부는 잘 타는지! 서양인 피부와는 확연히 다르다. 여하튼 예쁜 집 앞에 앉아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나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메디가 연신 카메라 구도를 잡으며 감탄했다.

"와, 너무 예뻐요."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그렇게 예뻐?”

“집이랑 너무 잘 어울려요!”

응? 그러니까, 집이랑 어울려서 예쁜 거네? 그때 영국 아저씨가 내게 정중히 말했다.

“선글라스를 벗어봐요! 얼굴 잘 나오게! 그럼 더 예쁘게 나올 거예요."

아, 이건 무슨 상황? 대개 얼굴을 많이 가려야 예쁘다고 하는, 아니지, 선글라스를 껴야 멋진 거 아닌가? 하지만 그는 얼굴 가리고 사진을 찍으면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고 했다. 이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충고인데? 메디도 덩달아 말했다.

"맞아요. 예쁜 집이랑 벤치, 얼굴도 나와야 예쁘죠!"

둘러대지 마라! 아까 집이랑 찍어야 예쁘다며? 나는 어쩐 일로 영국 아저씨의 제안에 순순히 응했다.

"치즈~!"

음, 딱히 잘 나온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예쁜 집과 벤치와 어우러진 모습이 좋아 보였다.


그들이 마저 먹으라며 떠나려 할 때 이번에는 내가 질척댔다.

"같이 사진 찍어요."

메디가 신나게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댄다. 싱글벙글, 이런 캐릭터는 천상계 정도에 가야 보게 될 것 같는데? 그리고 내가 영국 아저씨에게도 빨리 달려들라고 하자, 그가 화들짝 놀랐다.

“나도 찍어도 돼요?”

“물론이죠? 왜 안 되겠어요? 아, 빨리요, 빨리! 지금 내가 예쁘게 잡히고 있단 말이지!”

그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미소로 다가왔다. 메디도 덩달아 신났다. 우린 예쁜 집 앞에서 얼굴을 모았다. 그간 내가 영국 아저씨를 마음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도 왜 자신에게 퉁명스러웠는지 신경 쓰였나 보다.


나는 반성 모드로 임했다. 이가 다 드러나도록 헤벌쭉 웃었다. 그러자 메디도 영국 아저씨도 활짝 웃었다. 우리의 모습, 아주 친한 사이 같다. 이 정도면 성공이야. 감쪽 같이 위장했어. 과거도 지우는 거야. 우린 친한 거다. 난 영국 아저씨가 싫지 않았고, 우린 서로 친절을 베푼 사이야. 음, 그런데 예쁜 집은 어디로 간 거야? 우리 얼굴이 다 차지해서 여기가 마구간 앞인지 예쁜 집 앞인지 알 수 없네? 그래도 기억하면 되지! 사람의 마음은 순식간에 풀린다는 걸 경험한 순간으로 말이지! 나는 그제야 미래의 어느 날 선글라스를 벗지 않아 후회했을 그 사진에서 맑게 웃고 있는 나를 보게 해 준 영국 아저씨가 고마웠다. 인간이 이렇게 단순하다. 지금은 하루 종일 걷고, 먹고 자는 게 인생의 전부다. 단순하게 삐치고, 단순히 마음 풀리고! 그래서 더 원초적인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더 쉬었다 가겠노라고 했다. 그들은 기분 좋은 미소로 인사를 날리고 떠났다.


마을에서 순례길로 접어드는 언덕 내리막, 아, 하염없이 펼쳐진 이 길!  처음으로 길을 걸으며 회한에 잠긴다. 저 멀리,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 외로웠다. 세미와 솔이는 버스를 타고 가고, 나는 홀로 걷는다. 영국 아저씨와 메디는 개미만큼 작더니, 이내 점처럼, 먼지처럼, 내 시야에서 흩어졌다. 나는 의지로 혼자를 택했다. 미스터 빈이 삐쳐 간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왜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그 아침에 사과를 건넨 그 천사를 나는 왜 의심했을까? 정말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한데, 싸움을 끝내고 얻은 평화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분명 행복한데, 허전함으로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게 늙어가는 징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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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로리아 데 리오하(Villamayor de rioja)는 산티아고 길을 사랑하는 순례자라면 꼭 들러야 할 마을이다. 백 명도 채 안 되는 마을은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모든 순례자들에게 친절하다.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는 카미노에 다리를 축조하고 길을 닦고, 병원을 설립하는 등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5월 12일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Villamayor de rio 너무나 작은 마을, 식수대 옆에 분수가 있고, 돌의자와 테이블이 다섯 개 정도 있다. 마을도 작은데, 공원도 작다. 그래도 나름 그네도 있다. 큰 도로 옆으로 형성된 곳이라 이곳은 정말 사람이 사나 싶게 텅 빈 듯했다. 그대로 통과해 지나가도 될 마을이지만, 의자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좀 쉬고 싶었다. 간식도 먹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카페는 물론, 화장실도 없다. 그래도 남은 간식은 해결하고 가야지! 이제 5킬로만 더 가면 오늘의 목적지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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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 rio)는 벨로라도와 같은 마을이었다가 18세기에 새로운 마을로 분리되었다. 순례자들이 벨로라도로 들어가기 전에 휴식을 취하기 좋은 장소이다. 시원하고 깨끗한 샘과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이 마을의 고요함과 어우러져 긴장감을 씻어준다. 조용한 이 마을에도 매년 9월 1일에 산 힐을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다 덤벼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Belorado)에 도착했다. 길목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 야외 의자에 미스터 빈이 앉아있다. 보아하니 벌써 샤워와 빨래까지 마치고 폰 충전도 끝낸 상태다. 나와 함께 걸었다면 여태 길 위에 있었을 텐데! 아, 질풍노도 팀도 공립 알베르게에 머무는지, 미스터 빈과 얘기를 하고 있다. 다행이다. 저 녀석들이 여기 묵는데, 나는 오늘 공립에 머물지 않는다. 미스터 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별로 웃지 않는 얼굴로 나에게 대충 눈인사를 건넸다. 오히려 질풍노도 애들이 오버스럽게 손을 흔들며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으싸으쌰 힘내라며 클락션 울리는 수준이다. 알아! 내가 지금 얼마나 얼굴이 벌게져서 골목에 들어섰는지, 햇빛에 달구어진 얼굴이 미스터 빈 때문에 더 화끈거렸는지 모르겠다.


되도록 빨리 공립 알베르게 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근데 미스터 빈과 나, 이렇게 갑자기 어색해져도 되는 거야? 예술가들이 그렇지 뭐! 흥! 그는 어쩌면 내가 공립에 머물 줄 알고 차차 말하자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두 말 없이 공립을 지나쳐오자 멀찍이서 나를 바라봤다. 사실 짠 하고 골목 어딘가로 사라졌어야 했는데, 내 알베르게를 못 찾는 바람에 헤매는 꼴을 보이고 말았다. 어쨌든 해명할 기회가 또 있겠지. 일단 나의 알베르게부터 찾아야 한다.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현지인의 도움으로 드디어 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인형 같은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미와 솔이 일찍부터 도착해서 잘 놀고 있었다. 혹시라도 내 자리를 맡아주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사실 여권이 있어야 등록 가능한 것이니 기대는 안 했지만, 세미가 조금 퉁명스럽게 자기가 왜 맡아줘야 하냐고 반문했다. 응? 이건 무슨 감정 전달이지? 전에는 창문 옆 빈 침대를 나 보고 쓰라는 둥, 친구 온다고 맡아달라고 했다는 둥 하더만! 다른 놀 친구가 생겨서 마음이 뜬 게야? 뭐, 그러거나 말거나! 잊지 말아라. 솔도 한국인이다. 한국말로 편 먹을 수 있다.


어쨌든 침대가 있으면 되는 거지! 다행히 아직 여분이 있다. 그런데, 2층이란다. 세미가 내게 서운한 게 있는 듯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뭐래도 그 감정을 받아줄 힘이 없다. 어쨌든 혼자 뭔가 삐쳐서 말투가 좀 달라졌다. 지들이 버스 타고 와놓고, 설마 나 혼자 걸어왔다고 불만 생긴 것도 아닐 테고? 처음에는 걸어오느라 애썼다는 둥 그러더니만, 언제부턴가 내가 발이 아파도 꾸역꾸역 걸어오는 걸 고집으로 여겼다. 사실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마을에 도착할 즈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쉬면서 느리게 걸어오다 보니, 남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잘못한 건 아니잖아? 오늘 다들 왜 그러는 거냐? 확, 그냥, 다 덤벼! 그냥 기절 좀 하자! 아, 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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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라도(Belorado)에서는 다양한 쇼핑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질 좋은 가죽제품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의 유명한 채소와 강낭콩 요리도 지친 순례자의 하루를 풍성하게 해 준다. 강변의 델 소또와 델 비베로 식당이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얼마 전까지 산 까브라스 동굴(Cueva de San Cabras)에 까쁘라시오 성인상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산 니꼴라스 성당에 있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자 협회 자료 참조-





사실 늘 급히 샤워하고, 빨래하고, 밥까지 챙겨 먹느라, 지척에 있는 성당과 마을 구경을 건너뛸 때가 많다. 이렇게 걷는 순례길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세미가 보기에는 내가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걸음이 빠르거나, 부지런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은 없고, 오로지 길 위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해 보였을까. 사실, 길을 걸어오는 동안만이라도 온전히 나를 담고 싶었다. 느려도, 뒤처져도, 그렇게 오는 걸 후회하지 않았다. 더 빨리 걸어서, 일찍 도착해서, 마을 구경도 하고 예쁜 카페에서 휴식도 취하며 오후를 보내고 싶었다. 걷는데만 급급한 건 애석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냥 걸어보고 싶었다. 걸어서 800킬로에 도착하면 어떤 감정을 겪게 되는지, 그래 보고 싶었다. 그러니 나를 탓하지 마라. 이번 첫 순례는 그냥 걸어서 800킬로를 가리라! 가는 데 까지 가보는 것, 거기에 의의를 둬야지 싶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세미와 마음이 엇갈리기 시작했나 보다. 혼자일 때 나와 어울리려고 애써 걸었던가보다.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 내가 함께 버스도 타며 이동할 줄 알았는데, 애써 걷겠다니, 따라 걸으며 화도 났던 것 같다. 그나마 자신과 함께 버스로 이동할 동지가 나타나니, 순례길을 걷는 것만이 장땡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을 수 있다. 마을에 도착해서 예쁜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즐기는 것을 잊은 나를 세미가 안타까워했는지 모르겠다. 순례길을 즐기지 못하고 왜 그리 고집스레 걷느냐는 것인데! 사실 세미의 마음도 알기에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다. 어쨌든 됐어! 내가 가겠다는 뭘! 가는데 까지 가보겠다는데 뭘!   


방에 사람이 많았다. 운 좋게 1층 침대를 맡았다. 환자와 노인들을 위해 한 두 개 빼놓은 침대를 얻게 된 거였다. 누가 봐도 내 절뚝거리는 모습은 환자였다. 설마 노인 우대로 얻은 건 아니겠지?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발은 아팠지만 일단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솔이 같이 가주겠다고 나섰다. 참 예쁜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벽화 마을이다. 여기저기 예술품 같은 벽화가 그려져서 사진 찍는 재미가 쏠쏠했다. 성당 앞 광장 주변으로 가게들이 둘러 있었다. 지금은 낮잠 시간이라 모두 문을 닫았다.






알아


일단 성당으로 갔다. 이따가 저녁 미사를 노래로 한다기에 시간을 외워두었다. 결혼식이 있었는지 성당과 광장 사이로 사람들이 흘러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성당 입구 한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었다. 순례자였다. 멀찍이서 보고 있다가 잘 그린다고 했더니 부끄러워한다. 순례를 하면서 연필로 성당을 스케치하며 다닌다고 했다. 그때 미스터 빈이 나타났다. 친구와 둘이 있었다. 그 남자도 내가 아는 사람이다.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내 얘기를 했는지, 그가 아, 하며 유난스레 아는 척을 하며 애정 있는 미소를 지었다. 설마 미스터 빈이 내 얘기를? 나를 씹은 건 아니겠지? 그래, 내 욕은 안 했을 것 같다. 인사를 건넨 그 남자의 눈빛에서, 태도에서, 표정에서 나에 대한 인식이 나타났다.


타인의 얘기를 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사실 사람은 느낌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이들이 나를 욕했는지, 칭찬했는지! 개도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는 것과 비슷한 감이다. 이들은 우연히 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저 같이 걸어왔다 정도였을 게다. 한국 여자, 특히 내 또래 여자가 거의 없었다. 혼자 다니는 한국 여자, 나이와 머리와 입은 옷 정도로 특정 지을 수 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아는 척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순례자들끼리 서로 얘기를 하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루트로 이동하니, 알고 보면 다 아는 사이였던 게 많았다. 아, 그 사람 알아, 알아, 그러면서 얘기를 했을 것이다.


나는 솔이 옆에 있고, 미스터 빈도 옆에 그 남자가 있어서인지, 소개 외에 애써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잘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인사를 날리며 헤어졌다. 그 사이 성당을 스케치하던 아저씨를 놓쳤다. 내가 그의 그림을 그들에게 자랑한답시고, 쪼그려 앉아 눈 깜빡이고 있는 게 부담스러웠나 보다. 한두 놈 왔을 때도 부끄러웠는데, 몇 놈이 구경하는 중인 것이야? 음, 그래도 멀리 못 갔을 것이다. 잠복하면, 못다 한 그림을 마저 그리러 오는 그를 현장에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 심심하다. 순례자 대부분 식당 문도 안 열려서인지, 광장을 부유하고 있었다.







예술 혼


마을 여기저기 예술성이 뛰어난 벽화들이 넘쳐났다. 나는 본격적으로 솔과 함께 쇼쇼쇼 타임으로 사진을 찍었다. 예술 혼이 느껴지는 이 자태! 솔이 이따가 성가로 진행하는 미사를 자기도 보고 싶단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빨리 하고 함께 가보자고 했다. 모처럼 한국말로 막 떠들어서 정말 좋았다. 솔은 근데, 왜 또래랑 안 어울리나 했더니, 뭉쳐 다니는 건 싫단다. 그러게? 이번에 보니, 젊은 한국 사람들이 뭉쳐 다니네? 이곳 알베르게에도 한국 청년들이 뭉쳐서 있었다. 딱히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솔과 나, 세미마저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만 건네고 지나왔다. 뭐든 상관없다.


젊은 친구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을 꺼리는 모습을 종종 본다. 선입견 때문에 인사를 나누기 전에 피하는 것이다. 솔처럼 벙글거리며 웃어주는 친구가 귀하고 고맙다. 나이 대가 그래서인지, 20대보다는 30대 친구들이 한 마디라도 더 보태서 얘기한다. 그럴 때는 참 고맙다. 그들도 20대가 어렵단다. 아무래도 소통 체계가 달라진 것 같다. 그런데 이 마을, 너무 예쁘다. 예술적 감각이 넘쳐나서 이 마을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솔과 골목을 떠돌다가 다시 성당으로 들어갔다. 성가 연습이 한창이다. 오, 이건 뭐야? 시스터 엑터에 나오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만 들어도 행복하다. 성가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몸을 들썩이며 그들의 연습을 지켜봤다. 이들이 연습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무대에서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저녁 약속 시간과 겹친다. 아쉬움으로 성당을 나왔다. 본격적인 성가를 들으려면 저녁을 빨리 먹고 오는 수밖에 없다.




이상한 초대



비가 내렸다. 주황색 불빛을 바닥에 머금은 마을 광장은 고즈넉했다. 저녁을 먹기로 한 시간에 맞춰 숙소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그곳은 맛집으로 소문나서 미리부터 예약을 해놔야 했다. 다른 곳에서도 일부러 찾는 식당이었다.


오늘 저녁식사는 참 신비로운 조화다. 우선 알베르게 위층에 있는 방에 메디와 영국 아저씨가 묵었는데,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세미가 모은 자리다. 그러다가 슈퍼 가는 골목에서 마늘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고, 그 옆에 나랑 창문을 닫네 마네 실랑이를 벌였던 창문녀가 있었다. 어디 가서 원수 지면 안 되는 거다. 그들도 모두 이 저녁식사에 초대되어 예약된 것이다. 영국 아저씨가 거들고 세미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세미가 아무래도 나에게 엿을 먹이려고 준비한 선물 같았다. 성경 아저씨를 다시 만나도 어김없이 이런 조화겠지? 이 종합 선물 세트를 받고, 나는 메디와 솔이 있으니, 괜찮다고 여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광장에서 미스터 빈도 초대할 걸! 예약제라서 지금 달려가서 데려와도 못 먹을 자리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지간히도 외로운가 보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용케 잘 알아보고 뭉쳤다. 이게 끌어당김의 법칙인지 모르겠다. 같은 주파수로 공명하는 이들, 나도 그 사람들 중 하나, 우린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추천 맛집이라 그저 평타 정도일 줄 알았는데, 음식이 정말 훌륭했다. 나는 저녁을 먹고 성가를 듣기 위해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이 자리는 세미가 의도적으로 만든 자리 같아서 나 정도는 자리를 떠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분위기는 좋았다. 함께 셀카도 찍고, 나름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영국 아저씨의 딱딱하고 재미없는 주제로 넘어가자, 유럽 사람들의 그 특유의 ‘나 잘난 대화!’가 시작되었다. 지적 대화인 건 맞는데, 아, 피곤하다. 테드 강의를 듣고 말지!


마늘 타령 할머니도 영국 아저씨와 코드가 맞았다. 심지어 친했다. 창문녀는 그날 내게 강경하게 대하던 모습과 달리, 유순했다. 아마도 내가 부드럽게 대해서 마음이 풀린 듯했다. 속으로 나를 미워했을지 모르겠지만, 누구를 붙잡고 욕하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영국 아저씨에게든, 마늘 할머니에게든, 내 얘기를 왜곡해 전할 사람 같지는 않았다. 곧은 교사 스타일이랄까? 성향 상, 남 흉보거나 욕하는 사람은 아닌 듯해서 나도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다. 그녀도 그런 나를 진지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다음 날 내가 건넨 간식으로 그녀는 눈물만 안 흘렸지, 나에게 감동을 받은 듯 계속 고맙다고, 고맙다고, 자꾸 고맙다고 랩을 했다.

 

성가를 들으려면 지금 일어나야 했지만, 후식까지 먹어도 되겠다 싶었다. 비가 오고 모처럼 저녁도 근하게 먹는데, 굳이 성가를 들으러 가야 했나? 아무래도 이 자리가 불편한가? 사실 솔이 안 가겠다면 나도 가지 말까 싶었다. 근데 피아노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가서 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자 했다. 이제 자리를 뜨겠다며 일어섰다. 메디도 함께 성가를 듣고 싶다고 했다. 영국 아저씨도 메디가 가면 따라올 참이었다. 그럼 식사 다 마무리하고 시간이 되면 오라고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아직 진행 중인 성가! 연습 때와 달리 성당 내부 불빛이 환하게 빛났다. 아, 휘황찬란하다. 이 어둡고 비 오는 마을, 사람 없는 길 위를 걸으며 성당까지 도착한 보람이 있었다. 세상에! 여기에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구나! 이 시간에 다들 여기 있었어.



 I will follow Him


밝은 불빛 속! 나는 성당 앞쪽 기둥 옆에서 신나는 성가를 들었다. 어쩌다 보니 성가대가 춤출 때 나도 신나게 몸을 흔들대며 따라 했다. 처음에는 그냥 손뼉 치며 흥겹게 반응하는 정도였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손을 번쩍 들고 신나게 노래하며 춤출 때 나도 온 힘을 다해 따라 했다. 옆에서 성가대를 보던 사람들이 흘깃 나를 보며 웃었다. 괜찮다. 한국이 아니다. 동네가 아니다. 나를 기억 못 한다. 그러니 춤을 춰도 된다. 충분히 기둥에 가려졌다. 그런데 참았던 내 이성의 문이 이 노래와 함께 활짝 열렸다.


아, 시스터 액트의 I will follow Him~!

"꺄아악!"

모두 미치는 시간이다. 쏴리 질러의 순간이다!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후다닥 뛰어와 댄싱 퀸처럼 몸을 흔들어 젖힌다. 누구지? 엥? 이 격한 춤사위! 오 마이 갓, 세미였다. 언제 왔냐? 몸을 흔들며 세미와 기우제 춤의 한을 풀었다. 기우제 춤을 이곳 성당에서 풀 줄이야! 세미의 그 미친 춤을 성당에서 또 보게 될 줄이야. 키 큰 세미의 군인 춤과 나의 엉성 춤이 어우러지며 성가대에서 난리가 났다. 필 받은 우리를 향해 성가대가 한껏 신나는 춤을 노래를 선사했다. 아, 이 소울 넘치는 춤과 노래, 솔이 케케케 웃다가 사진 찍느라 바빴다. 우리는 성가대의 춤과 노래에 따라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성가대가 하도 우리를 향해 춤과 노래를 부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둥 너머에 있는 우리를 비디오로 찍었다. 앞에서 춤추던 성가대들이 대놓고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몸을 흔들어 댔기 때문이다. 사실 나오라고 하면 도망가야지 싶었다. 너무 우리를 향해 손뼉 치며 춤을 춰대서 우리도 흥이 달아오른 것이다. 시스터 액트의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미쳤다. 나는 춤을 못 추는 사람인데, 왜 까미노에서 자꾸 춤을 추는 걸까? 세미 때문이다. 나는 나이트클럽에서도 흥만 돋우었지 나서서 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성당에서 성가에 맞춰 이렇게 미친 듯이 춤을 추리라곤! 그 모습을 솔이가 웃겨 죽겠다며 입까지 틀어막고 우릴 비디오로 찍었다. 나중에 보니, 그렇게 흔들어 대는 뒤태가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 기둥에 가려졌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였다. 결국 격정적인 성가대의 춤과 노래는 나이트클럽에서 브루스 타임 없이 연거푸 다섯 곡은 내리뛴 호흡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성가대와 함께, 우리의 춤 공연도 끝났다. 성가대들이 퇴장하면서 우리에게 와 진한 포옹을 해줬다.

“와우,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신났는지 몰라요."

"노래하다가 당신들한테 달려가서 함께 춤추자고 하고 싶었어요.”

“당신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와 춤추고 싶었는데 억지로 참았어요.”

"신나는 춤과 노래를 당신들이 더 빛내줬어요. 고마워요!"


모두 흥분된 상태였다. 마치 우리의 콘서트장에 그들이 온 것 같았다. 다른 청중들도 모두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친 기분이었다. 우리에게 아는 척을 하며 악수와 포옹을 건넸다. 성당에서 나오는데, 어린 친구들이 우리를 연예인 보 듯했다. 모두 행복한 미소로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래서 연예인들 하는구먼! 그들이 좋아라 하니, 나도 좋았다. 오늘은 열일 다 했다. 성당에서 성가에 맞춰 이렇게 춤췄으면 됐지! 음, 그런데 세미는 왜 갑자기 와서 춤춘 거야? 그것도 혼자 어둔 골목을 뚫고서 왔네? 메디도 영국 아저씨도 없이 왔다. 세미 참, 골 때리는 녀석이다. 난데없이 춤추다가 쿨하게 퇴장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어디 가서 노는 데 안 빠지는 친구일 게다. 좀 얌전해야, 남자도 생길까 말까 한데, 길을 걸으며 20대 때 놓쳤던 남자만 곱씹는 세미, 너의 40대는 나의 40대와 함께 밝게 빛나고 있구나!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린 분명 기우제를 드린 게 아니다. 비가 먼저 내린 거다. 굵기는 따지기 없기!  비 내리는 벨로라도의 밤은 추웠다. 빗물을 머금은 골목 바닥은 어둠 속을 헤집고 다니는 우리를 위해 주홍 조각배를 띄우고 있었다. 마치 우리의 갈길을 안내하듯! 세미와 나, 솔은 뛰다시피 숙소로 향했다. 등산 양말에 슬리퍼, 심지어 세미는 맨발에 슬리퍼다. 얼음장 같은 물기가 시리고 아픈 발에 칼날처럼 스쳤다. 그럼에도 우리 입에서는 여전히 I will follow him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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